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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이야기 셋 (67 한기룡) (2008.06.08)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이야기 셋


67 한기룡




프롤로그:


인생의 황금기(golden period)인 대학생활 그것도 미션스쿨인 연세대 영문학과에서 공부하였고 On-campus 활동으로 연극도 하였고, Off-campus 활동으로는 미국문화센터에 있는 영어 토론클럽에서 남, 여 대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Episode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학교생활 중심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살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이따금 한 적이 있었지만 글로 써서 남긴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옷을 벗는 듯합니다. 그러나 영문학과 60년사는 어차피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마당이며 그리고 자주 있는 공간이 아니므로 소개하는 것이 뜻 깊은 일인 것 같아 묻어 두는 것보다는 꺼내 보이는 것이 나의 동기뿐만 아니라 선배님과 후배들 간의 Time Frame를 이어주는 Bridge 역할을 하는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때 그런 일도 있었구나). 특히 67학번을 기준으로 3년 선배인 64학번부터 3년 후배인 70학번까지는 동시대 사람(Contemporary People)으로 추억공유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참고로 글 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넌픽션이므로 가급적 실명을 사용했고, 부득이한 경우 당사자들의 privacy를 고려하여 가명을 사용하였음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이야기 하나 ­


A. 영어연극


2학년 때 영어연극 연습을 하였는데 당시 4학년이었던 한상철 선배가 연출을 맡았는데 연습할 장소가 없어 음대 강당에서 하였고 식사는 중국집에서 시켜 강당 무대 위에서 놓고 서서 먹을 정도로 시간을 아껴 연습을 3개월간 하였습니다. 주연 남자는 바로 아래 학년이었던 쾌남 안영대 후배가, 여자 주인공은 그 당시 가장 Active하고 우아했던 우남희 동문이 맡았습니다.


나는 조연출 겸 단역을 맡았고 연습이 거의 마무리되기 2주 전에 장소 섭외를 하였는데 한 선배가 의대 강당이 좋으니까 신청하라고 지시가 있어 같은 학교니까 당연히 장소 사용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의대병원 사무처에 언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신청하였고 담당직원들도 될 것이라고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연락이 오기를 장소사용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연출 선배서부터 출연진과 스탭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난감하였고 모두들 의대사무처에 항의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결재 마지막 단계인 의무부총장께서 절대 빌려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출 선배가 직접 부총장님을 만나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이 강당이 의대 시설이므로 학부학생 행사에는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는 것이었고 그 선배와 우리들 모두는 모멸찬 답변에 흥분하였고 씩씩거렸고 누군가의 입에서 “말도 되지 않는다. 같은 학교인데 장소사용이 안 된다니 기가 막혀” 하면서 원색적인 구호가 나왔는데 차마 여기서 대놓고 얘기하기에는 다소 민망스럽지만 지난 일이었고 혈기 방창한 젊은 시절이라 잠시 옮겨 보면, “그 부총장님의 거시기를 잘라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데 너무 했었다는 생각이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나간 추억이 되었습니다. 공연날짜는 다가오고 꼭 믿었던 의대강당은 안 된다고 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어찌할 수 없어 영문과 선생님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하루 이틀 후에 학교 후문 뒤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장소를 빌려 준다기에 모두들 기뻐하였고 한걸음에 달려 가서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초중고교 학교의 연극 전용시설인데도 무대는 물론 객석의자도 극장식이었고 지하 1층에 거울이 달린 분장실, 탈의실 등 제반시설이 다 갖춰져 있었습니다. 공연 전에 분장전문가이신 전예출 선배께서 분장해주시면서 어디서 이런 좋은 시설을 빌렸느냐고 공연이 잘 되겠구나 하는 말씀으로 격려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우에 알맞은 말이 있지요 전화위복이랄까, 새옹지마랄까, 하여튼 처음보다 나중이 잘 되어서 좋았습니다.


Tipping Episode: 영어연극 연습시에 발음교정을 위해 아름다운 용모의 미국 여대생 쥬디가 매번 한 선배와 연습장에 나와 발음지도를 하였는데 매일 배웅하다 필이 통했는지 나중에 두 사람이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한국판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도 있었습니다.




B.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기독교개론을 가르치셨던 신과대학의 민경배 교수님(현재 서울 장신대 총장)은 당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유연한 사고방식에 옷차림도 멋진 콤비스타일로 팔꿈치에 가죽을 댄 양복상의를 입고 강의하셨다.


어느 날 위와 같은 제목의 노래가사(영화 모정의 주제가) 중 “Love is nature’s way of giving / A reason to believe in / The golden crown that makes a man, a king”을 칠판에 쓰고 나신 후에,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한 마디로 간단히 표현하면 일방적으로 대가없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다소 파격적인 내용의 예를 들어 주실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셨고, 강의 내용도 종교과목이 으레 딱딱하기 마련인데, 예화를 들면서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시곤 하였다. 그 이후로 위의 노래는 한동안 나의 18번 노래가 되었습니다.


민 교수님은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끔 초빙하셔서 설교말씀을 듣는데 교회용어로는 참으로 은혜롭고 일반적으로는 눈을 똑바로 뜨고 한 눈 안 팔 정도로 재미있게 말씀을 전하시곤 합니다. 대학 때도 명강의 하시더니 교회에서도 명설교를 하시고 계시니, 얼마나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지요.




­ 이야기 둘 ­


3학년이 되자 졸업 후에 취직이든 대학원 진학이든 사회과학 공부를 하기 위해 상과대학 경영학과 1학년 학생들이 공부하는 경영학원론을 수강 신청했다. 담당교수는 경영학과 학과장이신 이기을 교수님이었다. 물론 영문학 전공과 선택과목은 다 듣고 신청한 것이라 학점 여유가 없어 정법대의 법학개론은 포기하였다.


아시다시피 3학년은 대학시절의 Prime time이라, 학교에서는 공부, 연극(우리말 및 영어), 학교 밖에서는 영어 토론그룹 모임의 회장을 맡고 각종 행사(English Speech Contest, Picnic, Summer outdoors workshop, Drama contest 등)에 바쁘게 참여하다 보니, 영문과 수업은 거의 꼬박 들어도 남의 동네 과목인 경영학 수업시간은 빠지는 날에, 지각하는 날이 더 많았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정상출석, 지각과 결석이 각각각 3분의 1이었다. 이런 출결은 시험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말 시험이 되니, 경영학과 학생들 중에 출석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아예 시험을 포기하고 있었고, 또 볼 수도 없었다. 이 교수님의 교육방침은 학기 초에 공언하신 대로 출결이 나쁜 학생들은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하시고 종강시에도 재차 강조하셨다. 설사 몰래 시험을 보드라도 나중에 빵점이나 F학점(그게 그거지만) 처리하신다고 엄명이 있으셨던 차라 얌전히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이번에 학점이 안 나오면 바쁜 4학년 1학기에 다시 들어야 하니, 난감하였다. 괜히 신청해서 이곳저곳에 민폐에다 여간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포기할 수 없었다. 되든 안 되든 교수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심호흡하고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누구야?”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반 학생입니다. 들어가니 경영학과 학생이면 나가라고 하시길래 “저는 영문과 3학년 학생입니다” 하니까, 아시면서 “무슨 일인데 짧게 얘기해봐”, “죄송합니다, 출결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지 않습니다. 저 사실은 졸업 후에 대학원에서 경영학 전공하고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갈 계획으로 경영학원론을 신청했는데 학교 안팎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허락해주시면 시험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내겠고 계획대로 경영학공부를 계속할까 합니다.” 선생님께서 들으시더니, 반색을 하시면서 “그래, 영문학 전공한 사람들이 경영학 하면 영어도 잘하니까 미국에서 공부해도 경쟁력 있다”고 하시면서,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는데, “자네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을 잘 보더라도 학점은 A학점은 기대하지 말고, 열심이나 하게.” 나중에 시험성적을 보니 B학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해보니, 선생님도 원칙과 방침을 가급적 지키시고, 나도 학점을 땄으니, 요즘 말로 Win-Win이었다.


말의 씨가 됐는지, 주위 친구들이 상과 대학생들이 많아서였는지 이일 후에 다른 사정도 있고 해서, 영문과에서 연극전공으로 대학원 진학하려던 계획을 접고(고교 은사이자 연극전공 교수이신 한상철 선생님의 지도로 「고대 그리스 비극과 유진오닐의 Mourning Becomes Electra」라는 Oedipus와 Electra Complex를 비교 연구한 졸업논문을 제출하였습니다) 이후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친구들과 진학하였고 우리 과의 백대기 동문(현재 충북대 경영학과 회계학 전공 교수)과 동문수학하였습니다.


Tipping Episode :


참 인연이란 이런 건가요. 제가 세무회계 소프트 개발, 판매 회사인 (주)더존소프컴 대표이사일 때 개발실에서 알고리즘을 이용한 세금계산서 자동입력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모교 공과대학 컴퓨터과학과와 산업협동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보니 대표교수가 이일병 교수님이었는데 나중에 얘기해보니 그분이 위에서 언급한 이기을 선생님의 자제분이었습니다. 인연이란 참 묘하지요!!!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데 이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남(이웃, 친구, 친지, 친척뿐만 아니라 전혀 모른 사람도 포함)한테 좋은 일을 하게 되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지만 남한테 잘하지 못하면 또 어떤 형태나 방법으로 되갚음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학교생활, 그룹 활동, 서울과 지방, 해외에서 직장생활 하며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 이야기 셋 ­


4학년이 되자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서 관심이 커지는 때였다. 3학년부터 복학생 선배들이 하나둘 늘더니 4학년 1학기가 되자 20여 명으로 늘어 재학생 남자, 여자, 복학생 선배 그룹으로 북적대면서 활기가 차 있었다. 복교생 중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분들은 장덕희 선배(현재 이화외국어고교 교장)와 고승일 선배(현 세일림 대표이사, 영문과 동창회장) 두 분이 있었는데 장 선배는 군에서 보초 설 때도 영어책을 몰래 볼 정도로,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파였었고, 졸업 후 그때 당시에 대기업으로 유일하게 영문과 출신을 뽑는 현대건설에 입사하셨다가 워낙 직장분위기가 와일드하여(노가다 스타일이라) 6개월 만에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그 회사는 해외건설을 위해 영어 전공자를 많이 뽑았다고 합니다. 고승일 선배는 3학년 때인 1969년 5월에 경복궁 내에 미국산업기계류 전시회에 통역 겸 안내로 우리 영문과와 성대 영문과에서 남, 여 학생을 선발하였을 때 같이 활동하였다. 멋진 맞춤유니폼(상의 곤색, 하의 회색바지)을 입고 2주 간 파트타임 근무 후에 아르바이트로서 상당한 페이를 받았다. 끝난 후에는 미대사관에서 감사 및 격려하기 위해 대사관 클럽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그때 상무관이었던 Mrs. Markson과 30명 중에 유일하게 신나게 지르박 춤을 추었던 분이 고 선배였다. 영어회화를 능수능란하게 잘하셨고 춤을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때 당시는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추진 중이었는데, 중화학공업육성을 위해 공대생이 제일 취직이 잘 되었고, 상대생, 법대생 순이었고 인문계에서 영문과 출신은 교육, 신문, 방송 분야뿐만 아니라, 무역회사, 항공사, 해외진출 건설회사 등이었다. 군대에 갔다 복학하신 선배들은 재학생보다 현실감각이 뛰어났고 장래문제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영어회화에 관심 있는 복학생과 재학생 여러 명이 모여 소위 Time, Newsweek 등으로 Study Group을 만들었고 리더는 고승일 선배였다. 공부하는 중에 “우리 영문과 커리큘럼은 거의 영미문학, 영문학사와 영어발달사 등으로 되어 있어 취직에 도움이 안 되고, 우리끼리 공부해도 잘 안 되니, 취직에 도움이 되는 Practical Business English 강의를 설치해주도록 건의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당시 학과장이신 이봉국 교수님에게 우리 영문과 학생들의 취직진로와 관련 화급하게 선처해주실 것을 강력히 건의 말씀드렸다. 영문과 교수회의에서 이 문제가 상정되자, 오화섭 교수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반대하시는 등 난리가 났었고(일부 비교적 젊으신 교수님들은 이해하셨지만), 주동자(?)인 고 선배는 오 교수님에게 불려 들어가 야단을 엄청 맞았지만,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제자들을 사랑하신 교수님들이 이해하시고 용서하셔서, 그리고 미운 놈들 떡 하나 주자는 심정과 앞으로의 영문과 제자들의 앞날을 위해 우리 과 선배이시고 장안의 유명한 학원에서 강의하고 계셨던 김태성 선생님으로 하여금 2학기부터 시사영어강좌를 개설케 하여 주셨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오화섭 선생님은 우리나라 희곡번역 및 영미희곡 소개로 한 획을 그으실 정도로 희곡(연극)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대단하셨고, 수업시간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강의하실 때 햄릿, 오셀로, 맥베드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성격, 극의 전개과정의 해설을 통하여 인생의 살아가는 과정을 현실경험을 비교 설명해 주셨다. 엄하시면서도 유머러스하시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흉내 내시면서 우리들을 웃기시기도 많이 하셨다. 2학년 때부터 셰익스피어가 탄생한 매년 4월에 1학년은 빼고 2, 3, 4학년이 각기 작품을 선정 연습하여 무대에 올렸다. 1학년은 형님들 하는 것을 도우면서 배우라고 하는 의미에서 참가시키지 않았다.


스승님들의 초미니 프로파일을 보면, 학과장이셨던 이봉국 선생님은 영국신사 같이 늘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상의 포켓에 손수건도 꽂으신 멋쟁이 교수님으로 젠틀 하시면서도 여성스러운 모습이셨다. 영국 소설문학의 챨스 디킨스의 A Tales of Two Cities를 강의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성규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미국소설문학으로 마크 트웨인의 『헉클베리 핀의 모험』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강의해주셨다. 유영 선생님의 영미시 강의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늘 조용하시면서도 인자하시고 미소를 머금고 강의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에 남는 시는 낭만주의 시의 대가인 William Wordsworth의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와 “Seven Daffodils”와 나중에 영화의 타이틀과 같은 나탈리 우드와 워런 비티 주연의 “초원의 빛(Splendour in the Grass)”라는 구절이 나오는 “Immortality Ode”였고, Percy Bysshe Shelley의 “Ode to the West Wind(서풍부)”의 마지막 구절은(“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 것이랴? =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너무나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그 밖에, 엷은 색안경을 늘 쓰시고 영문학 역사를 가르치신 권명수 선생님, 고대 및 중세 영어를 가르치신 붉은 가발의 전형국 선생님, 영소설 문학을 강의하신 이군철 선생님, 늘 명랑하게 현대 교양영어를 가르치신 유지식 선생님,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따시고 귀국하셔서 4학년 1학기에 어려웠던 영미문학 비평론을 차분히 조용하게 가르치셨던 이상섭 선생님, 영어음운학을 지도하셨던 김선재 선생님, 현대 미국영어회화로 방송출연하시면서 인가가 높으셨던 교양학부 나건석 선생님 들이 기억에 남는다.




Epilogue


글 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이야! 남이 써 놓은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읽기 쉬웠는데. A4용지 8장 이내를 쓰고 타이핑하는 데(한타는 독수리 타법과 자판을 보고 치는 컨닝 타법임) 며칠 씩 걸리니, 60년사에 게재할 것이 아니면 다른 바쁜 일로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을…


하여튼 이야기 하나에서 둘을 지나 셋까지 쓰고 나서 보려내니 감개무량(?)합니다. 부족하고 졸필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그때 그런 일도 있었었구나 하고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학교생활은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사회생활 하면서, 자기가 택한 직장이나, 사업을 하면서 사람과의 만남과 접촉에서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 어려움과 심적 고통이 더 많았음을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려울 때, 누가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줍니까? 부모, 형제자매, 자기부인, 자녀, 스승, 선배, 후배, 카운슬러 등등… 이 모두 아닙니다. 우리를 나와 같이 이해하고 힘 주시는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제가 고통 중에 있었을 때 자주 읽고 위로 받았던 성경의 시편 구절을 인용하면서 에필로그에 대신 할까 합니다.




시편 18편 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Psalms chapter 18:6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I cried to my God for help. From his


temple he heard my voice; my cry


came before him, into his ears.




여러 동문님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