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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사회부 (85 이진동) (2008.08.15)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사회부 기자


85 이진동




기자생활 15년째. 집에 들어가 옷 갈아입을 틈조차 없이 ‘빡세게’ 구르던 수습기자 생활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많은 고참기자가 됐다. 학창시절로 빗대면 초등학교에 입학, 대학 3학년쯤 와있는 셈이다.


그동안 정치부와 경제부도 겪었지만 기자생활의 3분의 2 이상은 사회부에서 ‘전투적’으로 보냈다. 현장냄새가 물씬 풍기고 해설보다는 팩트(fact)를 쫓는 사회부 체질이었던지 남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은 사건기자를 이골 나게 하고 있다. 사건기자는 정치적 편향성이 적은 편이다. 오로지 팩트와의 승부이고 팩트로 승부할 뿐이다. 바로 사건기자가 갖는 힘이고 매력이다. ‘사건기자’라고 하면 대형교통사고나 ‘살인사건’ 같은 유를 취재하는 정도로만 생각될지 모르나 사건의 범주는 굉장히 넓다. 정치와 정책 분야 외에는 모든 게 사건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몸은 고달파도 팩트를 끈질기게 파헤치고 분석, 조각난 퍼즐을 짜 맞추듯 사건의 윤곽을 그려내 기사화했을 때의 희열은 사건기자가 아니고선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그것이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권력자나 거대 권력이 숨기고자 하는 사안일 경우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다. 탐정이나 수사관이 조사 또는 수사하듯 장기간에 걸쳐 팩트를 추적, 수집해 이뤄지는 사건기자의 취재보도를 ‘탐사보도’라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가 대표적인 탐사보도이다. 어느 부서 치고 만만한 곳이 없겠으나 오랫동안 사회부 사건기자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탐사보도의 매력에 끌려서다. 기자생활의 절반 이상을 신문사 3D출입처 중 으뜸으로 꼽히는 법조출입기자로 지내온 동력이기도 하다. 한국일보에서 12년을 보내고 조선일보로 둥지를 옮겨 3년째이지만 사건기자생활엔 변함이 없다. 스트레스만큼 보람도 크고, 뭐랄까 기자생활의 묘미 같은 것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5년의 기자생활 동안 소소한 일까지 친다면야 많은 특종을 했지만 ‘무슨 무슨 게이트’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의 대형특종도 두 번이나 낚는 행운을 누렸다. 웬만큼 운이 따르지 않고선 힘든 일이다. 언론계에선 두 특종 모두 탐사보도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들이다.


하나는 한국일보 기자 시절 때 ‘진승현 게이트’라고 이름 붙여진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안기부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조선일보로 옮긴 뒤의 일이다.


‘진승현 게이트’는 젊은 벤처기업가인 진승현 씨가 수천 억 원을 불법대출 받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내가 관심을 가진 건 배후 세력이었다. 진승현 씨가 불법대출혐의로 구속된 이후 1년여 동안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배후를 물고 늘어졌다. 거대 국가정보기관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 오죽했으면 내막을 잘 아는 인물이 “당신은 알아도 쓸 수 없어”라는 얘기를 했을까. “어차피 못 쓸 것, 얘기나 한번 들어 봅시다”라고 밤낮으로 쫓아다니며 설득했던 기억이 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기사는 당시 국내정보를 총괄하는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차장이 진승현 씨 로비 창구역할을 한 인물을 국정원의 호텔 안가에서 폭행했다는 것부터 시작됐다. 단순 폭행 사건이었지만 웅크리고 있던 권력형 비리 사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라고 생각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도둑 침입 사건에서 시작된 것처럼 대형 게이트 사건이 폭행 사건에서 시작된 셈이다.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이후 ‘진승현 게이트’ 사건의 배후에 국가정보원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이 사건은 ‘국정원 게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1년 이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국정원 내부 관계자에게서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그땐 도청의 증거를 잡지 못했다. 국정원의 민간인 불법도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황우석 사건’과 함께 2005년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기부 국정원 도청 사건’ 특종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도청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기부 국정원 도청사건’ 취재는 재벌기업인의 대선자금 논의가 담긴 테이프인 ‘X파일’을 MBC가 입수하고도 보도하지 못한 데서 시작됐다. MBC가 보도 불가 결정을 내린 데는 ‘누가 언제 어떻게 왜’ X파일 테이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누가 언제 어떻게 왜’만 밝혀내면 ‘큰 물건’이 되겠다 싶었다. 구체적인 테이프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실제 그런 테이프가 존재한다면 ‘정보기관’이 생산했을 것으로 보고 취재한 게 주효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밀도청팀의 팀장을 찾아내 ‘자백’을 받을 수 있었다. 결과는 ‘안기부 미림팀,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 불법도청’이라는 기사로 보도됐다. ‘안기부 국정원 도청사건’과 ‘X파일 사건’의 문을 연 것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부터 ‘X파일’ 명칭도 ‘안기부 X파일’로 수식어가 붙었다. 취재과정에서 2001년 ‘진승현 게이트’ 취재 당시 나를 도청한 사실을 확인해 준 이도 있었다.


이 두 개의 특종으로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시상하는 관훈언론상을 2002년과 2006년 두 차례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2006년엔 기자협회가 시상하는 한국기자상과 함께 덤으로 우리대학 출신 언론인들이 주는 ‘연세 언론인상’까지 받는 ‘상복’이 쏟아졌다. 두 개의 특종 모두 국정원을 겨냥한 것이어서 국정원 사람들로부터 “우리 때문에 먹고 살고, 상까지 받았으니 한턱 내라.”는 농담을 듣곤 했다. 국정원은 정보기관이라는 속성 때문에 폐쇄적이어서 취재가 잘 안 될 뿐더러 기자들의 일상 취재영역에서도 벗어나 있는 편이다. 수많은 기자들의 취재경쟁이 덜한 일종의 ‘블루 오션’을 선택한 게 특종의 비결이 아니었나 싶다.


두 사건 이후 한번 물면 몇 년이 걸리든 놓지 않는다고 해서 ‘독종’ ‘독사’라는 별칭도 따라 붙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빈다고 해서 이름 앞에 ‘막’자를 붙여 ‘막진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까진 기자로서 상당히 치열하게 살아온 편이다. 언론의 여러 기능이 있겠지만 정부와 정치권력, 그리고 거대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 감시기능이야말로 중요한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는 그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해왔다. 아무리 민주화되고, 권력구조가 맑고 깨끗해졌다고 해도 ‘권력의 어두운 그늘’은 늘상 있게 마련이다. 자본권력이든 정치권력이 됐든 간에 권력의 그늘을 찾아 드러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음지와 막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일도 지난하게 발로 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곤하기도 하고 더러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문과의 많은 후배들이 언론계 진출을 희망하는 것 같다. 기자나 방송 PD직군이 일반 회사와 달리 일의 속성상 상당히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인 직업인 것은 맞다. 또 사회의 공익적 감시자로서 사회정의를 현실감 있게 추구할 수 있고, 보람도 큰 편이다.


반면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고달픈 직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생활자체가 불규칙하고 고강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기자는 마감시간, 특종과 낙종이 주는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100% 확인된 기사는 없기 때문에 아무리 확신하고 기사를 썼더라도 오보 가능성에 조마조마하며 밤잠 못 이룰 때도 많다. 큰 특종기사를 쓰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려 하기보다 대체로 즐기는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요즘 대학 생활을 다시 한다면 기자를 선택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방송의 PD영역 또한 경험하지 않아 왈가왈부하긴 뭣하지만 비슷한 처지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자직군의 평균수명이 다른 직종에 비해 짧다는 것만 보더라도 기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밖에서 보는 기자나 PD와 안에 들어와 느끼는 ‘기자’나 ‘PD’는 다를 수 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후배들이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조금씩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언론계에 진출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내가 왜 기자 또는 PD가 돼야 하는지’부터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이라면 분명 매력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80년대 대학생활을 한 나는 경험적 실천이 가능한 직업이라는 매력 때문에 기자를 선택했다. 당시 가졌던 의식이나 이념적 측면에서는 퇴행했지만 오히려 실천적인 문제에는 나름대로 더 다가선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언론사마다 대학생 인턴 기자제를 운영하기도 하는데, 인턴 생활을 해 보는 것도 ‘기자적성’을 타진하기엔 좋은 방법이다.


매년 10여 명 안팎의 후배들이 기자로 들어온다. 나의 초년병 기자생활과 비교하면 요즘의 햇병아리 기자들의 능력은 월등한 것 같다. 글쓰기 연습도 하고 들어오는지 얼마 안 된 수습기자들도 제법이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제2외국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도 있다. 인터넷 세대답게 순간 대처하는 순발력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솜씨들도 뛰어난 편이다.


그러나 2%부족한 게 있다. 근성은 ‘구닥다리’ 선배들을 쫓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풀어가는 것도 덜 익숙한 듯하다. 사이버 공간에선 수 틀리면 방을 빠져나가버리면 되지만 오프라인에선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기자직 진출을 희망하는 후배들은 막연하게 기자가 되겠다기보다는 어떤 기자가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둔다면 분명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