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아, 72학번

72 박충연

72학번! 아마 우리 학번같이 학교 다닐 때 공부하지 않은, 아니, 공부하지 못한 학번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미래를 계획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극소수의 모범생들 말고는 고3에서 풀려났다는 벅찬 해방감에 온통 낭만적인 대학 생활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창경원 수정궁에서 있었던 신입생환영회에서의 교수님들과의 상견례로부터, 지금의 한방 친구를 만나게 된 영문과 연고전, 고등학교 때 배웠던 배구 실력을 한껏 뽐냈던 문과대 체육대회, 정준하 씨(우리는 이성 동창에게 “씨”를 붙였었다, 몇몇 이름을 부른 경우도 있었지만)를 비롯하여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남자 동창들과 밤새 춤추고 놀았던 덕소 수양관에서의 수양회,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도 무리하고 길을 떠나 종일 비를 쫄딱 맞으며 돌아다녔던 일영 야유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녀 학생들이 같이 어울려 수영복 입고 뛰어다녔던 한여름 수영장에서의 야유회 등 1학년 1학기에는 공부한 기억이라곤 시험 때 당일치기 한 것 말고는 거의 없다. 덕분에 학점은 겨우 낙제를 면한 정도였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10월 유신”이 선포되더니 공부는 더더욱 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신체제라는 암울한 시대가 뿜어내던 희뿌연 최루탄 가스와 데모, 데모, 데모! 최루탄 가스를 씻어 내려고 따가운 눈을 비벼가며 물로 씻고 또 씻어 보았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없어지지 않았던지…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얼마 가지 않아서 데모가 일어나고 휴강 조치나 휴교 조치가 내려지곤 했는데 어떤 학기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다 보지 못하여 레포트로 대치한 경우도 있었다. 난 그때 교수님들께서 어떻게 레포트로 모든 학생들을 평가하실까 무척 궁금했었다. 유신 반대 데모는 75년 봄 ‘집회 및 시위 금지법’인 긴급조치 9호가 떨어져 당시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우리 과 지준 씨(지금의 방 친구)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계속되었었다. 그러니 무슨 공부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다 하지 못한 탓인지 우리 학번은 50이 넘은 이 나이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친구가 유난히 많다.

그런 중에도 기억에 남는 수업이 간간이 있다. 고병려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라틴어 문법은 지금도 영어의 어원을 찾을 때 라틴어 사전을 참고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오화섭 교수님께서는 셰익스피어의 기지가 흐뭇하셨던지 미소 띤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시며 작품을 음미하시곤 하셨다. 이상섭 교수님께서는 가장 젊으시고 엄하신 교수님이셨다. 밖에서 데모를 해도 학생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강의를 하셨다. 교수님의 그 엄격하신 강의 철학을 나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직 단 한 사람을 놓고 강의해 보지는 못했으니 역시 선생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시다. 조신권 교수님께서는 아주 젊으신 교수님으로 주옥 같은 시들을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히 설명해 가시며 친절한 강의를 해 주셨다. 전형국 교수님께서는 첫 시간에 영국지도를 그려오는 것이 숙제였고, 이봉국 교수님께서는 특히 여학생들에게 너그러우셔서 여학생들이 가서 수업이 어려운 상황임을 말씀드리면 크게 어렵지 않게 휴강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군철 교수님께서는 근엄하신 학과장님으로 특히 장학금이 골고루 나누질 수 있도록 챙겨 주시곤 하셨다. 김태성 교수님의 그 유명한 고등영문법은 수강생이 유난히 많아 큰 계단강의실을 꽉 채웠었다. 유지식 교수님께서는 교양영어를 가르치시며 1학년 지도교수님으로 우리를 가장 가까이서 보살펴 주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지시어 병석에 계신 것을 아시게 된 교수님께서는 손수 나를 데리고 명동에 나가 당신의 조카 분을 가르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는데, 당시 서울여상 3학년이었던 그 조카 분이 연대 가정대에 입학함으로써 나는 2학년 여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르바이트로 집안을 꾸려가며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유지식 교수님의 은혜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여름에는 LA 근교 세리토스에 사시는 유지식 교수님, 사모님을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가시어 한국 정부의 대미 외교 창구에서 많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활동하시고 계시다. 여전히 놀라운 기지를 잃지 않으시고 정열적 삶을 누리시는 교수님의 곁에는 온화하시고 믿음 좋으신 사모님의 기도가 늘 계셨다. 사모님께서는 이민 가신 후 보스톤대에서 신학을 공부하시고 목회를 인도하셨다. 74년 언젠가 지금의 한성대학교 위, 산기슭에 있는 교수님 댁에 따님을 가르치러 갔던 내게 사모님께서는 바느질을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이 삼십이 넘어서도 믿음 없이 방황하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요.” 이 단호한 말씀을 듣고 당시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는데 지금까지 되뇌이며 그 뜻을 새기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불쌍한” 나로 느껴질 때가 많으니 온전히 진리 안에 거하면 방황이 끝나는 걸까?

세월은 흘러 이제는 더 이상 뵐 수 없는 선생님들도 여러분 계시다. 더 늦기 전에 선생님들께서 베풀어 주신 지고하신 사랑을 나도 이젠 내 후배들에게 또 내 제자들에게 전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