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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시간이 흘렀다는 건 (85 이성경) (2008.08.15)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시간이 흘렀다는 건


85 이성경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하는 건 때로 참 서글프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일을 기억해서 글을 쓰라니, 이건 너무 잔인하다. 아무리 담담해지려고 애를 써도 쏟아놓아야 할 게 그리 많았던 그 시절이 이젠 한껏 감정을 더해 기억하려 해도 그 기억이 하얗기만 하다. 괜히 “예, 교수님. 한 번 써 보겠습니다.”하고 공손히 대답했나보다… 후회가 한참일 때, 만난 지 10년도 더 된 선배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학교 앞에서 한 번 보자고. 그 참에 학교를 한 번 둘러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주 흔쾌히 약속을 정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변해버린 캠퍼스 어딘가에 우리의 옛날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월드컵의 열기가 없어도 늘 가슴이 뛰었던, 지금의 우리 아이들 없이도 삶이 환희였던 그 시절은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100주년에 수험번호가 100번이라서 좋은 일만 있을 거라던 친구들의 인사도 시들해지고 이런저런 모임도 많았던, 봄인가 싶으면 철지난 옷이 아쉬워지던 늦은 오후에 또 무슨 모임 때문에 독수리 상 밑에 서있던 우릴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지 꽤 낯이 익었던 선배가 농이랍시고 우리에게 그런 얘길 했었지. 옛날에, 이 대학이 세워지기 전 여기 이 자리에 한 아름다운 왕자님이 살았는데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아 이웃 마을의 마녀가 아주 많이 미워했다고. 결국 그 마녀의 저주로 왕자는 독수리가 되었고, 그 저주는 순결한 처녀만이 풀 수 있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저 독수리는 날지 못하고 있다고. 그 싱거운 얘기를 그냥 웃고 말 수도 있었으련만 유치하니 어쩌니 하던 우리는 기어이 그날 밤 모임에 온 언니들한테 다 일러 바쳤다. 그리고 유쾌하게도 우리를 더 의기양양하게 만든 건 어머, 걔 모르나 보네. 순결한 처녀가 지나갈 때 독수리가 날아가는 건 순결한 총각 눈에만 보이는데. 걔는 못 보나봐 라는 한 선배의 대꾸였다.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 같던 옛 기억은 그렇게 독수리 상에서 자라나서, 도서관으로 대강당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불러 오느라 계속해서 이어지던 선배 언니의 이야기는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 저기 대강당에서 채플을 들었어. 몇 번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첫 채플에도 안 갔어. 깜빡하고. 그 다음 날 누가 그랬어. 너 안 나와서 옆자리 남학생이 찾았어. 그래, 그랬었지. 1학년 첫 학기 채플은 좌석이 정해졌었지. 여학생, 남학생, 그리고 또, 여학생…


아저씨에게 인사만 잘 하면 출입증 없이도 들어갈 수 있었던 도서관은, 참고열람실 어디쯤 윤동주 사진 아래가 내 자리라고 정해 놓고 한동안 참 많이 드나들었던 도서관은 아직도 저렇게 서 있는데, 시험 기간이면 약속이나 한 듯 로비에 모여 하루를 정리하는 산책을 하자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분 좋은 바람이 불던 법대 앞에서 벚꽃이 비듬처럼 날린다고 하던 그 선배는 지금도 4월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밤 벚꽃놀이를 가자고 할까.


군데군데 불이 붙은 잔디와 쫓고 쫓기던 사람들을, 밥 먹다 말고 창 하나 사이로 지켜봐야 했던 곳이 학생회관이던가. 최루가스 냄새를 없애려고 식당 아주머니들이 피워 두었던 촛불 때문에 마치 엄숙한 의식이라도 있을 듯한 분위기였었던 식당 안에서 그날 내가 흘린 눈물은 머리로만 알던 현실을 가슴으로 이해해서였을까, 그냥 매캐한 냄새로 인한 생리작용 때문이었을까.


입학하자마자 윤동주 시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오던 친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어느 문인이 자기 자리라고 명명하고 자주 찾았다는 그 장소를 찾기 위해 한나절을 함께 보낸 그 친구는 지금도 내가 가끔은 그리워하고 때로는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인문관 앞을 지나 종합관으로 가는 그 가파른 길은 아직도 골고다 언덕으로 불리는지, 원숭이 동산에서는 자기들이 원숭인 줄도 모르는 남학생들이 여전히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구경하는지 궁금해 하다가 혼잣말을 했다. 아닐 거야. 요즘 대학생들은 많이 바쁘다던데. 열심히 얘기에 빠져 있던 언니가 응, 뭐라구? 하길래 인문관요, 거기 가 보셨어요? 거기도 많이 변했나요? 하고 물었다. 가 볼래? 예. 처음엔 호기 있게 일어났는데, 그냥 주저앉았다. 그만 둘래요. 왜? 그냥요. 저 건물 안에서 몇 년을 보냈다는 이유로 이렇게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사는데, 그런데도 그곳은 이젠 내가 가 볼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세월이 흘러 생긴 낯설음이 또 내 나이를 상기시켜 줄 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 계신다는 어느 노교수님의 헤어스타일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늘 반짝반짝 윤이 나서 우리는 늘 신기해했다. 18C 영시 시간에 뒷자리 누군가의 저 교수님 머리 흐트러뜨리고 오면 5,000원 줄게. 네가 해라. 내가 만원 준다. 라는 버릇없는 시시덕거림은 여러분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손수건으로 닦아 내시던 교수님의 눈물 때문에 뚝 끊어지고, 웃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따라 울 수도 없었던 우리는 문학은, 특히 시는 저래야만 할 수 있는 건가 보다고, 우리는 문학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교수님의 눈물을 본 건 그때 한 번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Farewell to Arms를 열강 하시던 교수님이 갑자기 이마와 머리를 마구 긁어대실 때 속없는 우리는 그냥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앞줄부터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앙하고 울음을 터트리시던 그분. 6·25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가 얼마 전 찾아왔는데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여전히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30년을 떠돌고 있다고… 지금 이 나이였으면, 그런 시대적 아픔은 아니더라도 어떠어떠한 이유로 여러 사람 앞에서도 울음이 터질 만한 아픔을 하나 둘쯤 가지고 있을 만한 지금 이 나이라면 말없이 숙연해지는 대신에 따뜻한 말로 그 교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었을까.


Norton Anthology는 누구나 우리가 영문과 학생임을 알게 해주던 교재였다. 가방에 넣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케이스를 만들어 따로 들고 다녔는데 커다랗게 쓰여진 이름 때문에 모르는 남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친구도, 괜히 아는 척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난처해하던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장난치던 그들은 알까. 그 책이 사전보다 얇은 종이로 되어 있고 깨알만한 글씨로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온갖 작품들의 맛보기가 다 실려 있음을. 그리고 거기서 출제된 50문제나 되던 객관식 문제를 시간 내에 다 풀어야 했던 우리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런 기억들은 한 번씩 꺼내보고 도로 넣고 하는 사이에 제 멋대로 자라기도 하고 변하기도 해서 그곳에서 보낸 4년은 싫어,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하는 느낌에서부터 한 순간만이라도 되돌아 갈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함까지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는 진학 상담조차도 들쑥날쑥해진 건 아닐까. 내가 누린 4년을 너도 누렸으면 좋겠다며 담임선생님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원서를 쓰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긴 너처럼 우수한 학생이 갈 곳이 아닌 것 같다고 극구 만류하기도 하고. 학생의 특성과 성격을 고려해서 라는 명분 뒤에는 변덕스러운 내 자만과 후회의 모습들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닌지.


집이 가까워서 차를 두고 왔다는 선배 언니를 교문 앞에 내려주고 돌아 나오는데, 운전을 시작한 후로 그냥 무심히 스쳐지나갔던 버스 정류장에 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서서 지나가는 버스마다 저건 현아 버스, 저건 수영이 버스, … 하던 아이가 생각나서. 굴다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가 일곱 칸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기차가 지나가면 타야 할 버스가 오는데도 하나, 두울, 세엣 세다가 버스를 놓치기도 했었다. 입으로는 셋을 세는데, 눈은 이미 그 기차가 일곱 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세는 걸 멈추면, 어김없이 넌, 셋까지 밖에 못세냐?는 핀잔이 날아 온 것도 저기였는데. 추운 밤 저 앞에서 친구랑 먹던 떡볶이와 오댕 국물은 낯선 이국땅의 찬바람 속에서 얼마나 아쉽던지.


한 번 앓고 나니까 보고 싶은 사람은 다 보고 살아야 할 거 같아서 전화 했다는 언니 말을 되새기면서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늘 빠지곤 했던 85모임에도 나가야 할 거 같고, 교통사고 이후에 찾아뵙지 못했던 지도 교수님과 사모님은 안녕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이번 여름 방학엔 내 기억 속에만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들을 현실에서 만나봐야겠다. 그리고 선배 언니의 권유대로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엄마, 아빠가 다니던 학교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두 아이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좀 더 많은 기억을 되새겨 봐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