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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Lithuania에서 Louisiana로: 60년사 편집 중의 와전(訛傳)여행 (67 문경환)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Lithuania에서 Louisiana로: 60년사 편집 중의 와전(訛傳)여행 (67 문경환)




이방인의 왕래가 좀처럼 없는 리투아니아 오지(奧地)의 한 여관집. 남자주인은 읍내로 술친구 찾아 가고 여주인과 딸은 무료에 빠진 저녁, 준수한 외모의 청년 하나가 숙박을 위해 찾아든다. 고급스런 옷차림에 멋진 가방, 젊지만 점잖은 말투와 세련된 억양. 여주인과 딸은 도무지 이 손님을 근방의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무슨 ‘기묘한 사연’으로 이 한적한 시골구석에서 하룻밤 묵을 형편이리라. 아직도 지는 중인 저녁 해에 여느 날의 권태가 걸쳐진 지금 어디선가 날아온 횡재에 두 시골 여자는 잔뜩 발동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말을 건다. 길손은 낯선 땅의 숲속을 헤매다 겨우 이곳을 발견한 터라 몹시 피곤하다면서도 바깥세상 이야기, 도회지 삶의 화려함에 대한 구설로 여자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여자들은 그를 상당한 재력가로 더욱 확신하게 된다. 주변에 인적도 없이 어둠만 이슥해져 가는 이 오지의 여관방에 찾아든 부자 청년! 두 여자의 마음에는 음침한 어둠만큼이나 음침한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깃들기 시작한다. 이 자의 가방을 보라. 우리 미래의 부(富)가 거기에 들어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적어도 젊은 여자(딸)의 도회지 진출을 위한 종자돈, 그것도 아니면 얼굴주름 늘어가는 초로의 여자(어머니)가 주정뱅이 남편에게서 덮어쓰는 이 지겨운 여관지기 신세를 며칠만이라도 면할 만한 돈은 그 가방에 들어있을 터이다. 그 돈의 주인을 바꾸는 방법? 그건 간단하지. 이런 곳에서 이방인 하나쯤 사라진들 쥐도 새도 모를 테니까. 청년이 이층의 침실로 오른 후 두 여자의 음모는 점점 더 짙어간다.


얼마 후 고주망태로 친구들에 부축되어 문지방을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딸은 오늘따라 웬 술이 벌써 이 지경이냐고 역정을 낸다. 인사불성인 줄 알았던 아버지는 그래도 혀꼬부랑이를 용케 펴가며 유쾌한 이유를 댄다. 오늘 읍내에서 우연히 듣게 된 건데, 오래 전 돈 벌겠다고 집 뛰쳐나간 네 오빠가 돌아왔다지 뭐냐. 집엔 아직 안 왔나, 이렇게 조용한 걸 보니. 아니면 나 올 때까지 시침떼고 있는 건가? 하기사 오랜 세월 만에 놀래키고 싶기도 하겠지. 녀석, 귀티가 줄줄 흐른다던데. 하여튼 내 일생 최고의 날 술 좀 진창 했지.


아뿔싸! 사태의 진상을 접수한 딸의 두뇌가 이층으로 조금 전 올라간 엄마의 손에 들린 쇠망치로 급회전하려는 찰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살인사건을 알린다―“No, mother!”


이로써 그 ‘기묘한 사연’이 막을 내린다. 마르셀 에메(Marcel Aymé의 Lithuania라는 제목의 연극 줄거리다(불어의 영어번역본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어느 한 구석에선가 이런 살인사건이 일어남직하리만큼 외부와의 교통이 거의 단절되어 있는 리투아니아의 입지조건에 착안하여 만든 드라마일 것이다(이 ‘고립성’이 이른바 인도·유럽어 연구에서는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리투아니아어(語)는 외부 언어와의 접촉이 뜸한 고로 조어(祖語)의 모습을 상대적으로 잘 보존하고 있어 ‘비교연구’의 참조기준이 되곤 하는 것이다).


아니, ‘드라마’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글이 있으니 말이다. 알베르 까뮈가 쓴 『이방인』(L’Éranger) 제2부의 제2장이 끝날 무렵 나오는 대목으로, 다만 무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되어 있고 세부적 차이도 조금은 있다.


‘악의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어느 날 감방의 침대 판자 밑에서 색바랜 신문 한 장을 발견한다. 세월에 찢겨 제목은 안 보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듯한”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어떤 사나이가 체코의 어떤 마을로부터 돈벌이를 떠났다가 25년 후에 부자가 되어서 아내와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누이와 함께 고향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사나이는 처자를 다른 여관에 남겨 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었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장난으로 방을 하나 잡고 돈을 보였었다. 밤중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돈을 훔친 다음 시체를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 아침이 되자 사나이의 아내가 와서 무심코 길손의 신분을 밝혔다. 어머니는 목을 매고 누이는 우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이휘영 역, 문예출판사, 1973)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법도 한 이야기”라고 뫼르소(즉 까뮈)는 평한다. 그런데 마르셀 에메와 까뮈 중 어느 쪽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드라마와 소설을 놓고 ‘사실’을 운운하는 건 우습지만, 그래도 훌륭한 작품일수록 허구 속에―‘허구연(然)’하는 속에―사실을 재어놓은 경우가 많은 법이다. 실제로 있었던 것에 발판을 탄탄하게 깔고 상상의 도약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마르셀 에메는 까뮈보다 11년 먼저(1902) 태어나 7년 늦게(1967) 타계했으니 둘은 결국 ‘동시대’ 사람들이고,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서 이야기의 소재를 빌렸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방금 본 뫼르소의 어투로 보아 목하의 ‘이방인 살인사건’은 적어도 두 작가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일로, 그들은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라 추찰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사건의 무대가 Lithuania냐 아니면 Czechoslovakia냐 하는 것은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우리에게 별무상관인 것이다.


그런데 그 무대가 Louisiana라 한다면?


이런 엉뚱한 주장이 하마터면 “영문과 60년사”에서 나올 뻔했다. 필자가 편집진의 일원으로서 최종 단계에 알게 된 것으로, 원고 한 구석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발견된 것이다. “1953년경부터 오화섭 교수는 연세극예술연구회 지도교수 겸 연출을 맡아 대학연극을 선도하여 오다가, 1969년부터 영어영문학과 각 학년별 대항 영어연극 공연을 주도하였다. 제1회 영어연극 공연은 1969년에 이루어진 각 학년별 대항 영어연극 공연이었다. 이때 공연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전략) 3학년: Marcel Ayme의 Louisiana (후략).” 이후 원고 240여 쪽을 더 지나 나타나는 “3학년은 Marcel Ayme의 Louisiana”라는 표현이 문제의 오보(誤報)를 재등록하고 있었다(Aymé의 accent aigu가 빠진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Lithuania―아니면 Czechoslovakia―로부터 Louisiana로의 대륙 간 이동! 극작계의 고전적 불문율로 통하던 ‘세 가지 통일성’의 하나인 장소 통일성(unity of place)을 너무나 심하게 어긴 셈이다(이런 원칙, 오늘날엔 콧방귀 대상이지만 말이다). 편집과정에서 나는 Louisiana를 Lithuania로 되돌려 놓았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눈이 갔던 것은 유별난 ‘정독’의 결과가 아니다. 나 자신 그 연극에 참여했었던 까닭에 쉽사리 눈에 띄었을 뿐이다.


쉽사리 눈에 띈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이 또한 고유명사 건이다. “이 중에서 Louisiana가 수상하였고 조연제(2), 문경한(3), 이영철(4) 동문이 각각 최우수 연기자상을 받았다”라는 대목으로, 당시 우리 3학년에 “문경한”이라는 학생은 없었다. 한 가지 사실에 관련된 고유명사 두 개가 모두 틀렸다면 그건 결국 ‘무사실’(無事實)이 되는 건데… 경상도 진해에서 군생활을 하는 동안 토박이 친구들에게 ‘문·경·환’의 어느 한자도 제대로 발음됨이 없이 ‘뭉게와이’로 뭉개지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한 적 있는 나에게 한 글자의 한 획 빠진 정도야 약과인 셈이지만, 아무튼 수정대상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일들이 어째서 생겼을까. 우선 원고 집필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안다. 실은 이 “Louisiana”를 약 20년 전 우연한 기회에 영문과의 어떤 영어연극 프로그램 한 구석에서 목격한 바 있으니 말이다. 지난날의 공연 사례를 요약하는 부분이었다. 원래 기록 남기기의 중요성에 둔감한 편인지라 무심과 나태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려니 하는 좀 한심스런 생각으로 지나쳤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대학시절 (학과 차원에서나마) 줄곧 연극에 참여한 편이지만 지금 그 내용을 60년사의 연극 서술 란에 추가할 수가 없다. 연극 내용이 희미해서가 아니라 참여자 명단이 기억 속에 완벽하지 못해서다. 기억따라 대충 기록할 수야 있겠지만, 명단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기록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것 아닌가. 70년도에는 그간 한 동안 단절되었다던 ‘시와 음악의 밤’이 옛 경영관 강당에서 재개되어 거기서 노래 몇 가락을 뽑았지만, 이에 관한 기록에도 정식 참여가 불가한 형편이다. 참가자 명단, 그리고 나를 위해 피아노 반주를 해 준 그 상냥한 음대 여학생의 이름마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 와서 누구에게 수소문할 형편도 못된다(졸업반 상황의 공교로운 일로 내 역할 부분 외에는 참여하지 못해 생긴 결과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Louisiana”가 60년사 원고의 한 구석에 그런 모양으로나마 실려 있는 게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었다. 지금까지 못해 오던 오보정정이 그 덕에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Lithuania와 Louisiana, 문경환과 문경한―그러고 보니 서로들 닮긴 했다. 그렇긴 해도, 이 경우에는 기록자에게 불러주는 쪽의 발음이 시원찮아서였을까, 아니면 기록자 자신의 청취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나로서는 “It’s good, it’s good, it’s good. I’m dog-tired after that tramp through the woods”로 시작되는 대사 첫머리에서 동어반복 부분의 그 단조로움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신경께나 쓸 만큼 어조와 발음에 조심했었는데… 어쨌거나 나 자신에 관련된 것들은 쉽사리 눈에 띄었지만, 그렇지 못한 오자와 탈자, 아니 내용 자체의 탈락이나 왜곡, 문법위반, 어법위반, 본의 아닌 훼언(毁言), 이런 것들이 차후 완성본 “60년사” 곳곳에 감지된다면? 편집진의 일원으로서 송연한 심정이다.


여하튼 아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문제의 오자들이 생겨난 경위는? 그거야 와전(訛傳)의 결과랄밖에 또 무슨 설명법이 있겠는가. 60년사 원고의 문면으로 보건대 아마도 당시 연극공연을 취재한 『연세춘추』 기자의 부주의에 연유한 해프닝이 아니겠나 추찰해 보지만, 그에게 와전의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아니, 잘못된 기록이나마 남겨 준 것에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니, 그 이유는 이미 밝힌 바이다. 게다가 그의 실필(失筆)이 오늘의 이 일필(一筆)에 소재가 되어주었고, 덕분에 37년 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음산하던 Lithuania를 떠나 ‘밴죠 가락 청명한’ Louisiana로 와전여행도 한 바탕 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 곱빼기로 감사할 일이다. 끝 좋으면 다 좋은 법―All’s well that ends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