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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캠퍼스 투어 (81 소희정)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Campus Tour


81 소희정




지난 4월 아이들의 봄방학을 맞아, 남편과 나는 9학년, 6학년인 두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이 목표로 하고 싶다는 동부의 유명 대학과 도시를 구경하러 갔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또는 신문, 잡지를 읽고서, 우리나라에서 유학 오는 학생들 못지않게 여기서 고교를 졸업한 아이들도 소위 ‘명문’ 대학에 입학하고 비슷한 우수두뇌를 가진 아이들과의 경쟁을 견뎌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부모로서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미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좀더 구체화된 꿈을 꿀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대다수 아이들이 11학년 혹은 12학년에 캠퍼스투어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일찍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H大와 Y大를 가겠다고 하는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말들이 대견스러워 계획하게 된 여행이었다.


캠브리지 여행 다음 날, 보스턴에서 앞선 기차 편 하나가 기계 결함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콩나물시루 같은 앰트랙 기차를 타고 두 시간여를 시달리며 소도시 뉴헤이븐으로 갔다. 커넥티컷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라던 뉴헤이븐에 자리잡은 Y大는 고색창연한 캠퍼스 건물들이 정말 아름다운 대학이었다. H大를 목표로 삼고 싶다던 큰 아이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건물과 분위기 때문에 학교를 선택하지 말라고 하려다 말고, 나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시간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美國 私學의 명문이 나의 모교 연세대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였으리라. 건물들의 古雅함뿐 아니라 학교 영어 이니셜 및 상징 색, 심지어 교훈도 비슷하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대학을 선택하기 전에 서울대와 연세대, 이화여대로 드라이브를 시켜주셨었다. 이미 관악산 캠퍼스로 옮긴 서울대는 그 겨울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담쟁이덩굴로 덮인 옛 문과대 캠퍼스는 고답적이고 정겹고 운치 있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윤동주 시인의 학교, 나의 고교 국어 선생님들의 모교… 나도 그런 막연한 낭만에 대한 동경과 고풍스런 문과대 건물들에 이끌려 연세대를 가기로 마음먹었었던 것이다. 번역본으로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말장난에 이끌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이미 오래전에 결정했었고…


이제 25년여의 세월이 흘러 새로운 世紀로 들어선 지도 어언 5년, 난 고국을 떠나 미국의 시민이 되어 버렸고 나의 두 아들들이 학교 영어 시간에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고, 연극도 하는 동안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나의 셰익스피어 책들과 노턴을 들춰가며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40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이곳으로 移住하며 짐을 꾸릴 때,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할 책이라며 챙겨왔지만 사실 마음속 한 구석엔 어느 방학엔가 최건영, 박진영 두 친구와 셰익스피어 스터디를 하며 내가 영문과를 오려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한 기쁨을 누렸던 뿌듯함을 잊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흔히들 영문과 하면 셰익스피어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사실 대학 때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그의 말장난을 즐겼다고는 하나 셰익스피어 연극을 영어로 접한 기억은 우리 영문과 친구들, 선후배들이 했던 영어 연극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년 전 방한했을 때 마침 로얄 셰익스피어의 공연이 있어 같은 과 친구로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김은경과 관람을 갔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작가 자신에 관해 여러 다른 관점들이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현대적 해석을 해서 난 사실 그 공연에 실망을 했다. 다만 그 공연 관람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까닭은 학창시절 셰익스피어를 가르쳐주신 낭만파 교수님 이성일 선생님과 우연히 아래층 식당에서 마주친 일이다. 학부만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한 까닭에 교수님들과 개인적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나의 마음속엔 항상 그 분들 한분 한분의 모습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영문과에서의 3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성일 교수님은 강의 중 문득 셰익스피어 구절을 멋드러지게 암송해 주셨고 사은회 때엔 탁월한 바이올린 솜씨도 자랑해 주셨다. 우린 그분께서 유학시절 사전도 사용하지 않으셨고 아르바이트로 교정을 본 학생이었다는 등등의 확인되지 않은 말들을 서로 주고받곤 했었다. 그런 그분과 또 한 분의 낭만파 교수님이신 조신권 대선배님을 모시고 갔었던 졸업여행의 추억도 가끔 회상하는 터에 졸업한 지 십수 년 만에 우연히 뵙게 된 것이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선생님 식사비도 같이 계산했더니 선생님께서 연극이 끝나고 꼭 茶 대접을 하신다고 하셨다. 말씀만도 감사하다고 했는데도 은사님께선 공연 후에 같이 오신 분과 기다리고 계셨다. 짤막한 시간이나마 예전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말씀드렸더니 그건 옛말이라고 하셨다. 세상이 바뀌어 이젠 학생이 소위 ‘교수 평가’를 하는 제도가 생기고 낭만이 사라졌다는 요지의 말씀이셨다. 선생님 모습이 하나도 변하시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는(정말 그렇게 생각되었었다) 집에 와 앨범을 들춰보니 80년대 중반엔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젊으신 교수님이셨었다.


사실 영어 실력을 늘린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문학이라는 전공이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다행히 나의 부모님께서는 실용학문인가 아닌가로 전공을 선택하도록 나를 가르치시지는 않으셨다. 늘 앉는 도서관 자리에 앉아 저무는 햇살과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예쁜 영어 단어를 보면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했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도서관 자판기 휴게실에 가서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도 했었는지… 암울했던 80년대에도 어느 날 캠퍼스에 진입한 전투경찰들과 학생들이 도서관 의자를 들고 싸우던 걸 목격하거나 하는 서글픈 현실 이외에는 연세대학교 영문과 학생으로서의 난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 조신권 교수님은 칠판에 천사들의 계급을 그려가며 우리를 영시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었다. 이익환 교수님의 언어학도 참 재미있었고 다행히 그분께서 리포트를 타자로 찍어 제출하라고 요구하시는 바람에 타자도 배워 KBS 입사 후 바로 원고를 타자로 찍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당시엔 현실감각이 없어 왜 타자 찍는 기술 같은 것을 요구하시는지 좀 귀찮아하기도 했지만. 또, 김태성 교수님의 영미소설도, 임철규 교수님 희곡도 솔직히 말해 공부라는 느낌 없이 즐겁게 강의를 들었었다. 그리고…고소웅 교수님. 선생님께서는 청력이 약하셔서 고생하셨지만 그 천진무구한 어린이 같은 미소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용서하세요, 선생님)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에 정말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또한, 다른 교수님들은 어떻게 지내시고 얼마나 달라지셨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만 유달리 영문과로부터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련만 연세대학의 기독교적 ‘사랑’ 정신에 기반을 둔 인문교육 커리큘럼과, 앞서 언급한 영문과 교수님들께서 선생님으로서, 때로는 동문 선배로서 보여주시는 인생 경험과 영어영문학에 대한 지식은 나의 사고의 깊이를 더해 주었고 인생의 폭을 넓혀주었으며 졸업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애정을 고이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믿는다. 비록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난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지언정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열정을 갖고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연세 영문인으로 보낸 4년(영·독·불 계열 1년 포함)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자양분을 듬뿍 주었다고 믿는다. 우리 영문과가 맞은 환갑을 축하하며 나와 나의 동기 친구들이 환갑을 맞을 무렵엔 정말 세계 구석구석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도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남과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 파티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