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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그해 여름 노천극장을 추억하며 (85 한지희) (2008.08.15)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그해 여름 노천극장을 추억하며


85 한지희




내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해는 1985년도, 연세대학교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친구들보다 일 년 늦게 대학생이 된 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지난 일 년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각오로 스스로를 닦달하곤 했었다. 그러나 각오는 각오일 뿐, 나는 그저 정해진 강의시간표에 따라 캠퍼스를 뛰어다니며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필기를 하거나, ‘문학토론’을 빙자하여 스터디그룹을 만들고선 시험범위를 나누어 요약 정리하는 수준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조차 숨이 가빠 헉헉거리는 영문과 신입생에 불과하였다. 아련한 그때의 기억을 싼 보자기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그러나 늘 심각한 표정으로 사소한 일상의 의미에까지 집착을 보이며 치열하게 삶을 살아보려고 했던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던 중 나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자기검열의 집착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그런 탓일까? 그 여름에 대한 기억은 늘 반짝거리는 금단추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당시 선배님들이 신입생환영을 겸한 영어연극관람 초대권을 일학년들에게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선배님들이 하는 말은 다 따라야 되는 줄 알았던 순진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남산 드라마센터에 가서 햄릿 영어연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때 선배님들이 영어로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며 강한 인상을 받았었는데, 특히 세분의 연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햄릿 역을 열연하셨던 지금은 우리학교 영문과 교수님이 되신 서홍원 교수님, 클로디우스 역을 수준급으로 연기하셨던 지금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님이 되신 봉준수 교수님, 그리고 햄릿 아버지의 유령 역을 펼치며 인상적인 저음을 보여주신 지금은 수능영어부문의 스타강사가 되신 윤정호 선생님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연기를 전업으로 삼는 연극인도 아닌 아마추어 학생들이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나는 그들의 몸동작 하나하나, 목소리에 실린 세세한 감정들, 분위기 있는 조명과 무대장치의 변화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었다.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는 영어대사로 진행되는 연극에 홀딱 빠져서 한 시간이 넘도록 지켜보면서도 나는 전혀 지겨운 줄을 몰랐고, 연극이 끝나고 선배들이 커튼콜을 하러 한 사람 한 사람 나올 때마다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박수를 쳤었다. 그리고 열시도 훨씬 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편으론 그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연세대학교 영문과 학생이 된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었고, 다른 한편으론 선배님들처럼 뛰어나게 영어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날 밤 잠깐이나마 일깨워졌던 나의 낭만적 감성과 창조적 호기심은 깊은 수면 속에서 어느덧 깨끗이 지워졌고, 다음날 아침 나는 예의 심각성을 입고 일상의 돌멩이들을 주워 의미화하는 일을 반복하는 진지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돌멩이들 중 하나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졌던 걸까? 아무튼 나는 어느 날 뜬금없이 심각함으로 점철된 내 삶에 염증을 느끼고 뭔가 새롭고, 좀 덜 심각한, 뭔가 좀 더 재미나고 신나는, 뭐 그런 경험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영어연극에 참가할 학생들을 오디션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혼자 오디션을 볼 용기가 없었던 나는 정유경이란 친구랑 함께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나와 유경이는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티즈비와 피라무스가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을 연기하게 되었고, 우리 둘은 고민 끝에 티즈비는 내가, 피라무스는 유경이가 맡기로 결정을 하였다. 사실 대사를 외우기에도 벅찼지만, 그래도 장면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결국 나는 라면상자를 자르고 이어 붙여 디귿자 모양으로 설 수 있는 벽을 만들기로 하였다. 게다가 입체감을 살리고 사실성을 높인답시고 나는 그 위에 흰 전지를 바르고 회색 물감으로 벽돌 모양을 음영을 살려 그려넣기도 하였으며, 화장지를 군데군데 뜯어 붙이고 그 위에 초록색 물감으로 칠을 해서 담쟁이 및 이끼 등등의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아무튼 오디션 당일 나는 성의껏 준비한 담장을 가지고 유경이와 무대 위에 올라 자랑스럽게 우리의 담장을 설치하고 예정된 연기를 보였다. 당시 연출을 맡은 안영준 선배님과 기획을 맡은 이영은 선배님, 그리고 기타 관련된 선배님들과 오디션 참가자들이 객석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킥킥, 큭큭 웃는 소리가 났다. 나는 창피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무사히 연기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엑스트라 역 두 개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시작된 그 여름날의 혹독한 시련들! 그 모든 것이 아마추어 학생들이 나름대로 역량 있는(?) 연기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으며 엑스트라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대본 연습은 기본이었으며,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한 피지컬 트레이닝, 발성 및 발음연습, 연기연습, 분장의 설정과 의상맞춤 등등 하나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기 위해 그러한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힘들고 지루했던 일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나는 것은 여름날 뙤약볕이 내려쬐이는 가운데 노천극장 주변을 달리고 극장으로 돌아와 팔벌려 뛰기, 엎어졌다 일어나기 등등 기초체력 훈련을 해야 했던 일이다. 운동을 다소 멀리하고 지냈던 나는 너무 힘들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하시는 선배님들에게 미안해서 끝까지 견디었던 기억이 난다. 체력훈련이 끝나면,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우리는 삼삼오오 포플러 그늘진 계단에 기대고 누워 여름날의 후덥지근한 바람을 맛보며 수다를 떨었었다. 친구들 옆에 가만히 누워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서서히 땀도 잦아들고, 호흡도 안정이 되면서 내 얼굴에 하얀 소금이 보송보송 올라와 있는 감촉이 느껴지곤 하였다. 어쩌다 시원한 바람이 인정 많은 아주머니의 앞치마처럼 펄럭거리며 스쳐갈 때면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는 포플러의 귀여운 잎들이 팔랑팔랑 수선을 떨며 기운을 내라고 우리를 격려해주곤 하였다. 어느 정도 땀이 식고, 정신을 차린 기색이 돌면, 영은 선배가 모두를 노천극장 맨 꼭대기로 올라가 둥그렇게 서게 한 뒤 발성연습을 시켰다. 낮은 소리부터 높은 소리까지 무대 위에서 관중석으로 내리꽂을 수 있는 소리를 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여러 명이 가지각색의 포즈를 취하고, 각양각색의 음색으로 발성연습을 하는 모습을 누가 보았더라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 같다.


여름 동안의 고된 연습을 거쳐 가을에 학기가 시작되자, 드디어 학생회관 4층에서 우리의 연극 The Skin of Our Teeth를 보여주게 될 날짜가 정해졌다. 공연당일 오후 설레는 가슴으로 무대 뒤에서 커튼을 살짝 젖히고 빼꼼히 내어다보니 객석은 이미 우리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로 빼곡히 다 차 있었다.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커튼이 올라가고, 일막 일장이 시작되었다. 시간의 경험은 주관적이라 했던가. 우리가 여름 동안 땀 흘리며 열심히 연습한 공연이 시작되었구나하는 감흥에 젖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미 엔딩대사가 말해지며 연극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커튼이 내려졌다. 나는 벅찬 마음으로 커튼콜을 기다렸고, 차례가 되자 무대로 나가 인사를 하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관중석은 다시 텅 비고,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은 우리들은 왁자지껄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쫑파티장으로 향해 분주히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텅 빈 강당을 나가기 전 나는 어두운 무대를 바라보며 생각했었다. 작년엔 선배들이 이 무대를 지켰고, 올해는 우리가 지켰지. 내년엔 또 새로운 후배들이 우리 영문과의 전통을 이어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영어연극을 하는 후배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할 수 있겠지 라고.


이후 거의 2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로 돌아와 나의 후배들을 만나고 있다. 교정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고, 내가 인문관으로 불렀던 건물도 위당관으로 바뀌었으며, 노천극장은 첨단시설이 갖추어진 현대식 극장으로 완벽하게 재구성되어 있었다. 나의 은사님들도 거의 영문과를 떠나시고, 이제는 내가 뒤를 이어 그분들의 열성적인 강의를 흉내 내고 있다. 강의실에서 매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의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는 귀한 후배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얘네들은 노천극장이 포플러가 시원스레 서있던 흙계단식의 노천극장이었다는 것을 알까? 가끔씩 옛 추억이 그리워 노천극장에 가보지만, 그 많던 포플러 나무가 모두 사라진 그 현대식 극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린 시절 발성연습을 하던 나와 친구들을 세워볼 공간을 상상해낼 수가 없어 가슴이 짠해지며 눈물이 고여 온다. 그럴 때마다 내 귓가엔 “Ubi Sunt?”라고 말씀하시던 이성일 교수님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나의 은사님들도 그리고 나의 선배님들도 나와 똑같이 세월의 흐름에 가슴이 허전하셨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의 후배들이 그들의 노천극장에서 추억을 만들고 있으리라. 그들 역시 성장하여 그곳을 다시 찾으면 아마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심정이 되어 서있게 되겠지. 산천도 변하고, 인걸도 간 데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변의 이치에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