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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선생님의 목소리 (64 장승익)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선생님의 목소리 (64 장승익)




“자네는 공부를 더하지!”


1968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취직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문과대학 돌계단 앞에서 마주친 오화섭 학장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나는 그때 선생님의 그 말씀을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과의 친구들이 알듯이 나는 대학시절 학교 공부를 잘 했던 학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희곡시간에 선생님의 셰익스피어 강의를 잘 들어서 좋은 학점을 받은 기억도 없다. 더구나, 선생님께서 관여하셨던 연극반 활동에는 코끝도 내민 적이 없다.


공부를 안했으니 졸업 후에라도 공부를 좀 하라는 뜻의 말씀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 당시에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의아해 질 뿐이었다. “선생님, 저는 취직을 해야 됩니다.” 하고는 그날 교정을 떠나오고 말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일자리를 알아보고 집에 돌아왔더니 병석에 누워계셨던 어머니께서 “오늘 낮에 너희 학교 선생님이 다녀가셨다.”고 하셨다. 그 당시 명동성당 아랫동네에 있던 우리 집을 학교 선생님께서 몸소 찾아 오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놀라워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오화섭 선생님”이라고 하시며 내일 학교에 한 번 다녀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다음날, 학장님실로 갔다.


예나 다름없이 담담하신 표정으로 “현대건설이라는 토건회사에서 졸업생 추천 의뢰가 왔는데, 한번 해 볼 텐가?”하고 물으셨다. 영문과 출신과 토건회사가 궁합이 잘 맞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재 빨리 “네! 선생님 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대학 졸업생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던 선망의 직장이었다.


“그런데, 4년 평균성적이 B학점 이상이라야 되는데, 자네는 일학년 때 공부를 안 했더군” 하셨다. 순간 아찔해 하면서도 “네, 저희 일학년 때는 한·일 회담 반대 데모다 6·3사태다 하여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래! 전반적으로 괜찮으니 한번 해보게.” 하시며 추천서를 써 주시겠다고 하셨다.


태평로에 있던 코리아 헤럴드의 영어회화반에 등록도 하고, 곧바로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시험일까지 약 2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영어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준비를 했다. 시험 당일 광화문에 있던 현대건설 본사에 가보니 서울대, 고대 그리고 외국어대학에서도 추천을 받아 온 영문과 출신들이 있었다.


늦가을, 합격자 발표가 있을 때까지 마음을 졸이며 영어학원을 계속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학원 선생님은 그 좋은 직장에 합격했으니 한 턱 내라는 것. “좋습니다. 다음 토요일 오후, 장소는 경복궁 안 경회루 옆입니다.” 하여 7, 8명 가량 되던 학원 친구들과 고궁의 연못 옆에서 합격 축하연도 벌였다. 기뻤다. 사회인이 된다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1969년 1월 초 현대건설 신입사원이 되었다. 우선, 학교 옆 대신동에 있던 선생님 댁으로 조그만 과일 상자를 들고 세배를 갔다. 반가워하셨다. 세배를 드리고나자 선생님께서는 양주를 한 잔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존경하는 선생님과 술을 마시다니! 더구나 막걸리밖에 못 마셨던 때에 양주로! 너무 좋았다. “한 잔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곧이어, 탁자에는 구절판 같은 나무 그릇에 마른안주가 놓여졌다. 선생님께서는 서재의 책장 아래에서 반쯤 남은 죠니 워커 병을 들고 오셨다. 한잔 마셨다. 혓바닥이 짜릿했다. 잠시 후, “선생님,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했다. 약간 웃으시며 “그래, 한 잔만 더 하지” 하시며 또 한 잔 따라 주셨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두 잔을 마시고 나니까 약간 취기가 돌면서 간이 커지는 듯 했다. “선생님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했더니 얼마 남지 않은 양주병을 보시며 “자네는 한 잔만 하겠다더니 한 병 다 비우겠네.”하시며 아깝지도 않으신 듯 또 한 잔 가득 따라 주셨다. 속으로 “기왕 내친김에 저 병 다 비워야지”하는데 대문의 벨 소리가 울렸다.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셨던 분은 우리나라 연극계의 원로이셨던 김의경 선생님이었다. 나는 조금 남은 양주를 아쉽게 남겨 놓고 떠나야만 했다.


2월이 되자, 영문과 출신 3명과 상경계 출신 3명이 경부고속도로의 오산-천안 구간 현장으로 파견되었다. 1공구에서 6공구까지였다. 나는 안성 인터체인지 구간 7km의 3공구를 맡고, 서울대 출신의 황선하는 5공구를 맡았다. 1월 한 달 동안의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 우리는 서로 친해져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가끔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아직 구정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진눈깨비에 질퍽한 고속도로 현장 사무실 주변은 살벌하기만 했다. 공사기간이 약 2년 여 남아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가능한 한 1년 내에 끝내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현장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였다. 우리는 밤에도 전등을 대낮 같이 밝게 켜놓고 새벽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신입사원으로서 경리, 자재 일을 보고 있었다. 토목쟁이들이 먼지 뒤집어쓰고 밖에서 일하고 있을 때도 나는 현장 사무실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공사 도중 건설 중장비의 기름이나 공사용 자재가 떨어지거나 직원 중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경리 담당자가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장 생활은 힘들어 갔다.


주말 휴일도 없던 공사판에서도 휴식시간은 있었다. 비 오는 날. 당시의 유행가처럼 “비 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었다. 이럴 때면 5공구의 황선하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가오리를 안주 삼아 농주를 마시러 갔다. 한 잔, 두 잔 마셔가며 우리의 푸념은 끝이 없었다. “아! 지금쯤 우리 연대의 청송대 신록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면 그는 곧이어 “동숭동 캠퍼스에는 아네모네가 한창일 텐데!” 하며 또 한 잔 들이키곤 했다. 결국 우리는 이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선생님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위 “노가다”판이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얼마 후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적성” 운운하며 도로 공사 현장의 어려움을 말씀드렸을 때 “그래서 그 곳은 사람을 잡아먹던 곳이던가?” 하시며 참을성 없던 나를 질책하시는 듯했다. 실망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한동안 선생님을 뵐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 후 “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즈”의 경제부 기자 생활을 했던 약 4년간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다.


다시 선생님을 찾은 것은 1976년 현대건설 국제사업부 과장으로 재입사를 하고도 2년이나 지난 어느 날, 뉴욕지점 발령이 났을 때였다. 1978년 5월 선생님께서는 교육대학원장님으로 계셨다. 자상하신 말씀으로 “결혼해서 아이는 몇인지?” “외국지점에 가면 얼마나 있다가 오는지?” 등을 물으셨던 것 같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며 선생님 곁을 떠나왔는데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이다. 뉴욕에서 근무한 지 약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슬픔은 갑자기 찾아왔다. 뉴욕 현지에서 발행되던 한국일보에서 선생님의 서거 기사를 보았다. 서울대 장덕순 교수가 쓴 추모사도 같이 실려 있었다.


그날 밤, 뉴욕의 쓸쓸한 아파트에 혼자 앉아 선생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가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맨해튼의 라디오 시티 뮤직홀 앞에는 군밤 장수들이 매캐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곧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들려왔고 우리는 그해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후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묘지의 위치를 알까 생각하다가 오혜령 선배님에게 전화를 했다. 마포의 가든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초췌하신 얼굴에 모자를 쓴 선배님을 만났다. 김포에 있는 묘소의 위치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 장례식 당일의 모습도 영화를 보듯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묘지의 위치를 알았으나 좀체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당시 근무하고 있던 회사의 회장 비서실을 책임 맡고 있어 좀처럼 자유시간이 나지 않았다. 회장님은 일밖에 모르셨고 주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장님이 혼자 당일로 남쪽의 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오시겠다고 했다. 찬스가 왔다. 나는 재빨리 캐비닛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들고 김포로 향했다. 도중에 시장에 들러 향도 사고 꽃도 샀다.


오 선배님께서 알려주신 묘소를 찾았으나 의외로 무척 넓은 곳이었다. 묘지 전체를 몇 바퀴 뛰어 돌았으나 선생님의 묘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도 무척 흘렀고 지방에 가셨던 회장님이 돌아오실 시간도 다 되어 가는데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다음에 다시 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역시 허탕.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쳐서 멈춘 곳 아래에서 눈에 띈 묘비의 뒷면에 쓰인 글. “연극과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셨던…” 선생님을 묘사한 글을 발견했다. 반갑고 놀라움에 묘비의 앞으로 후딱 가보니 역시 선생님의 묘지였다. 순간 표현하기 어려운 슬픈 감정이 스쳐갔다. 무덤 앞에 얼른 돗자리를 폈다. 향도 피우고 꽃도 꽂았다. 그리고 술병을 따서 재배를 올렸다. 이번에는 한 잔 따라서 “선생님, 저도 한 잔 마시겠습니다.” 하고는 얼른 한 잔 마셔버렸다. 굵은 갈색 테의 안경을 쓰신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빠득빠득 조여 왔다. 또다시 한 잔을 따라 놓았다. 한순간 무덤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늦은 것 같다. 돗자리를 거두어 차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선생님의 묘를 자꾸만 뒤 돌아 보았다.


그 순간 들려온 선생님의 목소리!


셰익스피어를 강의하실 때 가끔 극중 인물의 대사를 연출해 내실 때의 약간 가늘게 높고 맑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네에∼ 그만 가 보게에! 됐어!”


그것은 분명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선생님은 약간 찌푸리신 표정을 지으시며 푸른 청송대 숲길을 걸어오고 계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