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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열등감을 안겨준 영문과, 그러나 (83 조성관) (2008.08.1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열등감을 안겨준 영문과, 그러나


83 조성관




나는 대학시절 4년 내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면서 정말 거짓말처럼 눈 녹듯이 이 콤플렉스가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도대체 언제 내가 그런 열등감을 가졌었는가 싶을 정도다. 나는 곡절 끝에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가 1987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남녀공학의 경우 여학생들의 비율이 높은 학과는 아마 어문계열일 것이다. 나는 연세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남녀비율이 여자 8대 남자 2정도였다. 내가 콤플렉스를 느낀 것은 여학생들을 학업에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졸업 당시 학점 평균이 4.0 만점에(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2.5를 넘지 못했다. 이 같은 저조한 학점 때문에 나는 졸업 사정이 한창 진행 중일 때인 1986년 말 한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졸업정원제가 적용되던 시절이라 혹시나 졸업시험 대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내가 이 문제로 고민했다는 사실을 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졸업시험장에 들어가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는데 훗날 몇몇 학생이 시험을 쳐서 졸업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모른다. 내가 여학생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학년 1학기가 끝난 직후였다. 1학년 1학기 성적을 받아보고 나서 나는 큰 낭패감을 맛보았다. 학점이 2.65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는 내가 놀았다거나 아예 학업과는 담을 쌓은 운동권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서관에서 자리를 오래 지키기로 따지면 나는 상위권에 들어갈 것이다. 1학년 2학기 성적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느라고 했는데… 2학년에 올라가서는 전공과목에서 F학점까지도 받았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이란. 2학년 1학기 이후 나는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여학생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 4학년을 통틀어 A학점을 여섯 개 받았는데, 그 중 전공에서는 두 개뿐이었다. 나머지는 국문과나 정치외교학과 같은 다른 학과 전공에서였다. 그때 나는 남학생 비율이 훨씬 많은 다른 전공이 상대적으로 학점을 따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여학생들은 언제나 학점이 3.5점에서 4점 사이에 몰려 있었다. 내가 알기로 남학생들 중 학점이 상위 그룹에 끼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극히 일부의 남학생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중하위권에 몰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하위권에 속했다. 학점이 나올 때마다 나는 하위권을 떠날 줄 몰랐고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곤 했다. 내가 기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3학년 2학기 이후로는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학업과는 아예 담을 쌓다시피 했다. 이때 나는 공부 잘하고 예쁜 몇몇 여학생들을 흠모하기도 했으며 연정을 품기도 했다. 1987년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재수 끝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10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여학생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졌다. 졸업 직후 많은 여학생들이 삼성, 현대, 대우와 같은 큰 그룹에 취직했다. 다른 전공을 한 여학생에 비하면 영문과 졸업생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직장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그 회사에 오래 있지를 못하고 몇 년 안에 전직하거나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알기로 여학생들에게 주어진 직무라는 것이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업무가 단순했고 창의력을 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똑똑한 여학생들에게, 나를 4년 내내 주눅 들게 했던 그들에게 왜 그럴듯한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을까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기자 생활 10년째 이르는 지금 나는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때 나와 함께 경쟁을 벌였던 그 여학생들보나 훨씬 능력이 떨어지는 남자들이 그 여학생들보다 더 나은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가 마치 자신의 능력이 월등해서 차지한 자리인 양 여자들을 업신여기고 차별하고 있었다. 최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한, 남성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학생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1997년도 연세대 신입생 중 여성 비율이 개교 112년 만에 처음 40%를 넘어섰다. 신입생 중 남자가 58.96%, 여자가 41.04%였다. 1996년의 여학생 비율은 28.6%, 1995년도엔 30%였다. 80년대에 15% 수준이던 여성 비율이 이제는 40%를 넘기에 이른 것이다. 인문학부의 경우 158명 중 남자가 겨우 40명에 불과했다. 연세대 1학년 여학생들은 지금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있을 것이다. 그들은 입학 성적에서 남학생들과 비교해 뒤질 게 없었으므로 남학생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연세대측은 여학생 비율이 급격하게 늘자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다. 교세(校勢)가 약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학교 측은 왜 머리 좋은 여학생들이 다른 학교를 마다하고 연세대로 몰려드는데 엉뚱하게 교세 약화를 우려하는가?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내 경험에 비춰보면, 학교 측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머리 좋고 똑똑한 여학생들 대부분이 졸업 후에 사회에서 그 탁월한 능력을 활용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부 158명 중 남학생은 40명이다. 여학생 118명은 4년간 남학생 40명을 실력 면에서 앞설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80년대 영문과 여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때뿐이다. 지금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은 그때 ‘비실비실’하던 40명의 소수 남학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창 꿈 많은 신입생들에게는 잔인한 얘기가 되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꿈을 깨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입시 공부에 매달려 있던, 고등학교 여학생 티를 벗지 못한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생들이 우리 사회가 어떤지를 알 리가 없다. 여대생들은 어렴풋하게라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지 못 할 것이다. 특히 여성에게 얼마나 냉혹한 사회인지를 모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다. 일찌감치 장밋빛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 가닥 희망이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최소한 10배 이상 똑똑하지 않고는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어렵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남녀가 상대적으로 평등한 대접을 받는다. 실제로 어떤 차별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여건 아래서는 여학생들이 뛰어났다. 그러나 사회라는 성 차별의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그들은 몇 번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며 살아보려고 버둥거려보지만 곧 지쳐버리거나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똑똑한 여학생보다는 평범한 남학생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가 1997년에 쓴 책 『딸은 죽었다』에 쓴 글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이 책은 남성의 눈으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의 실태를 고발한 책이었다. ‘개인사’ 원고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부터 나는 여러 날 동안 무엇을 쓸까를 놓고 고민했다. 아마 개인사 원고 청탁을 받은 모든 선후배들이 그러했을 것이리라. 일방적인 학교 사랑 얘기를 늘어놓기도 그렇고 교수님 얘기를 하기에는 그럴 만큼 친하게 지낸 교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딸은 죽었다’에 쓴 영문과 시절 얘기를 떠올렸다. 2∼3년 전 영문과 남학생들과 상가집에서 만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때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학창 시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연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이때 공통적인 화제가 여학생들로부터 받은 열등감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학생들은 모두 비슷한 스트레스를 가슴에 안고 4년을 보냈던 것이다. 우리는 소주잔에 지난날의 스트레스를 털어 웃음과 함께 마셔버렸다. 연세 캠퍼스에서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면서 나는 ‘내가 기자가 되면’하고 꿈꿔온 게 있었다. 메이저 페이퍼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책을 쓰는 저술가가 되는 꿈. 나는 내가 애당초 목표로 했던 그 이상의 것을 이뤘다. 물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지만 인생의 중간지점에 서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참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처음 설계한 인생의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 생활 17년째로 들어선 지금 나는 사회생활보다 학교생활이 더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자 생활하면서도 조직의 쓴맛도 보았지만 20대 초반에 겪었던 영문과 시절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영문과 공부가 너무 힘들었다. 영문학은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넘지 못할 거봉(巨峰)과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동기생들 중에 영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강의를 하는 친구를 정말 존경한다. 지난 3월 동기생이 모교에서 희곡을 강의할 때는 나는 미리 양해를 얻고는 그 친구의 강의를 한 번 들어보았다.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4년 동안 인문관 강의실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나는 문학 냄새는 조금 맡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의 불기운을 조금은 쬐었다는 이 사실은 내 인생에서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숫자만 나오면 머리가 쑤시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는 어느 만큼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글쓰기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만일 누가 내 기사와 나의 책들을 읽고 기자 조성관의 사회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느꼈다면 이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산과 논과 내를 뛰어놀면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향의 산하는 내 가슴 깊은 곳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서정(抒情)을 심어주었다. 여기에 ‘연세대 영문과 4년’이 이런 서정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양육했다. 인생을 살면서 젊은 날 아름다움(Beauty), 진리(Truth), 사랑(Love)과 같은 개념을 놓고 토론하고 고민하는 시기가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뛰어들면서 삶의 무게에 눌려 허덕대며 인생을 살지 않나. 셰익스피어와 워즈워드를 얘기하는 공간 속에 내가 4년 동안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인생의 가장 큰 보양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숫자와 셈에 밝지 못해 그 결과 재테크에는 빵점이지만 나는 영문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보양식이 지금도 내게 글쓰기에 대한 활화산 같은 열정을 공급해주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