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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뜻밖에 선택한 (75 한순옥) (2008.06.2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뜻밖에 선택한 영문과


75 한순옥




연세대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 일학년 봄이었다고 기억한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낭만적인 고등학교 시절을 꿈꾸었던 나는 딸을 경기여고에 보내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의 끈질긴 설득을 고집으로 꺾고 이화여고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일에 재능을 인정 받아왔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문예반에 가입했는데, 오월 연세 창립 기념일 행사의 하나로 열린 전국고교문예 백일장에 참석하게 된 것이 연세 캠퍼스를 처음 밟아 보게 된 계기였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대개 실재보다 커 보이고 약간씩 과장되어 있게 마련이다.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고 기억되는 쭉 뻗은 백양로를 따라 오르내리는 대학생들의 활기찬 모습과 꽃과 신록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오월의 캠퍼스는 보는 첫 순간부터 내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백일장은 청송대 숲에서 열렸는데 그때 ‘소나무 껍질’이라는 극히 생소한 제목이 주어져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어떤 내용의 글을 써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백일장에서 입상했고, 그것이 아마도 연세에 대한 내 체험을 더욱 긍정적인 것으로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날 이후로 연세는 미래의 내 모교로서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잡게 되었다.


일찌감치 대학을 정해 놓은데 비해 영문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뜻밖의 결정이었다. 일찍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시절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비교적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과 격려를 받은 덕에 집안에서나 학교에서 난 언제나 ‘글 잘 쓰는 아이’로 통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넌 이담에 소설가 되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자랐다. 따라서 국문과에 진학해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진로의 설정은 별다른 고민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오래 간직해 온 바람은 대학 입시 원서를 쓰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바뀌게 되었다. 입시 상담을 하는 중에 연세대 국문과에 가겠다는 내게 담임선생님께서 국문과 가기는 성적이 너무 아깝다며 영문과를 추천하신 것이다. “선생님, 전 국문학을 전공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하자 독문학을 전공하시고 남편과 함께 독일 유학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순옥아,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도 우리 문학을 하고 글도 쓸 수 있는 거야.” 하시며 나를 설득하셨다. 결국,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 들여 생각지도 않던 영문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가끔 그때 계획했던 대로 국문과에 갔으면 지금 내 삶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것도 좋은 선택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선생님의 진학 지도에 따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해도 극복되지 않는 외국어 공부가 고달파,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 하고 때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21세기 들어 세계화의 물결이 더욱 거세지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해독이 곧 능력이요 경쟁력인 시대에 내 전공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고해진다.


75학번으로 입학해 보니 정원 35명 중, 여학생과 남학생이 약속이나 한 듯 꼭 같은 수로 절반씩 차지하고 있었고 정원 외로 재일 교포 여학생이 두 명 섞여 있었다. 여학생 중에는 경기여고와 이화여고 출신이 각각 여섯 명으로 소위 ‘majority’를 이루었고, 나머지를 지방 출신과 그 외의 학교에서 채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과 남학생들도 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여학생이 강세인 영문과의 분위기로 인해 남학생들을 우리의 동등한 ‘counterpart’로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또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같은 여학생 그룹 내의 역학 관계에서도 다수파(majority)에 속한 사람으로서 소수파(minority)에 속한 동문들에게 상대적인 피해 의식을 느끼게 한 일도 분명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들 각각이 지니는 한 지역의 대표성의 의미라든가 그들로 인해 접하게 된 다른 문화적 배경들로 인해 보다 바람직한 교육의 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소중한 존재였음을 이제 와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일학년 때는 교양 영어 외에는 다른 전공과목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교양 영어와 관련하여 신입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학기에 두 번씩 치르던 ‘듣기 시험(Aural Test)’이 기억에 남는다. Vocabulary, Dictation, Translation, Composition의 네 가지 평가항목으로 구성된 시험으로, 당시만 해도 수능이나 다른 Test English에서 듣기 시험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터라 이 새로운 형태의 시험은 늘 우리의 화제에 오르내렸고, 또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열심히 교과서를 외우던 기억이 난다. 시험의 format이 현 영어교수법 이론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고 학생들의 영어공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도구였다고 생각하는데,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볼 때 학교의 규모가 커진 상황에서 시험의 실시와 평가에 엄청난 행정력이 동원되는 번잡함을 감수하고라도 연세의 학습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유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2학년이 되어서 본격적인 전공과목을 공부하게 되자 여러 교수님들의 개성 있는 강의로 인해 때론 즐겁고 때론 공포에 떨고, 만족하고 좌절하던 시간들이었다. 2학년 때 교양 영어를 배웠던 나건석 교수님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에 대한 벌로 교실 앞에다 거꾸로 세워 놓겠다고 협박하곤 하셔서 그 수업이 들은 날엔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고 오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인문관 꼭대기층 다락방에서 영시개론을 강의하시며 영시 고유의 독특한 장치들을 가르쳐 주시고, 영시 읽기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하신 조신권 교수님의 밀도 있는 강의도 잊을 수 없다. Shakespeare를 강의하신 오화섭 교수님은 본인의 풍부한 연극적 경험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강의를 진행해 주셨다. 특히 미국식 억양에만 익숙해 있던 내 귀에 교수님의 영국식 억양은 매우 생경하게 들렸는데, 그 ‘이상한’ 영어가 정통 셰익스피어식 발음이라고 일러주던 친구 얘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기억도 난다. 4학년 일학기 강의 도중 등산을 열심히 해 허리띠의 구멍을 두 개나 줄였다며 좋아하셨는데, 얼마 후에 위궤양으로 수술받기로 하셨다면서 당분간 휴강하게 됨을 공고하시곤 결국 다시 강단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말았다.


지금은 대학마다 경쟁적으로 영어 강의를 늘려 가는 추세지만 당시만 해도 내국인 교수의 영어 강의는 전무했고 영어 강의는 외국인 교수님 과목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학부 시절 수강했던 유일한 영어 강의가 76년 봄 학기 원한광 교수님의 영문학사였다. 기록을 찾아보니 교수님이 76년부터 연세대 영문과에서 강의하신 것으로 되어 있어 그 강의가 연세에서의 첫 강의였던 것 같다. 영어는 알파벳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자라고 배웠고 그런 식으로 영어에 접근했던 내게 그 과목은 하나의 충격이자 도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다 구레나룻을 기르신 모습하며, 다분히 권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강의를 진행하시던 다른 교수님들과는 전혀 달리, 강단에서 거의 일인극이라도 하는 배우처럼 크고 과장된 몸동작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까지, 언어 충격에 더하여 교수님의 강의 스타일은 어느 하나 내겐 문화 충격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수강 학생이 꽤 많아서 청중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행운마저도 중간고사가 다가오면서 끝이 나고 있었다. 대책 없이 불안에 떨고 걱정만 하는 사이 훌쩍 학기의 절반이 지나고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니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시간마다 녹음기로 강의를 녹음하고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해 놓은 이은성 동문의 감동적인(?) 노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시험을 치르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복사기라는 것도 없어서 그 방대한 대학 노트 한 권 분량의 노트를 베끼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동이었다. 하지만 피와 땀으로 이룬 남의 노력에 무임승차 하는 입장에서는 마땅히 치루어야 할 대가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 죄의식을 어느 정도 덜어 주는 속죄의 과정이기도 했다. 아무튼 원한광 교수님의 영문학사는 내게 학부 과정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과목이었다. 작년, 신문에서 교수님 가족이 4대에 걸친 연세와의 인연을 끝내고 영구 귀국하신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교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기회를 나의 미련함과 미숙함 때문에 충분히 누리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 밖에도 교수님들의 독특한 개성과 넘볼 수 없는 높은 학문적 성취로 우리의 존경과 사랑, 경탄을 자아내던 많은 강의들이 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이 정도에서…


당시의 학부 과정을 돌이켜 보면 지금에 비해 한 강좌당 한 학기에 소화하는 공부 분량이 절대적으로 적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는 유신 말기 군사 독재정권 시절로 대학 캠퍼스는 걸핏하면 정치의 광풍에 휘말려 데모로, 계엄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거나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학사 중단 없이 학기를 온전히 채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정의감에 불타던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분위기에서 공부하면 무엇하냐는 자조적인 태도와 깊은 절망이 돌림병처럼 만연해있어 학문에 대한 평균적 열정이 요즘 대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저조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시대의 아픔 없이 보다 자유롭고 치열한 분위기에서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지금의 학생들이 부럽기만 하다.


기억에 남는 과의 과외 활동으로는 2학년 봄, 영어 연극 Thorntorn Wilder의 Our Town을 공연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같은 과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cast로 또는 staff로 참여해서 직접 무대에 올린 연극이라 관심이 많았고, 또 연극에 참여한 친구들이 전공어 측면에서 단시간에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직접 참여하지 않은 나에게도 신선한 언어적 자극이 되었다.


나는 어려서도 시보다는 산문을 즐겨 읽고 써왔으므로 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는데, 이화여고 동창으로 늘 같이 어울려 다니던 정경혜 동문과 최용희 동문이 조신권 교수님을 주축으로 한 영시 읽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내게도 적극 권유하여 한동안 참여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아직 문학으로서의 영어 읽기에 채 눈뜨지 못한 상태여서 새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 단어장에 정리해 두고, 그것을 참고로 두 언어의 1:1 치환에 불과한 수준의 번역을 하자니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시간이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느껴졌었다. 어느 날인가 조신권 교수님이 내게 밀턴의 시 한 부분을 번역해 보라고 하셨는데 엉뚱한 번역을 하니까 듣고 계시던 교수님이 크게 웃으셔서 너무나 민망했던 기억도 새롭다. 지금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끔씩 질문을 하다가 요지에서 한참 벗어난 학생들의 답변을 듣고 있노라면 바로 30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야단칠 수 없을 때가 많다.


결국 난 영시 읽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또 남자 친구와의 연애로 바빠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나를 모임으로 인도한 위의 두 동문 외에, 최근까지 colleague로서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이은성 동문과, 정인숙 동문은 그 모임의 가장 충실한 회원이었다. 선배로서는 당시 대학원생이던 최종철 선배가 좌장 격이었고, 74학번의 정명희 선배와 그 모임을 통해서 가까워졌고, 후배로는 76학번의 오진숙이 중심 멤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최종철 선배의 손에는 언제나 많이 읽어서 닳고 귀가 접힌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문고판 소설이 들려 있어서 ‘뾰죽구두 신고 책 껴안고’ 학교 나들이 하는 우리 ‘giggling girls’(늘 히히덕거리면서 몰려다니던 우리를 가리켜 이상섭 교수님이 즐겨 사용하시던 표현이다)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우리를 주눅들이곤 했었다.


학부를 얼렁설렁 다닌 후유증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한 이후 비로소 나타났다. 특히 학부에서 배워 본 적이 없는 이상섭 교수님, 임철규 교수님 들의 강의는 일단 읽어야 할 책의 분량부터 우리를 압도했고 좌절케 했다. 당시에 철이 덜 나고 능력이 모자라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려는 교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숨 못 쉬게 몰아치는 빡빡한 강의 일정과 과제에 반발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실망시켜 드린 것을 이 자리를 빌어 사죄드린다. 그때 “가르치는 것은 짝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임철규 교수님 말씀을 삼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어느 덧 반백의 나이에 이르렀다. 졸업 25주년 행사를 치르며 세월이 변화시킨 서로의 모습에 실소한 지도 벌써 재작년 일로 까마득하다. 김혜옥 동문은 한 이태 전 대장암으로 투병하다가 끝내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영정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혜옥이 모습이 너무 예뻐서, 가발로 손질한 낯선 머리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서, 세상에 왔던 흔적으로 남겨 놓은 딸, 아들이 너무 고와서 눈물이 났었다. 왜 혜옥이 뿐이겠는가. 우리도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떠날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미 한참 전에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고, 남은 시간이 지나 온 시간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이다. 그 지난 시간 중의 가장 크고 긴 토막을 연세의 토양 위에서, 영문과의 장 위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내가 선택했고, 나를 키워 주고, 아름다운 만남을 주고, 소중한 추억을 제공한 연세와 영문과 동문, 선후배들에게 새삼 감사하고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이름을 한참이라도 댈 수 있는 기라성같이 반짝이는 선배 혹은 후배들로부터, 평범하지만 사회의 건강한 한 구성원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분들까지 모두가 예외 없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내 모습 역시 부끄럽지 않다. 무엇으로 남은 시간을 채울 것인가, 나를 세우는 것에 더하여 어떻게 남을 더 세워 줄 것인가 하는 깊은 성찰과 실천으로 서로에게 더 큰 자랑이요 사회에 축복의 통로가 되는 연세 영문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