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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늦은 봄날 청송대 숲가에 서서 (65 박찬순)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늦은 봄날 청송대 숲가에 서서 (65 박찬순)




벚꽃 비가 내리는 늦은 봄날 밤. 가족의 간병을 위해 거의 매일 세브란스로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알렌관 앞을 지나 동문을 향해 달리던 나는 삼거리에서 갑자기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무엇이 핸들을 돌리게 했는지도 모르는 채 본관 쪽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 막 연초록 잎이 피어나는 청송대 숲에서였다.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내 눈에는 우리 여학생들이 “꺼벙이”라고 불렀던 복학생이 거기서 키츠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들리는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아름답다.” 그 당시에는 뜻도 모르면서 시험을 치기 위해 외웠던 시구가 귓가에 또렷이 들려온 것이다. 그로 말하자면 이미 1학년 때 언더우드 동상 앞 벤치에 앉아 벚꽃 비를 맞고 있던 내게 “촌티 나는 사람끼리 잘해 봅시다.”라는 말로 내 마음을 서럽게 했던 남학생이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와 그렇잖아도 촌티가 나는 내 자신이 싫었던 터에 내게 촌티라는 낙인을 찍어준 그를 나는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무어라고 응수했던가.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벌써 41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그가 외우던 키츠의 시가 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캠퍼스에서 자주 마주치긴 하면서도 그 “촌티” 사건 때문에 그와 서먹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 나는 그야말로 한눈에 반할 만큼 멋진 남자를 찾아내게 되었다. 오형석 교수의 보건 강의 시간에 내 곁에 앉게 된 남학생이었다. 보건 과목은 국내 대학 최초로 성교육을 시키는 강의여서 남녀가 꼭 짝지어 앉게 되어 있었다. 통성명을 한 적은 없지만 그가 두툼한 사무엘슨 경제학 원론을 끼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상대생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 남녀의 신체구조의 차이와 그 신비로움에 눈 뜨고, 산모가 아이를 낳는 현장을 찍은 필름을 보면서 생명 탄생의 순간에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를 함께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특히 강조하던 게 있었다. 남학생들에게 그 몇 치 짜리를 단단히 간수하라는 말씀이었다. 여자가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이 꺼진 상태였으므로 나는, 비록 실루엣이긴 했지만 내 옆에 앉은 남학생의 이목구비를 훔쳐볼 수 있었다. 지적으로 보일 만큼 알맞게 넓은 이마와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상대를 빨아들일 듯한 크고 강렬한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이 매혹적이었다. 손목은 탐스러울 정도로 굵었고 손가락은 건강하면서도 길쭉길쭉한 품이 첼리스트가 되어도 좋을 듯했다. 나는 강의보다는 주로 그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화면의 진기한 광경에 빠져 이제 갓 소년티를 벗은 그가 넋을 잃고 있거나 탄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다른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발표할 때면 조리 있는 말솜씨에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낭랑했던지. 저 남학생과 같이 영어 연극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건 시간만 끝나면 그는 내게 미소 한번 주지 않고 상경관 쪽으로 가버렸다.


말을 걸어보리라 마음먹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기를 몇 번, 그 다음 보건시간에는 내 마음을 적은 쪽지를 몰래 그의 사무엘슨 경제학 책갈피에 꽂으리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다른 여학생 옆에 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그는 아무런 시선도 느끼지 않는지 그 여학생과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럴 테지. 저런 킹카가 나 같은 촌티 가시내에게 눈길을 주려고. 학교 주소로 편지도 보내봤지만 답장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그가 2학년 때 이미 군대에 간 것을 알게 되었다. 짝사랑의 아픔은 꽤 오래도록 계속되어 나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부도 시들해지고 뭐 하나 뚜렷하게 하는 것도 없이 캠퍼스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3학년 2학기의 겨울은 지금의 대학생에게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공포의 학기였다. 남은 1년 동안 이 사회 어딘가에 일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면 등록금을 대어준 오빠에게 면목이 없을 터였다. 방학이었지만 나는 취직 준비를 해야 된다면서 집에 내려가지 않고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 앞 자취방에 눌러앉아 있었다. 이듬해 1월, 수 십 년 만의 폭설을 맞았다. 눈이 아마도 내 무릎 위까지 쌓였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 발길은 나도 모르게 청송대로 향했다.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눈꽃이 피어 있었고,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눈밭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아름다운 설경은 처음이었다. 긴 장화를 신은 것도 아니면서 나는 가슴이 벅차 숲속을 겅중겅중 뛰어 다녔다. 넘어져도 싫지 않았다. 모처럼 나는 생기를 찾고 있었다. 짝사랑이 아프다 해도 아름다움의 실체 앞에 나는 다시 튀는 공이 된 것이다. 순결하면서도 화려한 설화를 피운 숲은 내게 괜찮아, 괜찮아. 세상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어, 하고 토닥여 주는 듯했다.


아뿔싸, 한 시간 넘게 엎어졌다 다시 일어서며 눈밭을 헤치고 다니던 나는 손목이 빈 것을 발견했다. 입학할 때 오빠가 사준 손목시계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아찔했다. 엄격한 오빠에게 뭐라고 변명을 하나.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시계를 잃어버리기를 너무나 잘했다고. 내 청춘의 시계를 그 숲에 묻었으므로. 시계는 그 순간 멎어서 나를 영원히 젊은이로 남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차가 왔으므로 나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백양로를 빠져나가 굴다리를 지나면서 오른쪽 동네를 흘낏 바라다보았다. 거기 음식점이 즐비한 뒷골목 어딘가에 내가 짝사랑에 울며 밤을 지새우던 자취방이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