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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지금도 설레는 그 시절 이야기 (72 김중섭) (2008.06.2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지금도 설레는 그 시절 이야기


72 김중섭




1972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대학에 대한 기대가 참으로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때 꿈꾸던 문학도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의 고고한 기상을 체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대학의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이상을 찾아가는 패기와 열정도 느끼기 어려웠다고 생각되었다. 영문과 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칼럼에 대학은 더 이상 상아탑이 아니라고 썼던 기억이 남아 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즐거웠던 추억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입학하자마자 열린 농구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정기 연고전을 비롯하여 수시로 열리는 연고전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응원하면서 젊음을 발산하였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연세문학회, 국어운동학생회 같은 동아리(당시에는 써클이라고 하였음)에서 열심히 활동했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암울하게 느껴지기만 하였는지…


아마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입학하던 해 10월 우리는 강제적으로 휴교를 당하고,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게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대학 문을 강제로 닫았다. 대학생들이 제일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때는 그랬다.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제일 큰 세력이 대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독재 통치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곧바로 대학 문을 닫았다. 대학생들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랬을까. 아니면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라서 그랬을까. 하여튼 박정희 정부는 너무 자주 대학 문을 닫았다. 1976년에 졸업한 우리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방학’이나 ‘가을방학’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자조적으로 ‘연희전문’ 출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오랜 역사에 대한 긍지도 깔려 있지만, 대학 4년을 제대로 못 다니고, 2년 정도 다닌 것 같다는 자조적 의미도 담겨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이들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참으로 암울하게 느꼈었다. 민주주의 사회가 올 거라는 희망도 온전히 갖기 힘들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시위를 주도하던 용기 있는 친구들은 학교에서 쫓겨나서 군대에 가곤 하였다. 용기 없는 우리들은 비굴하게 숨죽이며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학과 사회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며 개혁을 외치는 영문과 친구를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켜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분위기는 정부에 비판적인 교수님들의 강의에 가득 찬 대학생들로부터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강의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과 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에 마음속으로나마 분개하고,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에 대하여 생각을 키워갔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또 문과대학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다른 학과 강의를 청강하며, 다른 과 친구들과도 열심히 어울렸다. 몰래 듣는다고 ‘도강’이라고 부르던 학점 없는 청강에서 얻는 희열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되돌아보면, 그렇게 배운 교수님들의 강의가 우리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된다. 사회가 아무리 암울하였어도 젊은 우리들은 쉽게 기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 가졌던 용기와 비전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때의 패기와 정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설렌다.


또, 그렇게 우리를 어렵게 한 것은 시대 상황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젊음’이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우리들은 젊은이답게 고민이 많았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를 고민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고민하는 우리들은 그 많은 날을 술집에서 떠들고, 다방에서 명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신촌 시장 막걸리 집은 젊은이들로 넘쳤고, 신촌 로터리까지 가는 길가의 다방에서는 생각에 잠긴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우리들이 떠들고 토론하던 것들이 우리를 이렇게 살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게 느껴졌는지. 아마도 그렇게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 있기에 오늘날 단단한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았겠나.


그래도 우리는 고민만 하고, 토론만 하고, 좌절만 했던 것은 아니다. 방학이면 떼 지어 농촌 봉사를 떠나는 학생들도 많았고, 정해 놓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런 경험들이 미래의 우리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방학 때 후배들과 함께 고향의 공민학교에서 봉사한 적이 있는 경험을 살려 개학이 된 뒤에 벌인 야학 활동이 생생하다. 영문과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선배의 권유로 광주대단지의 야학에 참여했었다.


우리의 야학은 서울의 저소득층(당시에는 빈민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을 경기도 광주에 강제로 이주시켜 조성한 집단 거주지에 있었다. 오늘날에는 성남시로 발전하여 옛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당시 광주대단지는 교통도 불편하고, 주거 환경도 아주 열악했다. 그곳에 공장 지대가 조성되자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대개 그들은 취업을 위해 학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들을 위해 세워진 비정규 학교가 우리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밤에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라고 하여 야학이라고 하였다. 교육 기회가 크게 부족하였던 일제시기에 시작된 야학의 전통을 잇는 우리의 야학은 물론 인가받지 않은 교육기관이었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초라한 야학 교사에는 일을 마친 뒤에 모여든 학생들의 향학열이 가득하였다. 교사로서 자원 봉사하는 우리들은 맡은 과목을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학생 모집하러 공장 밀집 지역에서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하고, 학교 운영을 위하여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길거리에서 팔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그런 야학 활동을 벌이면서 실제로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었다. 사람의 존재와 삶을 거듭 생각하게 되고, 사회를 다시 보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회를 탐구하고, 또 새롭게 바꾸고 싶은 생각이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이 많고 고민이 깊은 친구들이 야학에 모여들었다. 전공이나 학교는 달랐어도, 우리들은 사회 정의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주고받았다. 밤늦게 성남에서 서울까지 오는 좌석버스는 우리들의 열띤 토론장이 되었다. 아예 그곳에 들어가 야학생들을 데리고 사는 친구 자취방으로 옮겨 토론을 계속한 적도 많았다. 토론하다가 새벽이 되어 창밖이 허옇게 밝아오는 것도 수없이 경험하였다. 우리 학생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절감하기도 하였다. 가난과 무지가 가득 찬 시절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던 시절이다. 그 정열과 패기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의 대학 생활은 단순하지 않았다. 많은 고민과 암울한 추억들, 그러면서도 순수한 열정과 패기를 잃지 않았던 젊음이 뒤얽혀있던 시절이다. 그렇게 보낸 대학 생활은 졸업한 지 30년이 흘렀어도 그립기만 하다. 30년이 지났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그 순수함에, 그 열정에 마음이 설렌다. 그때는 왜 그렇게 고민도 많았고, 생각도 복잡하였는지 몰라도 지금 되돌아보면 모두 귀중한 경험들이다.


역시 시간이 보배인 모양이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들이 내 머리에 가득 찬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런 시절이다. 꿈과 희망, 정열과 패기, 그리고 비전을 갖게 해준 시절이다. 그 시절에 가졌던 순수함이 그리워진다. 그 시절의 추억은 다시 생각해도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언제나 설레는 그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공부한 나의 대학 시절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