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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원근 형의 추억(79 양석원) (2008.08.04)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원근 형의 추억


79 양석원




지금은 꿈만 같았던 학창시절 우리나라 시를 즐겨 읽지 않았던 나에게도 윤동주 시인의 시만큼은 깊은 감동과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그의 주옥 같은 시들과 사각모를 쓴 그의 슬픈 듯 순수한 모습은 한데 어우러져 내 마음 속에 늘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그의 기일에 그의 시비 앞에 남몰래 꽃다발을 갖다 놓고 서성이다가 돌아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채 책장에 꽂혀 있는 파란색 표지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윤동주의 시만큼이나 내가 좋아했던 글은 시집 뒤에 실린 고 문익환 목사의 「동주형의 추억」이란 글이었다. 내가 이 글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접근할 수 없을 순수의 정점과도 같이 느껴졌던 시인보다 “동주형은 갔다. 못난 나는 지금 그의 추억을 쓴다.”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시인을 회고하는 문 목사의 고백에 더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만드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문 목사가 윤동주 시인을 추억하는 것으로 인생이 더 맑아진다고 한 것처럼 나도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기에 그를 회상하는 것은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원근 형은 윤동주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기억하고 그의 시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수줍고 조용하고 은은한 멋을 풍기는 윤동주 시인과 달리 성원근 시인은 거칠고 투박했으며, 자주 술에 취해 벌게진 그의 모습은 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적어도 처음 그를 알았을 때는 그랬었다.


내가 1979년에 문과계열에 입학해서 이듬해에 영문과에 진학했을 때 원근 형은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대학 1학년생에게 몇 살 위 선배가 하늘처럼 보이게 마련이지만 기껏해야 나이 두세 살 많은 그가 그렇게 전설적이었던 것은 그의 범상치 않은 기행 때문이었을 것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교문 앞을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같이 가자고 외치며 백양로를 달려가던 그의 행적은 전설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25년 전의 대학가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시공간이었다. 군사정권의 무분별한 폭력이 소위 백골단으로 불렸던 청재킷을 입은 사복 깡패들로 구체화되어 마치 먹이를 노리는 검은 갈가마귀떼처럼 캠퍼스의 여기저기를 차지하기도 했던 살벌한 시대였지만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낭만적이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과거를 향한 현재의 동경적인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때는 낭만과 전설이란 단어들이 어울린다고 내게는 느껴지고, 그 시절의 추억 속에 원근 형이 자리 잡고 있다. 기행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내 고등학교 선배가 한 사람 있었다. 법대생이었던 그는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늦은 밤 어울려 술을 마시다 취하면 신호등에 정지한 차 앞에서 그것도 여성이 몰던 승용차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실례를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난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지만 원근이란 놈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고 마치 한 수 높은 자를 일컫듯 말하곤 했었다.


나는 학부 때 원근 형을 가까이 알지는 못했다. 그와 같이 수많은 날들을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했을 그의 문학반 선후배들처럼 나는 그를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회고할 자격이 있는지 머뭇거려지기도 한다. 그는 아마 성석제 시인의 말처럼 싸움꾼이었고 임철규 교수님의 말처럼 문제아였을 것이다. 1996년 그의 추모식에서 그의 동기였던 선배가 그의 큰 주먹에 맞아보지 않은 친구들이 없었을 거란 말을 했지만 나는 사실 그가 주먹질을 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내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세수하던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내게 결혼했느냐고 물어서 나를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고, 어느 날 외솔관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는 너무 공손한 자세와 진지한 표정으로 스님처럼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해서 공연히 미안한 감정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놀랍게도 영문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과정에 있었던 나는 후배들보다 선배인 원근 형과 쉽게 친해졌고, 전설적으로 알았던 그와 뜻밖의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이 서른이 다 된 그때의 원근 형은 이미 청년기의 방황을 끝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여전히 술을 가까이 했고, 한 번은 잔뜩 취한 상태로 도서관 4층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나를 큰 소리로 불러내서 문학반의 술자리에 동석하게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원근 형은 내가 과거에 알던 전설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음악과 문학과 인생을 논하는 그의 생각의 깊이와 진지함에 매료되었지만 그때 그는 과거에 어렴풋이 알던 그의 모습과 달리 내게 너무도 인간적이고 소박한 인물로 다가왔다.


내 나름대로 그의 사상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흔히 부정적 함의를 동반하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단지 내 어휘의 빈곤 때문에 내가 그의 삶을 축약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동원한 낱말일 뿐이다. 그와 뜻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나는 그의 휴머니즘과 자유주의가 자기 삶을 진지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추구하던 한 청년의 고통과 투쟁의 값진 열매였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 있을 때마다 나는 그와 야구공을 주고받았고, 음악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클래식 음악을 어깨 너머로 조금 듣던 나에게 그는 음악이 주는 강렬한 체험 같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는 내게 다빗 오이스트라흐가 연주하는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푸르트 뱅글러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권했었다. 그는 음악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해석하곤 했다. 예컨대 그는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5번이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배를 띄워 거친 파도를 노를 저어 나아가는 매우 힘든 과정과 같다고 하였고, 같은 곡을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하면 노를 젓다 바다에 빠지는 꼴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런 말들이 멋을 부린 과장된 수사법이 아니라 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해석은 문학과 인생에 대한 그의 시각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주인공 에이헙을 유아론적 인물이라고 비판했을 때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부처의 말씀의 뜻을 상기시켜 유아론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특히 비극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는데, 비극에 대해 여기저기 주워들은 이론들을 나열하는 나에게 그는 비극은 인간의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계에 관한 것이지만,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세상에 선언하는 위엄 있는 행위라고 아주 쉽게 설명했다. 그때 나는 남의 해설에 의존하는 나의 해석보다 삶에 대한 문학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설명이 비극의 본질에 훨씬 가깝다고 느꼈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예이츠의 후기 시에서 이런 비극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가 『멕베스』를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은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근 형과 가깝게 지냈던 짧은 시간동안 나는 생활인으로서의 그에게서 예상과 달리 매우 세심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가 자취하던 방에 놀러 가면 이러 저런 물건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널려 있던 방 한 구석에 당시에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플라스크 병이 있었고 그것으로 원두커피를 끓여주곤 했었다. 백마에서 혼자 자취할 때에도 몇몇 후배들과 돌구이를 해서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적절한 고기의 양을 0.7근이라고 계산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더욱 놀랍게도 얼마 후 그는 신촌역 옆 이대입구를 향한 곳에 작은 액세서리 가게를 형수와 같이 차렸었다. 장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새벽 일찍 청계천에 물건을 사러 다녔고, 액세서리 가게를 꽤 오래 했으며, 홍대 앞에도 분점식으로 가게 하나를 더 차렸었다는 점 등은 그가 비즈니스에도 아주 어둡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내가 가끔 가게를 들렸을 때 액세서리를 사러 온 이대 여학생들은 형과 형수가 부부인지 아니면 오누인지를 소곤대곤 했었다. 울산에서 있었던 그의 결혼식에서 그가 평소와 너무도 다른 양복차림의 말쑥한 모습으로 사진 촬영을 하던 때, 형수와 같이 우리 집에 놀러와 모과주를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다가 결국 술에 취해 떠나갔던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그는 자신의 습작 시에 대해 말할 때면 어김없이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 나도 그동안 쓴 시가 있고, 그걸 발표할까 생각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마치 흰 속살이 드러날까 옷깃을 여미는 시골 여인네처럼 부끄러워했다. 평소에 그렇게 대담하게 보이던 그가 그런 여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모른다. 그때 나는 그의 수줍은 내면의 모습이 활자화되어 나타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는 인쇄된 그의 시집 속에서만 그를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처 예감하지 못했었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 뒤 몇 년 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몹쓸 병을 앓게 되었고, 강원도(?)의 어느 선사를 찾아가 만난 후 병의 극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후 다시 몸져눕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용기를 내어 형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화로운 목소리로 그의 아픔에 대해 섣불리 말도 못하고 걱정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감기만 앓아도 엄살을 피우며 투덜대는 나로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어떻게 그렇게 의연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적의 치료제라고 선전하던 건강식품을 구해 보내주는,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형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 탓인지 형수의 전화인 것을 알자마자 형의 죽음을 직감했던 내 마음속에서는 슬픔보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런 내게 또 형수가 위로하듯이 말하지 않았던가! 형수의 위로의 말 중에 참으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천주교로 개종했던 형이 수녀님들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큰 고통 없이 아주 평화롭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말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그의 기일에 맞춰 열린 그의 유고시집 출판기념회에서 나는 그가 남긴 한 권의 시집을 받았다. 그 시집에는 37년의 길지 않은 그의 삶이 때로는 직설적인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로 때로는 냉소적인 자기경멸의 언어로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이 느낀 인간과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가 어떤 시어로도 표현될 수 없음을 “나의 온 낱말들을 바다로 밀어버리겠습니다.”라는 고백의 형태로 토로하기도 하고, “고통의 인과율의 등식”을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언어”를 비웃기도 한다. 워낙이 “‘티를 내는’ 말투로 ‘티나게’” 얘기하는 걸 혐오했던 그였기에 그는 온갖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밉기도 가엾기도 한 모습이 시라는 형식적 언어의 포장 속에 박제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나는 자주 그가 비극의 주인공처럼 왜 세상은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것이냐고, 또 그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고통스럽게 절규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분노와 경멸과 고함의 표면 아래에서 그가 세상과 자신을 향해 던지는 동정의 눈빛과 화해의 몸짓, 그리고 평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욕설을 하고 침을 뱉는 싸움꾼의 모습 뒤에는 회색 빛 세상에서 “푸르른 싹 내고 낙엽 지는 가로수 플라타너스가 되고 싶어”하고, “깊은 수심에서 … 안경너머로 … 사과 빛” 세상을 보며, “밤새 하얗게 변할 세상”을 보기 위해 “눈을 기다리는” 형의 모습이 보인다. 때로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으로 삶이 힘들어 질 때 나는 형과 같이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싶은 소망을 갖곤 한다. 그럴 때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두 잔 그와 함께 기울이면서 아니면 우리가 같이 좋아했던 원두커피의 향을 맡으면서 사는 게 왜 이래야 되는 건지를 말해보고 싶다. 그의 옆자리에 있을 때면 나는 일탈을 개의치 않는 그의 자유로운 삶에 비해 나의 교과서적인 생활은 너무 소심하고 초라하다고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오늘 그의 시집을 펼쳐드는 나는 “흰 갈기 백마 야생마 되어 넓푸른 풀밭을” 달리고 싶어 했던 그의 자유에 대한 염원이 일탈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소망했던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을 향한 질주였음을, 그리고 비록 다음 날 더럽혀지고 얼룩진다 하더라도 하얗게 눈 덮인 세상을 보고 싶어 했던 그의 소망이 나와 우리 모두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가 좋아했던 카잘스의 첼로 연주를 들어본다. 파도를 헤치며 노를 젓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원근 형은 갔다. 그가 “저 물 따라 내내 흘러가 버릴 것을” 몰랐던 나는 오늘 그의 추억을 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소망했던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을 내 마음 속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원근 형의 웃는 모습은 참 선해 보였었다. 지난 봄에 만났던 현오의 웃는 모습은 아버지의 선하게 웃는 모습을 꼭 닮았었다. 흰 눈속 같은 세상을 선한 웃음을 머금고 기다리는 원근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