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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연세 영어영문학과를 생각하며 (80 황원숙)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연세 영어영문학과를 생각하며


80 황원숙




대학시절의 기억에 대해서 써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나처럼 학창생활이 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의 기억에 뭔 관심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의 대학시절은 대단히 재미있거나 화려한 사건들로 장식되어 있지 않다. 학교에 가고 수업 들어가고 수업에는 잘 안 빠졌고(그게 특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늦지 않게 집에 가고. 학교에서 벌어지던 수많은 행사와 사건들에서 나는 구경꾼이거나 정신적인(?) 동조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저것 좀더 참석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내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에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의 희생과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 괜히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한 활동이 없었어도 대학시절의 기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해마다 대학 신입생들과 만나는 직업을 가진 나는 대학 1학년 수업의 첫 시간에 내가 만일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 일학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지나간 나의 청춘이기 때문이 아니라 연세에서의 시절은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고등학교까지 그저 그렇게 지나치던 자연 속에서 봄을 느꼈다. 교정의 개나리, 벚꽃, 푸른 나뭇잎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에서의 첫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5월 학교가 장기 휴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첫봄은 아주 짧지만 인상적이었다. 사실 80년대의 대학생활은 봄을 즐기는 여유를 사치스럽게 만들었다. 봄이면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의 시위와 학교 안에 상주하는 경찰들로 소란스러워지고 지독한 최루탄 덕분에 꽃향기는 맡아볼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그 최루탄 냄새까지도 포함한 대학교정에서의 봄 때문에 나는 대학시절이 그리워진다.


나는 틈나는 대로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피고 다녔는데 그 계기가 된 나의 오해가 하나 있었다. 종합관 6층 어학 실험실에 복도 창문을 내다보던 나는 학교에 밭이랑 같은 것이 언덕으로 죽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학교에 웬 밭일까 하면서 쉬는 시간에 찾아다녔지만 내가 보았던 그 밭은 없었다. 다시 종합관에서 내려다보면 분명히 밭이 있는데 찾아다니면 밭이 없는 것이었다. 밭이 있을 법한 곳에 밭이 없어 아픈 다리도 쉴 겸 찾아 간 곳이 노천극장이었다. 그 곳이 내가 본 밭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층층이 깎은 언덕에 밭이랑처럼 좌석을 죽 만들고 잔디를 심어 마치 밭처럼 보였던 것이다. 얼마 전 노천극장에 돌로 된 좌석을 만든다고 기부하라고 연락이 왔을 때


“노천극장의 그 흙냄새가 이젠 사라지겠구나, 나같이 밭을 찾아다닐 사람은 없겠구나.” 하면서 혼자 웃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학교를 산책하는 버릇은 지속됐지만 대학 일학년 때만큼 선명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대학교 1학년은 문과대학 전체 계열이었는데 2학년으로 가면서 학과로 나누어졌다. 그때 영문학과 지망생이 많아서 정원의 2배인 70명이 영어영문학과로 배정을 받았고 선배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70명이나 되는데다가 일학년 때 6반으로 나누어져서 수업했기 때문에 서로 잘 모르는 상황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가짜 학생이 등장한 것이다. 조○○라는 그 여학생은 항상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서 이 수업 저 수업 들어오고 개강 파티에도 왔고 도서관에서 공부도 했다. 출석부 상에는 없었지만, 미국으로 떠나는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곧 유학을 갈 예정이기 때문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우리 모두 믿었다. 가짜 학생이라는 것이 들통 날 즈음 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가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4학년 2학기 기말 시험을 칠 무렵 계절에 맞지 않게 얇아 보이는 흰 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창백한 모습의 그가 복도에 등장했고 이름을 불러가며 우리를 아는 체를 했다. 우리가 자신이 가짜 학생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걸고 전화번호를 물어 받아가기도 했다.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다면서… 그때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정화(현재 미국에 살고 있음)가 며칠 동안 곤욕을 치렀다. 지난 일이라서 그런지 그 조○○조차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가짜 학생 말고 진짜 영문과 동기들 중 서너 명은 학교를 마치지 않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과 연락이 닿지는 않지만 졸업을 같이 한 동기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보고 싶고 궁금하다. 유학을 떠나지 않더라도 그때 우리 동기들 중에는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를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통역으로 나서기도 했으니 이때부터 이미 국제적이었다.


몇 년 전 발행했던 주소록을 보시라. 졸업생 주소록에서 우리 학번을 살펴보면 한국 안에서 서울 이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것은 나의 개인 경험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사는 대구에서 만난 영문과 동창이 “둘”이다. 그것도 고향에 다니러 온 대구출신 동기 둘이다. 나의 외국생활에서 우리 집으로 놀러온 영문과 동창은 “셋”이다. 영국에서는 브라이튼에 있던 오혜원 선배가 선물로 짜파게티인지 신라면인지를 사 들고(한국라면은 아주 비싼 것이라 당시 내가 살던 에든버러에는 팔지도 않았고 선배는 런던에서 특별히 “선물”하려고 사왔다고 했다) 다른 과 졸업생들 몇 명과 왔었고(그때는 힘든 유학시절 살림이라 별로 잘 대접도 못했다. 침대도 없어 맨 바닥에서 슬리핑백에서 자고 갔다. 언니, 지금 대구로 놀러오면 그때 못한 것 해 드릴 수 있는데요), 또 세인트 앤드류에 있던 김의훈 선배가 놀러 왔었다. 잠시 미국에 있을 때는 동기인 김정화가 남편과 애 둘을 데리고 놀러왔다. 여기에는 나의 처음 외국행에서 동경공항에서 우연히 뵌, 역시 영문학과 선배이신, 김동길 교수님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아! 대구에서 뵌 영문학과 동문을 넷으로 수정해야겠다. 이상섭 교수님께서 대구 경북대학에 특강을 하러 오셨다기에 가서 뵌 적이 있고 조신권 교수님께서 계명대학에 특강을 하러 오셨을 때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다. 두 분 다 은퇴하시기 전이니 벌써 여러 해 된 일이다.


조신권 교수님은 박사논문의 지도교수이시기도 하고 지금도 “거, 내일 학회는 오나? 이제는 좀 활동 하라우.”라고 전화를 하시기도 하고, 나 역시 교수님 사모님께 “황원숙인데요.” 하면서 전화를 하기도 한다. 계명대학에 특강 때문에 오신다고 하셔서 나는 꼭 사모님과 같이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사모님이 참 고우셨고 두 분이 다정하셔서 보기가 좋았다. 나는 시간강사로 강의 중이던 학교에 휴강을 하고, 아내의 지도교수가 오신다니 시간을 낸 남편과 같이 저녁을 먹으며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조신권 교수님에 대한 기억은 현대 영시 읽기 모임에서 시작한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는 최근 영시를 구해서 같이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 그때는 어렵던 시들이 알고 보니 현대 영어권의 중요한 시인들의 작품들이었고 지금 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추천해주는 목록에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루는 시 읽기 모임이 있던 4월 1일에 거짓말처럼 눈이 쏟아졌고 시를 읽는 대신 눈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 청송대를 지나 후문 쪽 어느 술집으로 직행했다.


내가 몇 년 전 교수님을 만나서 역시 술집에 갔는데 요즘도 학생들하고 한 잔 하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담배는 끊었노라고 하시며,


“요즘 학생들이 누가 나하고 술을 마시겠나?” 하셨다.


‘아니 왜?’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말씀하시던 당시 교수님이 60대로 은퇴가 가까우셨지만 내 마음속의 교수님은 그 당시 40대로 남아 계셨던 것이다.


“황 선생도 이제 중년이야.”


그랬다.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교수님만큼이나 나이가 먹은 내가 마냥 대학생인 줄 알고 시간 계산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시절 강의실에서 시를 읽으시는 교수님의 긴 곱슬머리는 『실낙원』의 아담의 묘사를 연상시키고 얼굴빛은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 시켰다(내가 이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상섭 교수님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경북대학에서 특강을 하시는 동안 이상섭 교수님은 내가 청중 중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지만 끝나고 인사를 드리니, “황원숙이군!” 하면서 반겨주셨다. 그날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교수님을 모신 분들에게 은사님이시니 내가 배웅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공항까지 모셔다 드렸다.


“내가 황원숙이 처음 학교 들어올 때 생각난다구. 그때 학생들 참 열심히 공부했고 좋았어.”


그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들 속에 나도 포함되는지는 여쭤보지 못했다. 좀 걱정이 돼서….


“교수님, 제가 학교 다닐 때하고 똑같으셔요.”라고 했더니,


“그럼 그때도 지금만큼 늙었었나보지?” 하셨다. 교수님의 기억력과 외모뿐만 아니라 유머감각 역시 녹슬지 않았다.


이상섭 교수님과는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는데 작년 1월 서울역에서이다. 아드님과 자부께서 친정인 대구에 내려간다고 손자들 손을 잡고 배웅을 나오셨다는데 아주 따뜻한 아버지요 할아버지이셨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좀 말라 보였지만 빛나는 눈과 미소는 여전하셨다.


이상섭 교수님에 대한 기억 중 하나가 절대로 휴강을 하시지 않는 것이리라. 교수님의 철학은 하나의 사건으로 더욱 각인되었는데, 교수님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장례식을 마치시고는 검은 양복을 그대로 입고 수업에 들어오신 일이다. 교수님께 1학년 교양영어 첫 시간에 배운 The Show Must Go on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그것이 보통 소신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더 생각이 난다.


생각나고 고마운 분들이 두 분뿐일까? 내가 보낸 카드에 “30학기 남았소.” 라면서 답장을 주신 이성일 교수님, 음성학을 가르쳐주신 손한 교수님, 김성균 교수님, 임철규 교수님, 김태성 교수님,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소웅 교수님, 이 모든 분들에게 일일이 충분한 감사와 존경을 드려야 하는 것이 평생 다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교수님들뿐만 아니라 선배님들과 동기들에게도 나의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대구에 오면 연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