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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내 안에 남아 있는 영문인의 (87 장유진) (2008.08.31)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내 안에 남아 있는 영문인의 흔적


87 장유진




더위를 재촉하는 비였을까? 아침부터 잿빛으로 물든 하늘이 굵은 장대비를 쏟아내던 지난 5월 하순. 이른 오후에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에는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보통 이런 시간대에 걸려오는 모르는 사람의 전화는 일부러 피하곤 했었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열게 되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종철 교수님의 생경한 목소리는 나를 이내 긴장시켰다. 생면부지의 후배에게 연대 영문학과 60주년을 맞아 글을 기고해 줄 것을 부탁하시는 대선배님. 학부 졸업 후 학교와 공식적인 관계는 거의 없었던 나에게까지 이러한 전화가 왔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망설여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우연이었을까? 전화를 받기 2주전쯤 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을 원문으로 다시 읽으며 내가 영문학도였다는 사실은 나에게서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지문 같은 것임을 전혀 뜻하지 않게 절감했었다. 나는 1987년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모범생으로 지낸 나에게 대학은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학교와 전공을 결정할 때도 심각한 고민도 장애도 없었다. 영어는 알파벳을 접한 뒤로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있어 하는 과목이었고 연세대학은 막연한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4년 대학 시절은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갈등과 방황의 시기였다. 영문과는 여자대학을 방불하게 할 정도로 여학생 천지였고 100명이 훨씬 넘는 대규모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그룹으로 뭉쳐 다니며 묻혀 지냈다. 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문과 밖의 학내 서클을 찾아 1학년 1학기를 정신없이 보냈다. 87년의 캠퍼스는 조용하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도서관과 책보다는 도서관 앞 광장 집회에서 외치는 구호에 더 익숙했었다. 나는 그 숱한 시위와 최루탄 가스 속에서도 수업과 시험이 취소되는 데 더 행복해하는 의식 없는 ‘순진한’ 학생이었다.


첫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우연히 영문과 셰익스피어 연극 동아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해는 <한여름 밤의 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비교적 젊은 교수님이셨던 이성일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셨다. 나는 연습이 거의 중반에 치달을 무렵 분장스텝으로 들어갔다. 지난 학기동안 너무 우리 학과에는 무심했었다는 자책감에서, 그리고 선배들을 알아야겠다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했었는데 공연이 끝났을 때의 보람은 물론 무척 컸다. 그 해 1학년 가을 ‘영문학의 밤’ 행사에서 나는 내가 어려서 익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때 피아노 반주를 해주며 서로 호흡을 맞췄던 동기와는 대학 졸업 후 연락이 끊겼다. 궁금하다. 그리고 보고 싶다.


1학년을 나름대로 분주하게 보냈지만 나는 내 전공학과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문학이나 언어학보다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구사하기를 열망했던 나는 일찍 진로를 외대통역대학원으로 정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문관 복도에 교환학생 공고가 붙은 것을 보았다. 그때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지원자도 적고 친구들도 생소해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공고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외국에 체류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 틀림없이 좋은 자극과 경험을 제공하리라고 확신하고 토플성적과 지원자격을 갖춰 교환학생 담당교수이셨던 원한광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나는 그 당시 교환학생으로 지원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원하던 덩치 큰 주립대학들보다는 한국학생이 거의 없는 동부의 작은 사립 college를 원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교환이라 상대 학교 측에서도 우리 학교에 올 의사를 비춰야 여기서도 학생이 갈 자리가 생기는 것인데 그 당시 미국 동부에서 우리나라의 대학을 찾는 학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1년이 넘게 기다리다 결국 3학년 2학기에 남부의 작은 college로 떠났다. 외국인이 흔치 않은 소도시의 대학생들은 동양에서 온 나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또 아프리카, 유럽 등 다른 지역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만나면서 국경과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진심어린 마음’이라는 것이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나는 여름학기까지 들으며 졸업을 하고 목표했던 외대통역대학원에 합격했다.


그 해에는 대학원에 같이 진학한 87학번 동기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통역대학원의 입학 경쟁률과 한영과 정원이 30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것도 바로 학부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은 입학생의 반이 조금 넘는 숫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보니 연세 영문인으로서의 긍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같은 입학 동기들도 그랬지만 각 기수마다 두세 명씩 우세한 수를 자랑하며 통역대학원 내에서도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들로 선생님들과 동기들에게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학부 때 학과 친구들을 다양하게 사귀지 못한 아쉬움에서 각양각색의 배경과 연령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대학원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인지 그때의 2년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꽉 찬 느낌이다.


대학원 졸업 후 프리랜서 통번역 일을 하면서 미국계 컨설팅 회사와 동덕여대 강사를 거쳐 삼성 계열사에서 계약직 통역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역시 동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두 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을 나은 후로 나는 일을 거의 접었고 지금은 직업은 있되 일은 안하는 전업주부다.


요즘 아이들이 조금 크고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언어의 효용에만 몰두해온 나는 이제 알맹이를 담는 그릇보다는 그 알맹이 자체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일이 아닌 내 자신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 우물을 파고 싶다. 학부 때 거부하고자 했던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깊어진다. 전공과목으로 들었던 18세기 영소설. 그때 만났던 Jane Austen, Daniel Dafoe, Charles Dickens, 그리고 영수필 시간에 읽은 Bernard Shaw, Charles Lamb, Aldous Huxley의 글들은 내가 4년 동안 들었던 모든 수업들 중 가장 열중했고 공감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 교재로 쓴 책들이 내 서가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을이면 가끔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청송대로 나들이를 간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마른 나뭇잎 더미를 밟으며 나는 아이들과 도토리를 줍는다. 그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문관으로 통하는 오르막길의 초입에 서서 20년 전을 떠올려 본다. 우리 부부의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도 바로 연세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내년이면 불혹(不惑)의 나이다. 이제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평생 추구하고 싶은 것에 대한 흔들림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러한 인식에 내 역사의 4년을 차지하는 연세 영문인으로서의 생활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