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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빛나게 꿈꾸던 그때를 기억하며 (87 신유용) (2008.08.31)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빛나게 꿈꾸던 그때를 기억하며


87 신유용




내가 아직도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번호, 8703073. 바로 내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학생으로 살았던 4년 동안 나와 함께 했던 학번이다. 1987년 3월에 입학해 영문학과 고유 번호인 03번에 성명 순으로 정해진 번호 73번. 이상하게도 이 번호는 내 기억 속에 항상 뚜렷하게 살아있다. 대학 졸업 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거의 6년 반을 연세의 품에서 살았지만 대학원 때의 기억보다는 대학 시절의 기억들이 가장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리고 미숙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행복하게, 또 가장 빛나게 꿈꾸던 때라 그런가 보다.


87학번 영문과 학생들은 모두 152명이었다. 정원 외로 들어 온 학생이 20명, 학력고사를 치르고 또 그 당시엔 흔치 않았던 논술 시험을 보고 입학한 학생들이 132명이었다.


여학생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남학생들은 40명 정도였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는 그 전 해나 그 다음 해와는 다르게 논술 시험을 보았다. 그때 시험 제목은 ‘잘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어려운 이 삶의 문제에 대해 그때에는 오히려 쉽게 썼던 것 같다. 아직 어려서 삶의 문제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단순해서 그렇진 않았을까? 논술 시험 후에 우리 영문과 교수님들과의 첫 대면인 면접에서는 요즘 흔히 이렇게 말하면 면접 점수 깎인다는 진부한 표현(이를테면, 인자하신 아버님과 자녀 교육에 열심이신 어머니의 2남 1녀 중 장녀로 자라…)을 써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교수님들께서 왜 영문과에 지원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영문학을 통해서 영미 문화와 함께 그들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는 계속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님들처럼 대학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그때 나의 꿈은 계속 공부하는 것, 내가 아는 것들을 남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영문학과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꿈을 접고 한 남자의 아내로, 또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그때에는 영문학 공부를 정말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며 어려운 일인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만만했었다. 지금은 비록 영문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삶을 살고 있지 않지만, 아직도 내가 영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내가 대학 시절 공부했던 책들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간혹 영문과 시절의 그 책을 집어서 아무 곳이나 펼쳐 보면 대학 시절 수업을 들으며 적어 놓았던 교수님들의 말씀이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다시 되새기는 그 말씀들이 삶의 진리임도 깨닫게 된다. 그때에는 어려서 그저 머리로만 받아들였던 말씀들이 지금은 가슴 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아무튼 부푼 꿈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학생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안고 시작한 대학 1년생의 첫 해는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못했다. 1987년의 시국 상황이 너무 격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 후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는 6월 10일, 우리학교 경영학과 2학년생이던 이한열 군이 시위 진압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 후 우리 학교는 6월 민주화 운동의 메카가 되어 한시도 편히 지낼 수 없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는 전경들이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기도 하고 그들이 교문을 일단 막아 버리면 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수업 거부, 시험 거부 등으로 그 해 여름에는 공부를 제대로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우리학교 거의 모든 학생들이 비록 직접 데모에 가담하지는 않아도 이한열 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집회를 도서관 앞에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졌다. 그 당시 우리학교에는 전경이나 데모대 뿐 아니라 TIME지 등의 외신 기자들도 많이 와서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기사로 내보내는 일도 많았다. 그 당시 우리 과 동기 여학생도 이 도서관 앞 집회에 참석한 모습이 TIME지에 실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 드디어 민주화 운동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후, 1학년 2학기 때부터는 좀더 평화롭고 흔히들 말하는 대학 생활의 낭만을 조금씩 맛보면서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6·29선언 후 평온이 찾아 온 대학에서 나는 우리 과 영어 연극부의 일원으로 여름 방학 내내 2학기 개강 후 상연할 영어 연극 <한여름 밤의 꿈> 준비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우리 영어연극부는 연극 연습 뿐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극기 훈련 비슷하게 P.T 체조 등의 체력 훈련을 한여름 땡볕 아래 노천극장에서 매일매일 하곤 했다. 그때 어찌나 힘들었던지 개강 후 학생회관에서 올린 <한여름 밤의 꿈>을 보러 온 친구들이 까맣게 타고 살이 쪽 빠진 내 모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들 열심히 연습하고 고생한 덕분에 우리들의 공연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다고 자부한다. 나는 당시 1학년생으로 단역(티타니아 요정 여왕의 시동요정들 중 하나로 이름은 Cobweb이었다)을 맡아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1학년 여학생들로 구성된 우리 요정 시동들은 노래와 춤으로 여러 장면에서 즐겁고 발랄한 모습들을 연출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로 정말 모든 영어연극부 선배, 친구들과 <한여름 밤의 꿈>에 흠뻑 취해 살았다. 우리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한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마지막 커튼콜을 끝내면서 느낀 그 감동과 허전함을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1학년 때를 생각하면 좀 쑥스럽지만 또 하나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 6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전 5월 우리 학교의 축제 기간 동안 친한 우리 과 친구들과 함께 꽃을 판 것이다.


지금도 아마 그렇겠지만 대개 축제 기간에는 과별로 혹은 동아리별로 여러 가지 장사를 하는데 우리들은 다섯 명이 하나가 되어 재미난 추억 하나 만들어 보자며 남대문 도매 시장에서 꽃을 사 와서는 바구니에 들고 다니면서 축제를 즐기는 커플들에게 꽃을 팔았다. 그때 장사가 정말 얼마나 힘든지 깨달았다.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겨우 용기를 내서 “꽃 좀 사세요.” 하고 커플들에게 내밀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겨우 아는 영문과 선배, 친구, 고교 동문 등의 도움으로 조금 팔고, 남은 꽃들은 친구들에게 선물 삼아 주기도 하고 집으로 싸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말 조금밖에 못 팔았는데도 본전은 했다는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조금 이윤이 남아서 우리학교 앞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도 사 먹고 라면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 함께 꽃 장사를 했던 우리 친구들은 다시는 장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같이 장사를 못하는 사람들도 손해를 보지 않았으니 밑지는 장사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 과에는 정원 외로 입학한 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 친구들은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하지만, 한자어나 어려운 우리말은 간혹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 때나 그렇고 대부분 나름대로 모르는 것은 물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영문과 학생으로서 첫 전공 기초 수업을 받던 날이었다. 한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얼굴을 익히시기도 하셨는데, 그분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자네 본관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보셨다. 그때 그 여학생은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친구였기 때문에 ‘본관’이란 말이 생소해서 교수님께 “교수님, 저 죄송한데 본관이 뭐예요?”하고 다시 여쭈어 보았다. 이에 교수님께서 “자네는 김 씨구먼. 어디 김 씨인가?” 하고 다시 물으셨는데, 이 친구는 이를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 것으로 오해해서 “저는 California Kim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이 때문에 우리 과 전체 학생이 그 친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해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었다. 그 친구가 그때 얼마나 무안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다. 게다가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하려한 것도 아니고 그저 무심코 질문을 던지셨는데, 그만 그렇게 되어서 당황하셨던 교수님의 얼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리고 국제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우리 영문학과 교수님들께서는 다른 학과 교수님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문학을 공부하시고 가르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다른 학과 교수님들보다 훨씬 더 유연한 사고와 함께 낭만적이면서 때로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어렵고 권위적이기만 한 존재라기보다는 따뜻하고 다정한 스승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 분들이 많다. 전공과목을 가르쳐 주실 때에도 책 속의 원문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은 직접 감정을 실어서, 아니 그보다는 당신 스스로 그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읽어 주시면서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 때문에 배우는 우리 학생들로서는 작가의 정신과 세계관, 그리고 작품의 정수(精髓)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쉬우면서도 즐거운 배움의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세상 어느 명배우들보다도 더 생생하게 Hamlet의 독백을 하시는 교수님도 계셨고, 시험을 보고 난 후, 우리가 제출한 시험지에 필자의 논지가 불분명하거나 주장하는 바의 설득력이 떨어질 때 하나하나 표시하고 꼼꼼하게 평(評)을 해주심으로써 각자 부족한 부분을 고쳐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교수님도 계셨다.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들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자식을 낳아 봐야 철이 든다고 하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 보면서 실감할 때가 아주 많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생인 내 아들이 국어 공부를 하면서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시(詩) 속에 나타난 화자(話者)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앉혀 놓고 짧은 동시 하나를 이해시키고 느끼게 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고 느끼면서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사회 경험도 없고 젖비린내 나는 어린 아이 같은 학생이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나의 동기생들도 학교의 울타리 안에 곱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이들이 많았다. 이런 학부생들에게 영문학이 결코 가르치기도 또 배우기도 쉽지 않은 학문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때 나는 사실은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면서 시험을 보고 레포트를 제출하곤 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마치 내 아들이 사실은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면서 머리로만 ‘아! 이건 이런 거야.’ 하고 참고서에 있는 정답을 외우고 아는 체 하는 것처럼… 그때 교수님들께서 우리 영문학과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많은 가르침의 반이나 제대로 그 당시의 내가 소화해낼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많이 든다. 하지만 내가 영문학을 배워서 정말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때 다 이해하지 못 했던 것들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진정으로 알아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영문학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넓혀 줄 수 있는 그런 학문이라 그런 건 아닐지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87년으로부터 벌써 19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그때 우리 학생들을 가르쳐 주시면서 많은 감동을 주셨던 교수님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그런데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떠올려 보려 해도 은사님들의 모습은 나를 가르쳐 주시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들이시고, 봄이면 벚나무 꽃잎들이 아름답게 휘날리던 인문관 주위와 길게 뻗은 백양로의 모습, 그리고 고즈넉한 청송대의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이 모두가 내 기억 속에선 전혀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 빛나게 꿈꾸던 나와 87학번 동기들의 모습 역시 그때처럼 싱그러운 모습 그대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