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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아웃사이더의 고해성사 (89 윤치호) (2008.11.29)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아웃사이더의 고해성사


89 윤치호




글을 쓰기 위해 색 바랜 기억들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1989년에서 1994년까지… 슬며시 드러나는 자질구레한 기억의 조각들이 모두 왜 이렇게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들뿐일까? 죄의식은 커져가고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맘이 앞선다.


89학번은 80년대의 마지막 학번이자, 과반수가 70년대 첫 번째 출생자들이기도 하다. 선배들로부터는 70년대 생이라서, 후배들한테는 80년대 학번이라서, 타자이어야 했던 그들은 타고난 아웃사이더였다. 시대적으로도 그랬다. 모든 대학생이 운동권이어야 했던 시절에서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나눠지기 시작한 때가 그 즈음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선배들처럼 혁명을 요구당하지도 않았고, 후배들처럼 생기발랄함을 누리지도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몇 차례 연행도 되고, 전경들한테 집단폭행도 당했지만, 선배들만큼 고통스런 시대적 아픔을 겪지 않았던 호강도 맘 한 구석에는 빚으로 남아 있다. 그런 아웃사이더 그룹 89학번 중에서도 나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대표적인 아웃사이더였다.


우리도 대부분의 영문학과 학생들이 가졌을 법한 원죄의식을 안고 출발했다. 우리 것이 아닌 남의 말과 글을 쫓고 있다는 강박증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단 한 번도 솔직하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이런 생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우리의 원죄의식과는 상관없이, 속세에는 영문과를 동경하는 시선 속에 영문만능주의라는 그 근원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담이 전해지고 있었더랬다. 다시 말해 영문학을 전공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위한 가장 안전한 투자는 영문학과에 진학하는 것이라는 다소 얼토당토않은 그런 신앙이 존재했었다. 나 또한 어느 정도 이런 미신에 현혹되어 영문학과를 선택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입학에서 졸업에 이르는 동안 그러한 신앙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동기들을 보니, 교육학 박사, 국문학 박사, 경제학 박사 그리고 영문학 박사(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영문학 박사가 있어줘서 너무 고맙고 다행이다) 등, 학계에서만 해도 다양한 영역에 포진해 있다. 게다가 신문기자, 방송기자, 변호사, 목사, 심지어 조만간 한의사(정말 보기 드문 뉴질랜드 한의사)도 등장할 계획으로 전문직도 의외로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다. 게다가 히딩크 매니저였던 친구도 있었고, 극단 단장을 했던 친구도 있으니, 예체능에 이르기까지 우리 영문과 동기들이 진출하지 않은 영역이란 없다. 아니, 허구라 믿었던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평소 ‘영문전공무한직업가능설’을 무시한 난 용서를 빌 일이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우리들이 입학하던 89년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인공 키팅 선생님이 영문학 교사이다 보니 우리 과 학생들은 이 영화에 대해 남다른 느낌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 영문학 개론 시간에 들었던 “Carpe diem”이라는 듣기에도 근사한 말을 Keating 선생님도 말씀하셨던 부분인데, 이 때문에 더 자극을 받은 우리 아웃사이더들은 무던히도 자주 강의실과 도서관을 뛰쳐 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심지어는 학교 밖으로 나간 친구마저 있었으니.


친구들 중에 어떤 이는 다른 전공을 선택하기도 했고, 또 어떤 친구는 2학년까지 다닌 후에 서울대로 전학 가기도 했다. 서울대로 전학가게 된 그 친구의 사연은 너무나 안타까웠던 이야기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비싼 연세대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 또한 그다지 여유 있는 집이 아니어서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는데, 친구가 학교를 떠나는 순간,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리는 것만 같아 불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는 “Carpe diem”이라는 말을 좋아했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부모가 연극 활동을 반대해 자살한 아이만큼 연극을 좋아하지도,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내가 학교를 떠난 94년 이후에 영어연극이 부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재학 중 89년의 Twelfth Night 이후로 영어연극은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89학번이 영어영문과의 영어연극을 마지막으로 참여하고 볼 수 있었던 시기가 된 것이다. 오랜 영문과의 자랑이었고, 영광의 중심이었던, 전통과 유산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여느 해처럼 선배들은 영어연극에 참여할 후배들을 물색하고 다녔다. 웬만한 셰익스피어 작품 한 편 올리기에 턱없이 남학생이 부족했기 때문에 남학생의 몸값은 지금의 최민식이나 송강호가 부럽지 않았다. 여자 역을 남자배우들이 했던 셰익스피어 시대와는 정반대로 많은 남자 역을 여학생들이 하는 이 기묘한 상황에서 나는 매우 싸가지 없게도, 선배들의 간곡한 청을 못 본 척 외면하고 말았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학교 시절 내 별명 중에 하나는 “영어공학과”였다. 1학년 때 전기공학과의 여학생을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고, 작년, 결혼 10주년을 맞이했다. 대학 재학 시절 내내 연애기간으로 보내다 보니, 과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같이하는 시간은 더 줄어들게 되었고, 난 점점 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과대에서 가장 먼 공대 여학생과 사귀었으니. 한술 더 떠서 여자친구를 자주 보기 위해 문과대 도서관이나 중앙도서관에 가기보다는, 공대 도서관엘 더 자주 가게 되었다. 심지어는 공대 친구를 통해 문과대 학생들은 가질 수 없는 사물함까지 얻게 되었으니, “영어공학과”라는 별명이 딱일 수밖에.


이렇게 난 공대 여자친구와 연애에 몰입하느라, 영문과와는 좀더 멀어지게 되었지만, 이 부분에서 정작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 건, 영문과 친구들과 선후배가 아닌 전기과의 남학생들에 대한 것이다. 당시 여자친구는 전기과의 단 한 명의 여학생이었는데, 같은 학번에만 백 명이 넘는 여학생이 있는 과에서 온 남학생이 자기네 과 마스코트인 단 한 명의 여학생을 가로채다니… 이런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철없던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렇게 영어공학과로서의 대학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연애로 점철된 4년은 조용히 지나가고, 여자친구보다 1년 늦게 졸업하게 된 나는 탕진해버린 영문과 생활을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1993년 여름. 최종철 선생님의 <셰익스피어II> 강의는 연극공연을 과제로 진행되었다. 명맥이 끊긴 과거의 화려했던 영어연극에 비하면 궁색하고 보잘 것 없는 공연이었지만, 그동안 쌓여왔던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기 위해 충만한 축제의식으로 임했다. 선택된 작품은 『한여름 밤의 꿈』.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비극적 죽음을 몰고 온 그 코미디였다.


연극공연을 과제로 진행한다는 것이 알려진 후, 수강생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수강생 전원이 배우로 참여를 해야 했고, 심지어 최종철 교수님도 작은 역을 하나 맡으시기까지 하셨다. 무대는 인문관과 종합관 사이의 계단식 강의실이었고, 조명은 천장의 형광등이 모두였다. 궁상의 축제였고, 결핍의 향연이었다. 그 중 백미는 보텀의 당나귀 머리. 가장 저예산스런 소도구와 분장으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서도륜 교수님이 자전거 타실 때 항상 쓰시던 헬멧이었다. 서도륜 교수님의 헬멧…


서도륜 교수님은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교수님에 틀림없다. 넥타이와 동시에 항상 헬멧을 쓰시고, 문과대 여학생들의 다리 굵기에 기여했던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메고 올라오시곤 했다. 그리고 항상 먼저 친근하게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셨다.




(어느 봄날, 나와 동기 한 명이 뚜렷한 방향과 목적의식 없이 인문관 앞을 서성이고 있다.)


서도륜 교수님: (힘들게 올라오시며) What are you doing here?


우리 동기: (깐죽거리며) he-he, we are killing time.


서도륜 교수님: (대뜸 한국말로) 너네 정말 이럴래?


우리 동기: “아뇨, 지금 도서관 갈 거에여.”


서도륜 교수님: 그래. 그래야지…




백양로에서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타시는, 구내 서점에서 책을 보고 계시는, 루스채플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보시는 교수님은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선생님의 지극히 부드럽고 온화하신 성품은 모든 학생들이 만장일치로 존경심을 표하는 부분이었다. 서도륜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매우 인연이 많은 선생님이셨다. 나의 지도교수이시자 우리 형의 지도 교수이시기도 했다(나의 형은 같은 영문과의 81학번 윤정호이다).


지도교수와의 첫 면담. 너무나도 자연스런 한국어 말투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내 기록부를 보시더니, 매우 반가워하시며, 나와 똑 같은 이름의 역사적 인물인 윤치호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약 5분 간 쉽게 들어보기 어려운 한국 근현대사의 연대기들과 ‘옛날 윤치호’의 지적 여정에 대한 감동적인 가르침을 들었다. 교수님 방을 나서는 나에게 자네도 옛날의 윤치호와 같은 학식과 능력을 지닌 인물이 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푸른 눈의 미국인 선생님은 갓 입학한 그때부터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항상 잊혀지지 않는 너무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축복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 그렇지 못하다. 부끄럽고 죄송스런 맘을 피할 수 없다. 더 많은 잘못들과 부끄러운 것들이 무수하지만, 다 용서를 구할 수는 없는 일. 돌아보건대, 비록 예의는 갖췄지만 성의 없는 그놈(들)은 참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후배였을 것이다. 친절하기는 했지만 별 가르침 없었던 그(들) 선배는, 참으로 존경하기 어려운 선배였을지 모른다. 별 말썽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열정적이지 못했던 그(들), 참으로 인상 깊지 못했던 제자였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아쉽고 미안하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추억하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