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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가 보지 않은 길 (88 정재식) (2008.11.29)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가 보지 않은 길


88 정재식




예상보다 많이 시간이 걸린 유학생활을 마치고 나는 지금 한동안 멀어져 있었던 모교에 돌아와 풋내기 강사로서 생활하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강도가 유학 생활 못지않은 요즘이지만 모교 교정을 거닐 때 그리고 강단에 설 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에 가끔씩 사로잡히곤 한다. 나에게 문학의 매혹을 매력적으로 가르쳐 주셨던 여러 교수님들, 전체적으로 참 선한 친구들이 많았던 88학번 영문과 남학생들, 그리고 무엇보다 군대 가기 전 나의 대학 생활 대부분을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게 만들었던 예쁜 동기 여학생들. 모교 교정 곳곳에 스며들어가 있는 그 옛 추억들의 조각을 발견할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 그때 내가 ‘가 보지 않은 (혹은 못한) 길’들에 대한 강한 동경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지금 이랬을 것 인테…” 등과 같은 진한 아쉬움으로 인한 동경이라고 할까?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근대 영국 소설과 비평이론으로 학위를 취득했지만 나는 영문학 전공 수업을 할 때 주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보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로 강의를 시작하고 그 시로 한 학기 수업을 마친다. 앞에서 말한 그런 이유 외에도 읽을 때마다 다양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 시의 깊이와 매력 때문에 나는 이 시를 좋아한다. 길, 선택, 망설임, 아쉬움, 담담함. 대학 때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접하게 된 그 주제들은 어설픈 문학도였던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었다. 그런데 그 시의 매혹과 깊이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 시기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의 힘들 앞에서 내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했을 때와, 그 체험을 통해 ‘가 보지 않은 (못한) 길’들을 내 나름대로 걸어가는 방식을 배워 나가기 시작하던 때인 것 같다.


18세기 영소설과 바로크 미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간 지 한 4년 정도까지 나는 큰 문제없이 살아왔던 것 같았다. 문학 작품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 자체를 아주 좋아하는 평범한 인문학도로서 비교적 큰 고비 없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해서 무난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과 상실감을 안겨 주는 어려움들은 닥쳐왔지만, 그래도 그때는 항상 돌아갈 길이 있었고 차선책이 있었다. 마치 목표하는 곳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순간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다시 출구로 나가서 되돌아가면 다시 내가 원하는 방향의 길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나에게 거의 존재론적으로 나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해 주는 사건들이 생겼다. 바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의 힘들. 그 힘이 진짜 우연인 것인지 아니면 그 이유가 이미 존재해 있었는데 나중에 현실화 된 것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지만,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고 더 나아가 돌아갈 수 있는 차선책마저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나를 정말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힘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전혀 가 보지 않은 그런 낯선 길로 발을 디뎌야 했고,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길을 선택하고 걸어간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때 전혀 가보지 않은(정확히 말하면 가보고 싶지 않은) 낯선 길을 가야 한다는 두려움 못지않게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은 예전에 내가 편안하게 가던 그 길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을 수 있다 라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나는 예전의 길들을 더욱 더 동경하게 되었고 그런 길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생기는 현실과의 차이로 인해 절망하기도 했다. 그 우울함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것인가? 과연 어떻게 해야 그 우연성의 사건들에 대해 내가 가장 합당한 응답을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체험들 속에서 나에게 문학은 더 이상 학술적 분석의 대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핵심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존재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때 어렴풋하게나마(지금은 뚜렷하게 느끼고 있는) 내가 체험한 삶의 핵심은 바로 우리는 가 보지 않은(혹은 못한) 길들을 향해 끊임없이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 핵심을 아주 유쾌하게 예술화한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학위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트리스트람 샌디』이다.


그 당시 나에게 아주 위안이 되고 큰 힘이 되어 준 작품은 각종 인생 조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생 지침서나 철학서가 아닌 『트리스트람 샌디』였다. 그 소설은 한 마디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에 관한 경쾌한 고백록이었다. 그 작품은 우연성이란 우리가 강박 관념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통제하면서 제거해야만 하는 두려운 유령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우연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삶의 불꽃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임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유령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인 셈이었다. 이제 그 소설의 작가 로렌스 스턴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 우연성의 유령들을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 유령들이 선물하는 ‘가 보지 않은 길’들을 어떻게 경쾌하게 갈 것인가?”가 된다. 스턴에게 있어 그 문제의식을 예술적으로 구체화해 주는 힘이 바로 유머이다. 이 소설에서 유머는 단순히 익살(comic)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들의 유령과 함께 춤을 추면서 삶을 기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창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머의 매력은 철학이나 견고한 이론들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고 명쾌하게 규정할 때, 그것을 비웃듯이 슬며시 빠져 나오는 우연성을 독특한 사유와 표현 형식을 통해 새로운 서사(narrative)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턴의 유머는 그런 창조의 과정 자체가 삶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그 유머에서 지금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동안 중단했던 『클라리사』와 『트리스트람 샌디』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그리고 미흡하지만 그동안 고생한 노력의 결실을 얻고 귀국한 지 이제 1년이 지나간다. 앞에서 이야기했든 지금도 가끔씩 88학번 동기들과 생활했던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과거보다는 앞으로 도래할 시간들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하려고 한다. 옛 추억을 동경하는 감정 대신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어떻게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대면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 보지 않은 길을 창조적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이 지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은 삶과 예술에 관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학술지 논문 형식에 맞는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 문학 비평의 엄밀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생한 삶의 기록들을 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써 나가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는 비록 그것이 조그만 실험에 불과할지라도 “가 보지 않은 길”들을 내 나름대로 경쾌하게 걸어가는 나만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