사학과의 창립과 수난, 재건
해방 후 연희전문의 교수진은 학교의 재건에 나섰으며,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의 정식 인가를 얻어 연희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사학과도 이때 설립되었는데, 다른 대학에 비해 비교적 빨리 전공별 강의와 연구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일제하 연희전문 시절에 형성된 문과의 전통이 그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며, 당시의 교수진 역시 연전시절의 교수를 중심으로 한 백낙준ㆍ조의설ㆍ민영규ㆍ홍순혁ㆍ염은현ㆍ이인영ㆍ이홍직 등이었다.
사학과 창립 이듬해인 1947년에는 교수ㆍ동문ㆍ학생이 합심하여 학술조직인 사학연구회(史學硏究會)를 결성하고, 한국전쟁 전까지 8회에 걸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에는 그간의 연구를 정리한 학회지 『史學會誌』(『學林 』제1집)이 간행되었고, 6월에는 대학원이 설치되었다.
또한 연희전문 출신인 염은현ㆍ홍이섭ㆍ김일출ㆍ민영규 등은 1950년 12월 25일에 창립된 역사학회의 초기 운영을 주도하여 오늘날의 역사학회에 그 바탕을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쟁은 사학과에 큰 시련을 주었다. 이인영ㆍ정인보를 비롯한 교수를 잃었다.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학문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교수ㆍ동문ㆍ학생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부산피난시절인 1952년 월 신학기부터 사학연구회를 재정비하고 이후 꾸준히 연구발표회를 진행하였다.
특히 1952년 10월의 제 10회 연구발표회는 ‘제1차 사학대회’라 칭하였는데, 대학 자체의 사학대회로서는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피난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사학과의 정기 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고적답사 및 답사보고회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친 사학과의 연례행사로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연세 사학인의 유대와 학문적 열의를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53년 8월 서울로 복귀한 후 문과대학은 지금의 본관 서편에 자리를 잡았으며, 홍이섭ㆍ이홍직 등 새로운 교수진과 이광린ㆍ이옥 등의 강사진을 보강하는 등 학과재건을 의욕적으로 진행하였다.
사학연구회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져서 서울 복귀 직후인 1953년 11월 21일의 제17회 연구발표회를 시작으로 매년 2~4회의 연구발표회가 이루어졌다.
또한 그 성과지인 『史學會誌』는 1954년부터 『學林』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면서 연세사학의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사학과도 이때 설립되었는데, 다른 대학에 비해 비교적 빨리 전공별 강의와 연구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일제하 연희전문 시절에 형성된 문과의 전통이 그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며, 당시의 교수진 역시 연전시절의 교수를 중심으로 한 백낙준ㆍ조의설ㆍ민영규ㆍ홍순혁ㆍ염은현ㆍ이인영ㆍ이홍직 등이었다.
사학과 창립 이듬해인 1947년에는 교수ㆍ동문ㆍ학생이 합심하여 학술조직인 사학연구회(史學硏究會)를 결성하고, 한국전쟁 전까지 8회에 걸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에는 그간의 연구를 정리한 학회지 『史學會誌』(『學林 』제1집)이 간행되었고, 6월에는 대학원이 설치되었다.
또한 연희전문 출신인 염은현ㆍ홍이섭ㆍ김일출ㆍ민영규 등은 1950년 12월 25일에 창립된 역사학회의 초기 운영을 주도하여 오늘날의 역사학회에 그 바탕을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쟁은 사학과에 큰 시련을 주었다. 이인영ㆍ정인보를 비롯한 교수를 잃었다.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학문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교수ㆍ동문ㆍ학생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부산피난시절인 1952년 월 신학기부터 사학연구회를 재정비하고 이후 꾸준히 연구발표회를 진행하였다.
특히 1952년 10월의 제 10회 연구발표회는 ‘제1차 사학대회’라 칭하였는데, 대학 자체의 사학대회로서는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피난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사학과의 정기 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고적답사 및 답사보고회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친 사학과의 연례행사로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연세 사학인의 유대와 학문적 열의를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53년 8월 서울로 복귀한 후 문과대학은 지금의 본관 서편에 자리를 잡았으며, 홍이섭ㆍ이홍직 등 새로운 교수진과 이광린ㆍ이옥 등의 강사진을 보강하는 등 학과재건을 의욕적으로 진행하였다.
사학연구회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져서 서울 복귀 직후인 1953년 11월 21일의 제17회 연구발표회를 시작으로 매년 2~4회의 연구발표회가 이루어졌다.
또한 그 성과지인 『史學會誌』는 1954년부터 『學林』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면서 연세사학의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