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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81 장은미)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81 장은미




요즘은 주로 동문과 북문을 통하여 출퇴근을 하는데, 가끔 정문으로 걸어 들어올 때엔 약 25년 전 입학식 날에 처음 산 정장을 입고 어머니와 그 길을 걸어오던 때가 생각난다. 그동안 공부를 마치고 애들 세 명 낳고 연세 동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동안 참 정신없이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갈등의 연속…


돌이켜보면 삶의 힘든 일들은 외부와의 갈등과 나 자신과의 갈등이었다.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하여 초조해하던 일들, 그리고 10여 년 전만해도 여자들에게는 너무나 높았던 취업의 장벽에 힘들어 했던 일들이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던 갈등이었다면, 유학을 갈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애를 몇 명을 낳을 것인가, 일과 가정에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분명 내면적인 갈등이었고, 매번 논문을 쓸 때마다 허우적거리었던 자신의 무능력과의 싸움도 빈번하게 겪어왔던 나 자신과의 갈등이었다.


후배들이 사회에 나와서 겪어가는 갈등도 내가 겪어왔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이 중에서 더 힘들었던 것은 자신과의 갈등이었다. 외부와의 갈등의 경우에는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과의 갈등은 그러한 확고한 믿음이 생기지 못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다. 자신과의 갈등을 겪는 구체적인 내용은 경우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이를 힘차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주제는 아마도 젊은이들을 가장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간단명료한 답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고민은 아니다. 이 고민은 지속적으로 진행해가면서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양분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경솔하게 고민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중압감을 갖고서 고민할 것도 아니다. 지금 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민이기 때문에, 그리고 장기적으로 해야 하는 고민이기 때문에 즐겁게 몰입해서 해야 한다. 따라서 술을 마시듯 힘들게 하지 말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듯 즐겁게 해야 하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경영학이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한 학문으로만 알고 있지만, 경영학에서는 기업 뿐 아니라 모든 실체를 경영의 대상으로 본다. 자신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경영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 자신의 강약점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된다. 전략적 사고에서는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도 중시하지만, 경쟁력 있는 기업은 환경조차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의 내부 역량 강화를 매우 중시한다. 환경을 강조하면 행위의 주체는 수동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중에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인가, 나에게 과연 그러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보다는 나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보완해야 할 약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자신의 역량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적극적인 고민과 개발의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영문과 동문으로서의 항변…


학문의 특성을 잘 아는 사람들도 영문과를 ‘영어를 잘하는 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85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20여 년 동안, 영문과를 다녔다는 얘기가 나오면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영어 참 잘하겠네요.”라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같은 과 친구들에 비하여 영어를 못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영문과의 학력을 단순히 영어 능력 배양의 기회로 몰아붙이는 데에는 정말 답답함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영문과에서의 경험은 숫자와는 판이한 수단, 매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현 뒤에 숨어있는 타인의 사고 방식이나 논리에 대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매우 기여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표현한 글이나 예술 활동을 보면서 그 숨은 의도나 논리를 이해하는 문학의 접근 방식은 내가 경영학 분야에서 나의 생각을 글로써 표현하고 말로서 강의하며, 또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읽고 평가하는 데에 아주 좋은 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경영학과 영문학은 매우 다른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영문과에서의 학업 기회가 경영학 교수로 활동하는 데에 매우 큰 자산이 되었다고 믿는다.


영문과 동문들이 여러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문과에서의 경험은 실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단순히 언어 기술의 함양보다는 아마도 깊이 있게 사고하고 분석하는 훈련에서 비롯되지 않나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 영문학도인 학생들도 향후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경력에 대해서도 폭넓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여학생임의 의미…


교정에는 아직 여자 교수들의 수가 적어서 여자교수로서의 위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로에 관하여 상의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여학생들과의 대화이다. 많은 여학생들이 “여자인데 박사공부 하러 유학 가는 것이 좋을까”, “여자인데 교수가 될 수 있을까” 등등의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다. 아직도 사회가 여학생들에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구나 싶다. 내가 처음 취업 선상에 나섰던 10여 년 전에는 여자 교수를 뽑는 데에 노골적으로 부정적이었다. 큰 이유는 남자들이 많은 경영학과에서는 여자 교수는 학생들 지도가 어려우며 밤을 새는 엠티 같은 모임에 동반할 수 없다 등등의 이유였다. 물론 가정이 있는 여자가 남자들보다 그런 활동에 소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 번도 “교수가 되면 1박 2일의 엠티에 갈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 없이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만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밤샘 엠티를 따라가는 것이 교수의 학생지도 임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하기 어렵다면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요즘은 그런 편견이 많이 줄어들어, 요즘 직장을 잡은 후배들에게서는 그런 푸념을 듣지 못한다.


여자임을 자신의 경력 구상에 있어서 주요 변수로 놓고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여자임은 결혼과 관계된 의사결정에서만 고려하라고. 결혼 의사 결정에 있어서는 남녀 변수가 주요하게 대두된다. 여자가 직장을 갖게 되면 직장에서 남자 못지않은 수준의 몰입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무리 없이 조화롭게 이루어가기 위하여 여자로서의 고민은 막대하다. 이러한 고민은 성별과 관계된 고민이고 물론 남자도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이 공부를 하면 나중에 어떤 직장을 갖게 될 것인가, 취업은 잘 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여자라는 것을 떠나서 한 명의 개인으로서 갖게 되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가령 외국에서 박사를 하고 대학교에 자리잡고 싶은 여학생은 힘든 유학 생활과 강의, 연구 생활을 즐길 자세가 되어있는가, 내 적성에 맞는 일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교수가 될 기회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남학생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분야에 따라서 더 보수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가 결코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데에 주요 변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비용과 이득 측면에서 보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고민이다. 암만 고민하여도 지금 내가 바꿀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고 나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고, 이 길을 추진해 감에 있어서 존재하는 외부적인 불확실성을 당당하게 넘어설 것이라는 각오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한 부러움…


이렇게 적다보니 내가 많이 이룬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 나갈 기회보다는 과거를 생각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나이들어감에 대한 서글픈 감정이 많이 든다. 나이도 불혹을 훨씬 넘어섰고 엄마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애들이 셋이나 있으니 강의나 열심히, 논문이나 열심히 하기에도 시간은 매우 부족한데 무슨 고민할 시간이나 있으랴 싶다. 그래서인지 장래에 대하여 고민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솔직히 참 부럽다.


안정감과 현실 안주는 같이 가는 것 같다. 마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도전감이 같이 가듯이.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다소의 불안감을 느끼는 젊은 후배들은 그러한 시기에 있음 자체를 즐기며, 그러한 기회가 결코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매우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