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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남학생의 예쁜 질투와 황당한 객기 (67 김재인)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남학생의 예쁜 질투와 황당한 객기 (67 김재인)




25주년 재상봉 덕분에 67학번 영문과 졸업생들은 일 년에 두 번씩 만나고 있다.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서 오가는 갖가지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를 동료 선생―서강대 출신―에게 들려주면 그 여선생님은 내가 연대 영문과를 졸업한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 나도 솔직히 영문과 남학생들의 변함없는 따뜻한 배려와 은근한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40여 년 전 우리는 27대 1의 경쟁을 뚫고 영문과에 입학했다. 35명이 정원이었으며, 남녀의 숫자가 거의 비슷했다. 2학년 때 편입생, 3학년 때 복교생이 들어와 50명 이상의 숫자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주 넉넉하고 오붓한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졸업이수 학점은 160학점이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180학점을 이수했으며, 여학생은 대개가 정장 차림에 조그만 핸드백까지 가지고 다녔다. 여학생이 바지, 특히 진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방 커피가 200원 하던 시절이라 친구들에게 10잔의 커피도 살 수 있었다. 많은 학점을 이수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학생들처럼 바쁘거나 허둥대지도 않았고,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대개의 여학생들은 졸업하면 시집가는 것으로 생각했다―아주 느긋하게 청송대와 백양로를 오가면서 대학의 낭만을 즐겼다. 그 당시 선배나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충고는 주로 “도전하라”, “큰 꿈을 가져라”, “어딘가에 미쳐보아라” 등등이었다. 애써 고생하면서 자기를 찾고자 하는 남학생들은 무전여행을 여름 방학에 떠나기도 했다. 예전에는 시골 인심이 좋아 밥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고, 완행열차 또는 밤 열차를 승차권 없이 숨어 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학의 여유와 낭만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매우 불행했던 시기였다. 거의 매 학기마다 휴교령으로 대학이 문을 닫았으며, 수돗물을 받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기도 했고, 단명한 연탄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다. 밥만 먹여주면 일하겠다는 시골 소녀들이 수두룩했고, 많은 지방 학생들은 숙식 제공하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원하는 원서를 교재로 선택할 수 없어 18세기 영소설 시간에 잔슨(Samuel Johnson)의 이른바 철학소설 『라셀러스』(The History of Rasselas, Prince of Abyssinia)를 읽었고, 19세기 영시 수업은 번역하면서 “참 좋지”하고 배웠지만 분석을 할 줄 몰라 왜 좋은 가를 알지 못했다. 학교가 문을 자주 닫았기 때문에 두 학기 동안 배운 영문학사는 18세기 드라이든(John Dryden)에서 끝냈고, 당시 유명했던 문학 비평가의 문학개론은 한 학기에 두 번 만남으로 종강했다. 선생님께 감히 전화도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여학생들은 명절 때 선생님께 세배 갔고, 사은회에서 한복을 입고 큰 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 시절 67학번 영문과 여학생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서울대 공대생들과 주말에 첫 미팅을 하고서 우리는 월요일에 노천극장에서 만났다. 그때 여학생들의 깔깔대며 좋아하던 천진한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남녀 공학에서 미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같은 과, 학년 남학생, 여학생에게 서로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1학년 교양 수업 시간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학생들이 지난 주 연대 음대 여학생들과 미팅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여학생들의 사전 허락(?)도 없이 비밀리에 미팅을 한 것이다. 이상하게 그 소리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과 남학생의 관심이 다른 과 여학생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 서운하고 못마땅했다. ‘영문과’라는 울타리에 머물면서 항시 다른 과 여학생들보다 우선적으로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영문과 여학생들의 달콤한 착각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보복 심리에서 나온 것인지 잘 모르지만, 여학생들은 이제 남학생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당당하게 미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제비를 뽑아 같은 번호의 남녀가 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 데이트를 한 다음 모두가 같은 장소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노천극장에서 우리는 각기의 짝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서울대 공대생들을 흉보면서 재미있어 했다. 여학생들은 남자와의 만남이라는 이 ‘색다른 경험’에 즐거워했지만, 여학생들의 미팅 소식을 전해들은 남학생들은 기분이 무척 상했다. 남학생들이 가장 속상했던 것은 그들의 여학생들이 같은 대학도 아닌, 서울대생과 미팅을 했다는 점이다. 평소에 여학생에 대해서 약간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있어서 연대 영문과 여학생과 서울대 공대 남학생의 만남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큰 사건이었다. 그들의 애정 어린 예쁜 질투는 은근슬쩍 그들의 말투에서 배어나왔고, 술자리에서는 간혹 투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미 고인이 된 한 남학생은 졸업할 무렵 술을 마시고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너희 여학생들은 서울 공대생과 미팅했었지.” 이 말은 남학생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 질투심을 고백한 말이었다.


연대 영문과와 관련된 또 하나의 추억은 남학생의 돌발적인 방문이다. 복교생 가운데 유독 영어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돈을 많이 벌겠다고 말한 한 남학생이 있었다. 사실, 그 친구는 지금 자신의 꿈을 이루어 건실한 회사의 사장으로 영문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 남학생 그리고 다른 두 남학생이 영작문을 배우기 위해서 나와 같은 학원을 다녔다. 학원 수업이 끝난 어느 날 밤, 세 남학생이 느닷없이 나를 따라 내 자취방을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의 교육을 아주 잘 받은 나로서는 그들의 방문 의사를 결코 수락할 수 없었다. 더욱이, 때는 늦은 밤이었고, 자취방 두 개 중 하나는 사용하지 않아 냉방 상태였다. 먹을 것, 잠자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방문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때의 나의 난감함이란!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의 당황스러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당황스러움에 재미있어 하면서, 그들은 그날 밤의 객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자취방으로 향했고, 그들은 내 뒤를 따라 왔다. 밤중에 여학생 사는 곳에 남학생들이 찾아 왔으니, 동생 보기도 부끄러웠고, 주인아주머니가 볼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하룻밤 나의 빈 방을 내주었다. 그들도 그러했지만 나도 옆방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냉돌에서 밤새 쉬지 않고 영어 말하기 연습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났다. 그들을 푸대접한 내 죄송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날 밤 영어 연습이 오늘날 그들에게 화려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예전에 베풀지 못한 아침 식사를 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