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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1986년의 추억 (86 박수현) (2008.08.15)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1986년의 추억


86 박수현




1986년은 내가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해이며, 내 인생에 있어 많은 것들이 변화한 시간이기도 하다. 당시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모든 것이 규정되어진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주어진 대학생활이란 것이 좁은 입시의 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가운 선물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감당 못할 자유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던 상황들, 그리고 특히 당시의 시대가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들에게는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 돌이켜 보면, 그러한 기쁨과 아픔들이 모두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게 남아있으며, 나는 그것들을 내 기억 속에서 때때로 꺼내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 외국인 교수님들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듣기 시험도 보고 교내에 외국인 교사도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의 영어 교육이란 문법과 독해에 대한 학습이 전부였다. 내가 연세대 영문과에 처음 입학하여 갖게 된 첫 번째 수업은 과목 이름이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아마 ‘스피취’(speech)였던 것 같다. 현재 구 인문관 1층 강의실에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파랑 눈과 금발 머리의 여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영어로 무어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교수님의 설명에 등장하는 단어를 겨우겨우 꿰맞춰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시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렇게 당황스럽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갑작스럽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한 번은 원한광 선생님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영문학 입문이었던 듯하다. 테스트가 있기 전날이었다. 나는 시험 시간에 영어사전을 가지고 들어가도 좋은지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연구실을 방문하기 미리 준비한 영어 대사를 수십 번 반복해서 연습하였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연구실을 찾아가 선생님을 뵙고 나왔다. 선생님의 연구실을 나온 후, 어찌나 긴장했던지 내가 무어라 말했는지도 제대로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한참 후 정신을 가다듬어 생각해 보니,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나는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어간 후 그 전에 준비했던 영어 문장들을 새까맣게 잊어 먹고, 너무나도 자연스레 우리말로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질문에 대해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대답을 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하시는 분이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 선생님은 내가 그토록 열심히 영어 문장을 준비했던 것을 모르셨을 것이다. 너무 창피하고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와선 그 생각을 하며 가끔씩 웃는다.


또 다른 기억은 한국인 교수님에 관한 것이다. 나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를 이봉국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들은 거의가 처음 접하는 낯선 외국 시인들의 작품이었다. 운문은 산문과는 달리 규격을 따르는 문장들이 아니라서 해석하기도 영 까다로웠고, 시의 정서를 느낀다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드는 일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새내기 영문학도들을 위해 한 문장 한 문장씩 꼼꼼히 해석해 주셨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시를 배울 때는 선생님의 설명이 진행됨에 따라 책에 필기할 내용들이 유달리 많았다. 여기에는 이러한 비유법, 상징 등이 쓰이며,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 시의 주제는 이러이러하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등등의 설명들을 필기하다 보면, 시가 적혀진 페이지의 넓은 여백의 공간이 깨알 같은 글씨들로 빽빽이 들어차기 일쑤였다.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영시 수업시간에 그러한 사정은 더욱 더 했다. 선생님의 설명뿐만 아니라 한 줄 한 줄 해석과 영단어의 의미까지 적다보면 책의 여백이 모자랄 정도였다. 필기를 하느라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해짐을 느꼈다. 나는 선생님이 감기기운 때문에 목소리가 변하신 것이라 짐작하고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필기를 하고 문구를 해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또 다시 수업 중에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의 시간이 좀 오래 갔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흘리고 계신 것이었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시어 눈물을 닦으셨다. 처음에 나는 선생님이 왜 울고 계시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얼마 후 그러한 상황이 시가 주는 감동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약간 놀랐다. 강의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킥킥 웃는 아이들도 나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러한 반응에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는지, 눈물을 다 닦으신 후 수업을 계속하셨다.


그 후 문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나는 낭만주의 시가 주는 감동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당시 교수님의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당시의 당황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몇 십 년을 영시를 공부한 학자가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에 대해 항상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라는 워즈워드 시의 한 구절은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나, 혹은 공부와는 거리가 먼 다른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영문과 동문들에게도,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