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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학관의 추억 (80 권석우)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학관의 추억


80 권석우




항상 무슨 이끌림이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서 눈 가득히 들어오는 학관을 으레 겨냥하곤 하늘을 향해 보폭을 내 닿으면 학관을 거슬러 올라가는 층계 옆의 회양목은 아니고 플라타너스인지 포플라 나무인지 이름은 잘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나무가 나를 향해 손짓하곤 했었다. 둥글고 넓은 나뭇잎과 하얗고 회색의 그리고 갈색의 몸통과 가을이면 촘촘한 솔방울 같은 열매를 하늘 가득히 뿌려내는 것으로 보아선 아마 플라타너스인지 싶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잎사귀들과 떨어지는 열매들의 진실을 뒤로하고 언더우드 할아버지의 동상을 무심코 지나가면 그때 바로 눈앞으로 다가서는 허름하지만 고풍스러운 건물이, 뒷쪽의 연희관과 더불어 문리대학을 구성하고 있었던 연세의 상징인 문과대학교 건물인 학관이었다.


계단은 오래 되었지만 반들반들했고 교탁과 칠판과 의자들은 낡았지만 항상 뭔가 풍금 소리 같은 것을 내곤 했고 겨울이면 오래된 라디에이터에선 수증기 나오는 소리가 그런대로 듣기 좋았다. 큰 대형 강의실이 두 개였던가? 허름해서 좋았던 강의실은 순전히 다른 지하의 강의실보다는 조금 컸다는 명목으로 영문학 관련 수업들이 심심찮게 열렸던 장소이곤 했다. 강의실 뒤쪽에 앉아 있을라면 뭔가 잘은 모르지만 선배들의 숨결이 학관이라는 건물에 어려 와 닿아서 좋았고 그래서 수업은 늘 뒷전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뒤에 앉아 있는 학생을 재미 삼아 골탕먹이던 선생님이 계셨었다. 사실 학관 같은 건물에서 강의실 앞줄에 앉아 어떻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을까? 으레 앞줄의 서너 칸은 똑똑하기로 남달랐던 영문과 여학생들의 차지였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강의실 너머 창밖을 바라볼 수 있었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싶었던 치기가 그냥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학관 앞의 잔디밭에 누워서 수업을 게을리 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지하 강의실에서 울려 나오는 배종호 선생님의 인도 철학사 강의를 귀동냥할 수 있었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자태를 쳐다볼 수도 있었다.


2층에서 3층으로 걸쳐 있는 학관의 도서관은 쓸쓸해지면 때때로 찾곤 하던 장소였다. 늦은 오후의 스산한 마음을 달래려고 발자국을 기웃거리면 학관의 도서관은 덩그랗게 놓인 여나믄 개의 의자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실 거기를 굳이 찾아가려고 했던 이유는 중앙도서관의 짓누르는 답답함을 털어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고미 다락방의 창틀로 펼쳐진 오후의 늦은 햇살이 흩어지던 세상은 말을 하지 않아도 하염없이 2시간 정도는 쳐다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무엇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눈 속으로 들어오는 세상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세상이었고 어영부영 세월은 갔다.


1학년의 어수선함과 계엄군에 의한 학교 폐쇄, 2학년의 들뜸과 영문학과 선택, 3∼4학년의 치기 속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졸업을 했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새로 옮아간 지금의 문과대학의 대학원 세미나실은 북향이고 콘크리트 건물 속에 가려져 있어 학부 시절의 낭만을 펼쳐 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은 “스타일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풍조가 표어로 떠다니지만, 학부 시절 이봉국 선생님의 감상에 겨웠던 낭만주의 시 수업과 신대철 선생님의 시 수업은 삶이 한 스타일임을 풍겨주는 학관에서만 가능한 수업들이었다. 그때 몇몇 선생님들은 파이프 담배 향내를 풍기며 다니셨고 강의실에서의 선생님들의 끽연은 그분들의 왠지 모르게 처연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면 지나친 감상일까? 학관과 연희관 사이의 수풀에 누워 막걸리를 먹고 깨어났던 고 성원근(영문 77학번) 선배의 눈매를 닮은 후배를 어디서 새롭게 찾아 볼 수 있을까? 가을 저녁이 오면 두리두리 뭉쳐 앉아 낙엽을 태우며 불을 놓던 정취는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낙엽을 태운 장소는 이제 본관 직원들의 주차장으로 세분되어 있다. 차들이 다 떠나고 난 뒤 늦은 저녁에도 여전히 페인트로 구분한 직급들의 하얀 어수선함만이 남아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층계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머무름이 없는 곳에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관 앞의 층계에 서서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영문과 어느 외국 선생님이 생각난다. 오겔 선생님이었나? 소설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었다. 사실 학관 앞의 낙조는 담쟁이덩굴이 비춰 주는 잔광의 세례를 받아 삶이 아무 것도 아님을 반추하는, 삶이 향일(向日)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학관의 풍경 가운데서도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지금은 현대 백화점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지만 그냥 그대로 마포를 넘어 한강의 햇살이 사윈 강물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교육이 백년대계를 넘어 ‘오백년 사업’이라 생각한다. 오백년을 내다보았다면, 아니 말 그대로 적어도 백년을 내다보았다면 이화여대와의 캠퍼스 병합도, 무악의 정기를 가로막고 있는 현대백화점을 위시한 신촌의 풍물도, 세브란스를 웅장하게 띄워주고 있는 작년에 완공된 신축 병동도 좀더 깊이 있게 다른 대안을 찾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본관인 학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고려대의 터와는 달리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운을 백양로를 넘어 쭉 뻗은 신촌거리로 투사할 수 있었던 장소이었기에, 학관의 추억은 나에게 계속 이름만으로도 황송했던 최현배, 정인보, 홍이섭, 정석해, 최재서 선생님의 함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연세 문과를 찬연히 빛냈던 몇몇 선생님들의 흔적을 이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역시 터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력도 중요한가 보다. 이것을 현대 학문이 본질주의와 구성주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인문학이 남의 말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유의 한 방식 또는 스타일로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존재에 대한 사유를 인문학자들이 폐기처분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미국식 사회학이나 심리학 또는 정치학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인문학의 본령이 철학이나 문학에서 ‘유사인문학,’ 또는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학문들의 근거와는 아무 관련성도… 맺지 못하는 분과과학”으로 기울 때 어느 정도로는 인문학의 위기는 예견되었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중에 한참을 지나고 안 사실이지만, 존재에 대한 사유의 눈길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리고 황혼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던 학관은 그래서 졸업한 지 20여 년이 넘어도 내가 모교를 방문했을 때 유일하게 서성거리고 싶은 장소이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멋있는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교정을 마음으로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