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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즐거운 추억 여행 (80 백경숙)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즐거운 추억 여행


80 백경숙




얼마 전 모교의 최종철 교수님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한순간 당황했습니다. 회고담이라니요. 워낙 글재주가 없는 터라 난감하기도 했지만 제가 벌써 회고담을 쓸 만한 나이가 되었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훌륭하신 선배님들, 동문 여러분, 그리고 후배님 모두 계신 터에, 임의로 뽑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택받은 일이 감사하고 신기했습니다. 100% 당첨 백화점 경품 행사 이외에는 도무지 뽑힌다는 행운을 누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졸업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연세 캠퍼스에는 적잖이 가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모교가 얼마나 발전하고 변화되었는지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학회에서든 어디서든 영문과의 이원표 교수님을 뵈면 “연대는 잘 있어요?”라고 시집 간 아낙 친정 안부 챙기듯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영문과가 6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는 새삼 감격스러웠습니다. 먼저 이제까지 대(大)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이끌어주신 모교의 은사님들께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돌아보니 영문과에 입학한 해로부터 어느덧 2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양로와 청송대를 오가던 그 4년의 시간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합니다. 모교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이 즈음이면 어김없이 축제의 계절임을 알려오던 아찔한 라일락 향기와 아카라카의 함성으로 시작됩니다. 총장공관 너머로 후문 길 끝까지 하늘 높이 서있던 아름드리 라일락 나무는 아직도 그대로겠지요.


저희 80학번들이 입학했던 때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이른 바 광주사태가 발발했던 해였습니다. 대학공부의 깊이도 대학생활의 낭만도 채 맛보기 전에 5월 18일에 굳게 닫힌 교문은 정확히 그 해 9월 15일에야 열렸습니다. 영어방송 청취반 동아리에서(그때는 써클이라고 했습니다만) 준비해왔던 모의 영어방송제도 물론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카더라’ 통신만 난무하던 그 음습하고 지루했던 80년 여름에 몇몇 영문과 지망생 친구들이 모여서(당시 저희는 계열별로 입학한 문과대 학생이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보겠다고 ‘무엇인가’ 시리즈로 소위 말로만 듣던 ‘스타디’라는 것을 해보기로 의기투합했지만(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비롯하여 카아 교수의 『역사란 무엇인가』,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캠퍼스에는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는 답답함과 불안감으로 괜스레 뜻도 잘 모르면서 현학적 언어의 유희로 목청을 높이며 시간만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실은 잘 읽지도 못하는 Time誌만 보란 듯이 끼고도 갈 곳이 없어 종로통의 영어학원가와 남산도서관만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2학년이 되자 영문과 수업은 수업 시작 전이 언제나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손한 교수님의 ‘언어학 개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왜 소란스러웠느냐고요? 교수님께서는 언제나 발표든 질문이든 앞줄에 앉는 학생들을 집중 공략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뒷자리 쟁탈전을 벌이느라 그랬었지요. 문학은 서울대만 못하고 영어는 외대만 못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래서야 되겠냐고 질책하시며 교재의 매 chapter를 영어로 요약해서 반드시 타자로 쳐서 내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끔찍한(?) 시련이었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는 교수님의 그 과제가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훈련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희곡이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이상섭 교수님의 수업은 어김없이 학생들의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선생님의 깊고도 해박한 지식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으려니와 정말이지 재미나고 맛깔스러운 언어의 구사 때문이었습니다. ‘every’나 ‘all’에 해당되는 경우를 모두 “홀딱”, “홀딱 다”라고 하셨던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졸업 후 몇 년 뒤에 찾아간 교정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뵙고 인사드릴 적에는 또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요. 다른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걸 몹시 싫어하셨던 탓입니다. “응용언어학으로 전공을 택했습니다. 여기는 영어교육과가 없어서요…”라고 제가 말끝을 흐리자 “그랬니? 그래, 잘 하라구.”하시며 예의 그 경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끄덕이시며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신 일이 있습니다. 인사드리고 돌아서면서 꾸지람을 면제받은 듯하여 “휴우-”하고 숨을 내쉰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와 같은 자부심과 열정이 이제껏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수많은 연세 영문인을 배출하게 된 바탕이 아닐는지요.


이성일 교수님께서는 저를 난데없이 천재로 만들어주셨지요. 당시 복학해서 저희들과 함께 공부하셨던 문상영 선배님과 함께 말이지요. 선배님은 지금은 모교의 교수님으로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영어로 강의하면 어떨까?”, “이거 다 외어보자구.” 하시면서 햄릿의 독백이니 쵸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등을 외어오라고 하셨지요. 발표할 때마다 “역시 아무개는 천재야.”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면서도 저희들을 북돋워주셨습니다. 선뜻 발표자가 없을라치면 문 선배님과 제가 단골로 지목되곤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천재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요. 그저 좋아서 외우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으면 교수님의 학문적 열정을 배반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대를 고민하는 몇몇 열혈 학우들이 “지금의 한국적 상황에서 셰익스피어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라는 당돌한 질문을 드렸을 때에도 그 제자들을 아량 있게 포용하시면서 가끔 잠깐씩 쓸쓸한 표정으로 인문관 뒤 쪽 언덕배기를 응시하시던 모습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 모임에서 딱히 내세울 장기가 없어서 햄릿 3막 1장의 독백을 읊은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의외로 놀라며 Yonsei University가 좋은 학교라고는 들었지만 널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고 하기에, 저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제일 형편없는데 이 정도고, 우리는 이런 거 보통 Text를 다 외우고 다녔다고 짐짓 너스레를 떤 적도 있었습니다.


Underwood 교수님께서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운한 마음이 컸지만 그 유명하고도 두꺼운 Norton Anthology는 아직도 제 서가에 꽂혀 있습니다. 이기동 교수님으로부터는 촘스키(N. Chomsky)가 그 유명한 학자인지 어쩐지도 모른 채로 생성문법이론의 기초를 배웠고, 이익환 교수님께는 졸업 후에도 비록 타 대학원에서였으나 의미론 강의를 듣게 된 행운도 있었습니다. 임철규 교수님의 희곡시간에는 영·미 희곡 뿐 아니라 세계의 희곡 강좌를 마련하시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시기도 했었지요. Cherry Orchard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흔히 좁은 세상이라고 말들 하지만 제가 재직하는 학교에서 임 교수님의 조카를 가르치게 된 인연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요. 인연이라고 친다면 저와 같은 학과에는 꼭 10년 선배이신 전문희 교수님도 계십니다. 그분은 따님 또한 영문과를 졸업하여 모녀 동문이 탄생했는데 주위의 부러움을 얼마나 샀는지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인가 80학번 영문과 동문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저마다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이제는 좀 지나왔다는 증거겠지요. 모두 다 모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반갑고 다정한 얼굴들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앉아서 마주보고 있자면 이내 그때 그 얼굴들입니다. 모두 각 분야에서 자기 몫을 알차게 하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모인다 해도 모임에 흔한 그 어떤 과시도 질시도 없는 그런 반가운 모임입니다. 이 모두가 다 같이 연세 동산에서 훌륭한 인문학적 세례를 받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가들이 맨날 신문만 보고 소설을 안 읽어서 저모양이거든” 하시던 이상섭 교수님의 말씀이 또 생각납니다.


저희 동문들 중에는 언제나 모임 주선으로 분주한 박미라 교수와 ‘석향기획’의 정연석 사장이 있습니다. 전공을 사회복지학으로 바꾸어 서울대 교수로 가 있는 김혜란,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안승호, 영락없이 선비인 김용태 교수도 있습니다. 그는 학교 다닐 적에도 ‘한여름 밤의 꿈’을 그리 열심히 하더니 지금은 자기 학생들 데리고 또 그리 열심입니다. 회사 중역에 오른 이성열과 호규봉, 또 호규봉과 캠퍼스 커플이 된 처 조혜연도 있습니다. 몸이 하도 길어서 디스크로 고생했던 송영욱도 오랜 회사 생활을 마감하고 얼마 전 경영학과 교수가 되었답니다. 김혜자와 김명란, 황은수는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선영, 김숙겸과 한혜숙은 아직도 멋쟁이입니다. 졸업식보다 결혼식을 먼저 위풍당당하게 치렀던 최지영은 얼마 전 또한 위풍당당하게 아들내미를 법학과에 입학시켰습니다. 저는 부러워서 침만 꼴깍 꼴깍 삼켰습니다. 영문과 서홍원 교수는 자기가 뭐 영문과 출신도 아니면서(원래는 상대 출신이지요?) 모임에 참 열심히도 나옵니다. 성분으로만 보자면 진골은 아니지만 성의가 가상해서 그냥 봐주고 있습니다. 김치가 먹고 싶으면 배추씨부터 뿌려야 한다는 아프리카 북동부의 한 오지에서 선교활동에 여념이 없는 안건상 목사도 그동안 한 번 다녀갔습니다.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모두들 정다운 친구들입니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신촌에서 돼지갈비 먹고 독수리 다방에 가자고 해야겠습니다. 참 이제 ‘Cafe 독수리’가 되었던가요?


이 글을 한참 동안이나 쓰고 있으려니 큰 딸아이가 와서 엄마는 뭘 하는데 혼자 그리 배시시 웃고 있냐고 합니다. 제가 얼마나 흐뭇하고 즐거운 추억 여행을 떠나 있는지 그 아이가 알 턱이 없지요.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둔 이 아이는 얼마 전부터 엄마 말에 토 다는 일을 안 합니다. 사연인즉, 지는 언감 생신 쳐다보지도 못할 학교를 엄마가 나왔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뿌듯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지만 이게 다 모교의 위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