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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의 역사26: 백악기 식물혁명, 꽃
작성일
2020.08.18
작성자
시스템생물학과 관리자
게시글 내용

2018-06-26


들판의 야생화와 풀, 늪지의 수련, 논밭 벼와 작물들 모두는 꽃을 피워 씨를 꽃 안에 간직하고 열매를 맺는 속씨식물(angiosperms)입니다. 은행나무, 소철, 침엽수 등 씨를 바깥에 노출하는 겉씨식물(gymnosperms)과 구별됩니다. 현존하는 속씨식물(약 35만종)은 지구 전체 식물양의 90%를 차지하여 자신보다 2억년 이상 먼저 지구에 나타난 겉씨식물(1000여종)을 제치고 진화적 대성공을 이룹니다. 


“꽃”이라는 혁신적인 생식장치를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죠. 다윈은 속씨식물은 백악기 중반 1억년전 즈음 겉씨식물에서 진화하여 불과 1-2천만년 만에 지구 전체를 뒤덮는 경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꽃식물의 광속 진화와 폭발적인 생태계 확산에 참으로 난감해 하며 “생각만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미스터리(an abominable mystery)”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점진 진화이론으로 설명이 안되는, 그렇지만 무엇인가 해석을 내놓아야 하는, 골치거리였기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용어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의 연구에서 꽃식물은 다윈이 생각했던 것보다 4천만년이나 일찍인 1.4억년전에 나타났습니다. 최근 이를 한참 더 앞당겨 삼첩기 초기인 2.5억년전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옵니다. 점진적인 진화를 이루기에 시간상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겉씨식물이 지천인 환경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떻게 지구 생태계를 접수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이는 생명역사에서 가장 큰 스케일로 일어난 적응방산입니다. 당연히 많은 진화학자들이 그 난감한 미스터리를 풀려고 도전해 왔습니다.


꽃은 그 중심부에 여성 생식기관인 암술(carpels)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암술이 하나로 뭉쳐져 만들어진 씨방 안에 여러 개의 씨가 자라게 됩니다. 씨는 수정된 배아와 그에게 일정 기간 공급될 양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씨방이 열매로 자랍니다. 암술 주변에는 다수의 남성 생식기관 수술(stamens)이 있습니다. 이들 암수 두 생식기관은 현란한 색깔과 다양한 모습의 꽃잎(petals)으로 감싸입니다. 그리고 꽃잎을 받쳐주는, 대체로 이파리와 비슷한 녹색인 꽃받침(sepals)이 있습니다. 여기서 꽃잎과 꽃받침이 확연히 구별되는 꽃을 완전 꽃이라 하며, 그렇지 않은 꽃을 불완전 꽃이라 합니다. 대표적인 불완전 꽃에는 수련과 목련이 있습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꽃받침과 꽃잎 둘 사이의 어중간한 상태에 있거나 꽃받침이 아예 꽃잎으로 되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불완전 꽃의 꽃잎은 겹겹으로 더 풍부하며 탐스러워 보입니다. 어쨌든, 꽃받침이 되느냐 꽃잎이 되느냐는 꽃 발달에 있어 간발의 차이로 보입니다. 사실, 1980년 말 식물발생학자들은 식물 연구의 ‘실험 쥐’격인 애기장대(arabidopsis)를 이용하여 수술이 나올 자리에 꽃잎이 나오는 기이한 꽃을 만들어냅니다. 또 꽃잎 자리에 꽃받침이, 꽃받침 자리에 잎사귀가 돋아나는 꽃도 만듭니다. 이러한 초기 꽃 발생 연구는 잎사귀, 꽃받침, 꽃잎, 수술 등의 발달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핵심 유전자 조절프로그램의 변화나 복잡화에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후 20여년간의 연구로 과학자들은 꽃의 각 기관 발달에 관련된 유전자조절네트워크(GRN, genetic regulatory networks)을 어느 정도 자세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호주 동쪽 1600 킬로 떨어진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작은 섬에만 서식하는 황백색의 조그맣고 밋밋한 꽃을 가진 관목 ‘암보렐라(amborella)’가 있습니다. 이 속씨식물은 꽃받침과 꽃잎 구별이 없는 어중간한 꽃덮개(tepals)를 가지고 있으며, 또 여러 개의 암술이 하나로 융합되지 않은 분리된 상태로 원시적인 꽃 상태를 유지합니다. 과학자들은 암보렐라를 꽃식물 족보 가장 아래에 놓고, 현존하는 꽃식물 중 가장 오래된 아마도 1억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살아있는 화석으로 여깁니다. 이들의 유전체 정보는 초기 속씨식물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줄 것이기에, 세계 도처의 43개 연구소 148 연구진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유전체 전체 염기서열을 읽었고, 그 유전체 정보를 20여개의 다른 식물 유전체와 비교 분석하였습니다(1). 그로부터 얻어낸 중요 결과 중 하나는 속씨식물은 2.5억년전 즈음 한 종의 겉씨식물의 유전체가 통째로 중복되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운동성 척추동물이 고정형 척삭동물에서 두 번에 걸친 전체 유전체의 중복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진화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생명의 역사 14). 유전체 중복이 일어나면 여분의 유전체가 그전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기능이나 구조의 혁신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중 하나가 ‘꽃’이겠지요. 동물이 동물다워지는 것도 전체 유전체 중복 때문이며, 식물이 --우리의 눈과 코를 만족시켜주는-- 식물다워지는 것도 그러한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진화가 복잡화를 추구한다면 전체 유전체 중복은 아마도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닐까요?


암보렐라 유전체 분석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조상 겉씨식물은 꽃을 피우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유전자 세트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 유전자에는 꽃의 꽃잎이나 수술 등이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21개의 MADS-box 유전자들이 있습니다. 이 계열의 유전자는 유전체 중복으로 암보렐라에서 36개로 늘어나 있었고, 그보다 더 나중에 진화한 여느 속씨식물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나 있습니다. 암보렐라 이후에 가지치기한 속씨 꽃식물에서는 전체 또는 부분 유전체 중복이 진행되어 꽃의 색깔, 구조, 형태 면에서 다양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다르게 암보렐라는 초기 조상이 경험한 유전체 중복 이후 더 이상의 유전체 중복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1억년 세월 동안 심한 유전적 병목을 견디며 가까스로 살아남아 원시 꽃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계열의 속씨식물은 초기 유전체 중복 이후에도 여러 번의 유전체 중복과 전이인자 유입을 경험하면서 35만여 종으로 다양하게 진화하여 지구 곳곳에 퍼질 수 있었습니다.


속씨식물의 놀랄 만큼 빠른 종분화와 생태적 지위확장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곤충과 같은 수분매개자와 상호작용이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봅니다. 꽃에 알맞은 수분매개자는 식물에게 빠르고 확실한 번식을 담보하여 종간 생식격리를 유도합니다. 이로 인해 속씨식물이 다양하게 분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화석 증거는 초창기 꽃은 아주 작았고 화분매개자를 유인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크고 화려한 꽃이 나타나기 이전에 꽃식물은 이미 어느 정도 다양하게 분화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분매개자가 꽃의 다양화를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역으로 꽃이 곤충 섭식 장치의 다변화를 유도하여 곤충의 진화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많습니다. 더 나아가 꽃식물이 곤충의 식성이나 탐미적 감각이나 행동의 진화를 유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꽃식물 진화의 인과성과 관련하여, 1978년 공룡 연구의 거두 Robert Bakker 박사가 내놓은 '공룡이 꽃을 발명했다'는 흥미롭지만 지금은 잊혀진 가설을 소개합니다(2). 『쥐라기와 초기 백악기 초식 공룡의 섭식활동이 그 당시 흔했던 소철이나 침엽수 등의 겉씨식물에 커다란 진화압력으로 작용하여 식물은 빨리 자라야 했고, 외부 방해에 잘 견디며 잔가지에서 금방 이파리가 돋아나는 특성을 가진 속씨식물의 진화를 불렀고 또 그들의 성공을 가져왔다. 이들은 마치 산불이 난 자리에 새 생명이 돋아나듯이, 공룡이 지나가면서 초토화된 빈자리를 갓 진화한 속씨식물이 차지하면서 다양하게 분화할 수 있었다(disruptive selection).』 그럴듯한 가설지만 과거 30여년간의 연구에서 식물과 공룡이 상호작용한 증거는 없습니다. 꽃은 적도 부근에서 나타났는데 당시 공룡은 적도에 별로 없었습니다. 또 백악기 초기에 꽃식물이 생태적 주류는 아니었고 여전히 겉씨식물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즉, 공룡이 꽃식물을 진화하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꽃식물은 백악기 중기 이후 공룡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이었고 백악기 말에 만개했습니다. 초식 공룡은 식물에 여러 방어기제를 진화하게 했음은 분명합니다. 곤충도 마찬가지고요. 아무튼, 꽃식물은 수분매개자나 초식동물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진화 관계가 설정되어 다양한 종분화와 함께 생태적 지위확장의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공진화의 주도권을 식물이 쥐고 있었는지 혹은 동물이 쥐고 있었는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식물 꽃에 한 표 던집니다. 그리고 속씨식물의 생명역사 전무후무의 적응방산 사건에서 알고 싶은 부분은 ‘속씨식물이 고사리나 침엽수 같은 겉씨식물이 전부인 원시 숲에서 홀연 나타나 어떻게 다양화를 이룰 수 있었는가?’ 입니다. 초기 꽃식물 생태계 접수 시나리오는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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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mborella Genome Project. The Amborella genome and the evolution of flowering plants. Science. 342(6165):1241089. 2013

(2) Robert T. Bakker. Dinosaur feeding behaviour and the origin of flowering plants. Nature 274: 661–663,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