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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내 추억의 원천, 연대 영문과 (89 신화섭) (2008.11.29)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내 추억의 원천, 연대 영문과


89 신화섭




내 직업은 신문 기자다. 세칭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매일, 그것도 하루에 몇 건씩 기사를 쓰면서 회사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다. 기사 마감 시각이 임박했을 때는 불과 10여 분 사이에 A4 용지 한 장 분량의 기사를 완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글쟁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중순 모교의 최종철 교수님으로부터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나’라는 주제의 원고 요청을 받은 뒤부터다. 처음에는 고맙고 영광스런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교수님과 약속한 원고 제출 기한이 다가오면서 차츰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연대 영문과는 나에게 무엇일까.”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문득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내용으로 글을 풀어나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연대 영문과가 그만큼 나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일까.


학창 시절 시험을 앞두고는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고, 요즘은 기사 마감 시각이 가까워져야 글이 써지는 습성 탓인지 이번에도 원고 마감 기한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글머리를 열게 됐다. 그래, 영문과와 내가 처음 인연을 맺은 때부터 시작해야겠다.


1988년 12월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다음 날, 영문과 수험생들에 대한 면접 고사가 인문관에서 열렸다. 전날 중요한 시험을 마친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낯설었다. 게다가 아직 합격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겨울 바람이 유난히도 매섭게 느껴진 날이었다.


면접 대기실은 인문관 02 강의실로 기억된다. 저마다 초조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그때, 말끔한 차림에 여유 있는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이 강의실로 몰려 들어왔다. 과 선배들이었다. 예비 후배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약간은 썰렁한 농담과 애써 준비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연대 영문과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시작됐다.


신입생이면 누구나 고민할 동아리 선택. 나는 주저 없이 과내 ‘학회’인 역사 공부 모임과 노래패를 택했다. 평소 흥미를 느꼈던 분야였던 데다 선배들의 인상도 무척 좋았다. 더욱이 공과대나 상경대 남학생의 경우 여학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교내 서클을 찾아 나서기도 했는데 영문과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120명의 89학번 정원 중 여학생은 80명으로 남학생의 두 배에 달했다.


‘역사랑 함께 호흡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역사 사랑’의 준말이기도 한 <역사랑>과 ‘연세 영어영문’의 영문 약자이자 ‘소리치다’라는 뜻의 노래패. <역사랑>은 그 해, 노래패는 1년 전에 생긴 학회라 모임의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후 내 대학 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 두 학회가 있었다. 교우 관계와 여가 생활, 학점 관리, 심지어 졸업 후 진로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즘의 동아리 활동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어찌 보면 단순한 생활 속에서도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문과 특유의 온화하고 배려심 깊은 선후배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역사랑>의 경우 주 1회 정도의 세미나와 그보다 더 기다렸던 뒤풀이, 노래패는 주 1회 정기 모임 외에 각종 행사 공연 준비가 주된 활동이었다. 물론 여름과 겨울 방학에는 2박 3일 정도의 MT가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주었다. 용돈이 넉넉치 않은 때라 그나마 값이 싼 일명 떡볶국(주점 ‘청실홍실’의 별미였다)과 계란말이를 시켜 놓고 ‘안주발’ 세우는 후배에게 장난삼아 눈치를 주었던 일, 카페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농담 따먹기’와 도구가 필요 없는 ‘고-백-점프’ 등의 게임을 즐기다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신촌역으로 뛰어갔던 일, 그리고 학생 운동과 관련해 학회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했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학점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몇몇 전공 수업과 교수님들의 강의도 아련한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 푸근한 인상으로 『허클베리핀의 모험』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 조성규 교수님, 『파리 대왕』을 통해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惡)’을 일깨워준 김태성 교수님, 매일 발표 수업과 시간 무제한의 주관식 시험으로 따분한 영어학 강의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손한 교수님, 그리고 연극배우만큼이나 우수 짙은 분위기로 희곡을 가르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임철규 교수님 등등. 이 밖에도 수많은 교수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때 좀더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뒤에도 연세대 영문과는 여전히 내 추억의 원천이자 자랑으로 자리 잡고 있다. 40명 가량의 89학번 남학생들은 졸업 후 10년이 넘은 요즘도 정기 모임과 경조사 등을 통해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문들의 진출 분야가 워낙 넓은 탓에 사회생활에서 직접 만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 그러나 이따금씩 동문들과 마주칠 때면 과 선후배를 넘어서는 형, 누나, 동생 같은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곧 태어날 나의 2세에게도 가능하다면 연세대, 그 중에서도 영문과를 주저 없이 추천하리라. 이 글을 시작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영문과와 관련해 되새길 추억과 할 얘기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던 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