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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내가 배운 것, 내가 가르치는 것 (88 이연호) (2008.10.02)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내가 배운 것, 내가 가르치는 것


88 이연호




서클활동을 하지 않았던 나의 대학생활은 학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남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학과수업과 시험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고 내게 수업은 ‘무엇’에 앞서 ‘누구’가 중요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은 누가 있는지는 내가 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공기초와 필수과목의 경우는 우리학번 학생들이 모두 듣는 대형 강의가 많았고, 다른 교양과목들도 필수 내지는 시간표의 편의상 선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대형 강의라고 해도 강의별로 옆의 열과 앞의 구성은 조금씩 달라지고, 그에 따라 수업은 각기 다른 양상을 띤다. 우리 88학번은 예쁜 여학생들이 여럿 있었고, 개성 있고 멋진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니 이런 학생이 바로 앞에 앉아있으면, 옷이랑 스타일이 눈에 띤다. 얼마 안가서 성격도 짐작할 수 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인지도 알게 된다. 우리 학번이 전체 140명 정도가 되었으니, 친한 친구들 말고는 이렇게 수업시간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학우들부터 점차 알아나간 셈이다.


뒤에 앉은 친구들의 이름과 앞줄 학생의 구두장식리본 외에도, 공부하는 태도나 방식에 있어서 본이 된 학우들을 만난 기억도 잊지 못한다. 4학년 때 일이다. 이상섭 선생님의 현대영미시 시간에 옆에 앉은 선배 오빠가 연필을 손에서 놓은 채 거의 필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동기 여학생들끼리는 제법 경쟁심이 있어서, 모두들 선생님의 한 말씀이라도 놓칠까 필기에 열중하곤 했기에 이런 선배의 행동이 특이하게 생각되었다. 혹시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 아냐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옆에 앉은 계기로 친해지게 된 이 선배는 당시 내게 생소했던 현대비평들을 소개해 주었다. 한 학기를 지내는 동안 선배는 나를 따라서 조금씩 필기를 하기 시작했고, 또 나는 작품에 대한 선배의 진지한 태도와 깊은 이해에 적잖이 고무 받았다. 이 선배뿐 아니라 주위 학우들은 언제나 내게 고무적인 존재였다. 우리가 1, 2학년에 수강했던 영어작문이나 스피치 시간은 소규모이고, 말하는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영문학과 내에서 개설되는 이런 영어수업은 선생님이 굳이 조성하지 않아도, 매시간 팽팽한 긴장이 있다. 선생님이 주제를 정하시면, 각자 원고를 쓰고 암기해 와서 발표를 했는데 흥미 있는 아이템과 매끈한 프리젠테이션으로 주목을 끌 수 있도록 모두들 열심이었다. 우리가 졸업 후에 만나는 뛰어난 인재들 사이에서 긴장하면서, 또한 그 긴장을 견디는 내성과 자극을 반기는 근성은 영문학과의 수업에서 길러진 것이라 여겨진다.


나는 지금 강의를 하면서도 출석부상의 순서보다는 지리적 근접성을 염두에 두고 학생들의 그룹을 만든다. 나의 경우처럼 대형 강의는 처음부터 좌석표를 정해서 앉지만, 삼사십 명 규모의 교양과목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리 잡는다. 그렇지만, 처음 몇 시간만 지켜보면, 학생들은 매시간 비슷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낯설고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고, 간간히 옆의 학우들과 이야기하는 정도가 된다. 굳이 옆에 앉는 것이 싫었던 학생은 바로 두 번째 시간쯤에 다른 곳으로 피하니, 내가 조를 짜줄 때쯤 되면, 몇 조인지만 정해지지 않았지 사실상 조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 조별활동은 수업과 평가에서 중요한 한부분이고, 학생들은 나의 강의에서는 배울 수 없는 체험을 한다. 특히 덥고 나른한 여름계절학기 수업에서 나의 매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수업은 학생들 간에 만들어진 분위기와 열의로 진행되는 듯하다. 또한 나의 경험으로 볼 때, 학생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한 학기를 마치고 수업평가서에 학생들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조별활동이 참 좋았고, 친구들과 선배들을 알게 되어서 큰 소득이라고 적는데, 이런 평가글을 읽으면 나도 괜히 뭉클해진다.


그렇지만 평가서에 가장 많이 적히는 내용은 역시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첫 강의 때부터 “빡세다”는 말을 줄곧 들어왔다. 강의평가서를 처음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 중에 큰 글씨로 달랑 “빡세다”라는 한마디만 적혀있는 것을 읽고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서 잠깐 갸우뚱했지만 곧 ‘지독하다’ ‘공부 많이 시킨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내가 “빡센” 선생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집살이도 해본 사람이 받은 이상으로 더 잘 시키는 법이라고, 우리 영문학과의 선생님들께 배운 나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잘 알 수밖에 없다.


이제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를 이룬 선생님들에 관한 긴 이야기를 일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대학생활과 교우관계, 전공공부에 적응하느라 긴 1학년을 보내고 나서, 2학년은 좀 수월하게 다닐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불과 얼음 같은 2학년을 통과하고 나니 3학년부터가 한결 수월했다. 영어영문학의 초석은 2학년에 세워지는가 보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2학년 1학기 영문학개관 시간에는 최종철 선생님께, 2학기에는 손한 선생님께 영어학개론을 배웠는데, 지옥의 나락에 떨어지기를 수십 번, 덜덜덜 불안에 떨기는 셀 수도 없다. 학교에서 어려운 선배들과의 자리에서도 영어학개론 수업시간에 혼난 ‘무용담’을 털어놓으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후배들과는 어느 학번이 최종철 선생님께 더욱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지 시험과 숙제의 횟수를 들어 증명하기도 했다. 나는 늘 최종철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신’ 학번은 88학번이라고 주장했었는데, 몇 년 전에 최종철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셨다. 89년도에 선생님께서 처음 우리 88학번을 가르치시게 되어, 열정이 넘쳐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것을 시키셨고, 또 학생들은 어떻게 그 많은 것을 해냈는지 대단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매번 몇 백 장도 넘는 답안지를 일일이 읽고 평가하시는 수고를 자처하시면서 우리들의 얄팍한 실력을 끌어올려 주셨다. 나는 삼사십 명의 짧은 주관식 답안 몇 개를 채점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때마다 전공과목의 에세이를 평가하셨던 스승님들이 감사하다. 스승님들의 노고로 작품을 읽고, 비평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


또 현재 내가 강단에 설 수 있는 것이 손한 선생님의 호의와 격려 덕택인 것 같다. 손한 선생님의 영어학개론 과목은 우리학과 모든 학생들이 수강하는 초대형 강의였다. 그럼에도 나 하나가 대중 속에 묻힐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1:1 강의와도 같은 수업이었다. 제때에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시험은 주관식 문제로 거의 스무 문제가 나왔고, 시간도 제한 없이 주어졌었다. 나는 중간시험에 몇몇의 다른 잔류병들과 함께 5시간 넘게 버티다가 나왔는데도, 문제의 반도 쓰지 못했고 쓴 답안들도 신통치 못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는데도 시험시간 내내 끙끙대기만 했던 것 같다. 받은 점수는 형편없었고, 낙제를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완벽하게 기말시험 답안을 쓴다고 해도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완벽하게 답안을 쓸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중간시험 점수가 공고된 직후에 손한 선생님께서 중간시험을 잘 못 봐서 보충하고 싶은 학생들은 매시간 발표의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미리 순서를 정하지 않고, 매 강의마다 발표하라고 말씀하실 때 손들어 표하는 학생 한 명씩에게만 발표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제한하셨다. 그리고 물론 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점수에만 득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저하는 동안에 남은 기회의 시간도 줄어들고 있었다. 매시간 발표할 마음에 예습해 갔지만 나의 손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그 사이 다른 학생 손이 먼저 올라가곤 했다. 그러다 거의 마지막 기회일 것 같은 시간까지 왔다. 나는 비장하게 맘을 먹고 기필코 오늘은 나가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학생이 발표의사를 밝히고 지명 받았다. 선생님은 한 시간에 한 명에게만 시간을 할애하셨으므로, 이제 기회를 영영 놓친 것이었다. 낙심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발표하던 학생을 그만 멈추게 하시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이 나와서 설명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내 팔이 자의로 올라갔고 나는 내가 손을 든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때부터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어서 무슨 자동인형처럼 움직였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강단에 올라가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차분하게 진행해야 하는데 조절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터였다. 여느 때처럼 선생님은 발표 중간 중간에 내게 질문을 던지셨는데, 나는 너무 긴장한 상태라 그만 더욱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말에 제동이 걸리지 않아서 선생님의 질문 위로 질주하기도 했다. 당돌한 오버액션은 그 당시 선생님과 청중을 웃게 만들었고, 나중에 선생님께서는 내게 과분한 보상을 해 주셨다. 실로 거친 발표였지만, 내가 많은 학생들 앞에 섰던 첫 경험이었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게 되자 새 사람이 된 듯 용기가 생겼다. 나는 지금도 학생들 앞에 서면 떨린다. 여러 시간이 지나면 떨리는 것은 덜하지만, 여전히 편하지는 않다. 그래도 영어학개론 발표 때보다 더 떨리지는 않으니 괜찮다. 그리고 잘했다기보다는 하고픈 의욕을 높이 사주신 선생님의 배려에 힘입었고, 지금도 열의를 다해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늦기 전에 보충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는 것도 내가 손한 선생님께 받았던 그대로이다.


우리는 영문학과에서 엄격한 원칙주의자이시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사정을 헤아려 주시는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많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앞둔 스산한 11월 초에 김성균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 용기와 믿음을 주셨다. 선생님께서 너는 분명히 잘하리라고 믿는다는 말씀을 해주시자, 바로 전까지도 우울하고 착잡했던 심경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학생은 선생님이 자신을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때, 없던 능력도 발휘할 정도로 마음에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선생님들이 부족한 나를 변함없이 믿어주셨듯이, 나도 선생이 되면서 적어도 학생들을 좌절시키는 일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은 워드프로세서로 밤새 보고서를 쓰고서 새벽녘에 마지막 결론 문단만 완성하면 되는데 어댑터가 빠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채 저장해놓지 않고 화면상으로만 써내려갔던 터라, 그 순간 내 보고서는 몇 개의 굵은 줄로 찌그러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이 보고서 마감일이었고, 고소웅 선생님의 과제물이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후회해봐야 소용없고, 선생님께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연구실로 들어가자마자 감정에 북받쳐 분명치도 않은 발음으로 말씀드렸던 것 같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얼른 나를 안심시키시고, 보고서 제출기한을 최대한 늘려주셨다. 선생님의 관대하심으로 마음에 평정을 되찾고 다시 쓴 보고서는 처음 썼던 보고서보다 세 배 정도 나았다. 2년 전 선생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선생님은 제자인 우리들에게 언제나 경어를 쓰시고, 편하게 해주시려고 마음 쓰셨다. 대학원 낭만주의영시2 수업이 있던 날에는 행여 우리들 배고플까봐 늘 빵을 한 봉투씩 사 오셔서 쉬는 시간에 따뜻한 차와 함께 주셨고, 종강한 후에 댁에 초대해서 맛난 떡국을 먹게 하셨다. 선생님이 너무 그립다.


연대 영문학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인연들이 그립다.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서 오늘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새로운 과제가 있고 어려움도 있다. 그래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연세 영문인의 자긍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긍심은 우리 서로가 영감을 주고받은 동안에, 그리고 선생님들께 배우며 성숙한 과정에서 얻은 자산이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교양과목이지만 나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대학교육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도록 혹은 잃지 않도록 격려한다. 대학생들에게 취업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사회는 돈벌이를 보장하지 못한다면서 대학교육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기회를 엿본다. 데모와 진압으로 학내외로 어지러웠던 시절이었지만, 다수의 우리는 회의보다는 희망으로 자조가 아닌 자신감으로 생활했었는데, 요즘 젊은 대학생들의 전반적인 사정은 보다 좋지 못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의 선생님들, 선배들, 학우가 있으니, 그들의 4년 또한 우리의 4년만큼이나 의미 깊은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