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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헬싱키에서 (62 김준철)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헬싱키에서 (62 김준철)




3월초 헬싱키의 일요일 아침, 거리는 한겨울 날씨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쌓여있는 잔설(殘雪) 더미와 미끄러운 보도 위에 뿌려진 굵은 모래가 투박스럽게 밟히는 소리, 두꺼운 코트와 털모자를 눌러쓴 행인들이 가끔 지나가는 음산한 분위기는 북구(北歐) 특유의 침울하고 둔중한 느낌의 건축물과 어우러져 핀란드 최초의 세계적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의 6번 교향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동행인 전기산업진흥회 박병일 실장과 중앙역에서 표를 끊어 시벨리우스 생가가 있는 야르덴빠 역으로 가는 전동차를 탔다. 차창 밖 눈 덮인 자작나무 숲속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공장건물과 한가롭게 모여 있는 빌라형 주택 사이로 아이들이 스키를 타고 크로스칸트리 경기처럼, 아니 아름다운 동화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친절한 역무원은 30여 분 동안 3번이나 서툰 영어로 몇 번째 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귀띔해 주었다. 어렵게 찾아간 시벨리우스 생가는 관광 철이 아니라 굳게 닫혀 있었지만 멀리서 보는 대예술가의 체취가 서려있는 마을의 겨울 풍취를 카메라에 담았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찍 돌아와 헬싱키 시내관광을 했다. 발틱해와 닿은 부둣가에는 스톡홀름을 왕복하는 호화여객선이 녹지 않은 빙원(氷原) 속에 꼼짝없이 묶여 있었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03년 세계 국가경쟁력연감 1위(인구2천만 이하 국가), 국제투명기구(TI)가 2001년 발표한 부패인식지수 1위의 나라, 노키아로 알려진 세계적 IT 강국, 그리고 오울루(Oulu) 클러스터로부터 일어난 기술혁명의 세계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핀란드 최초의 여성대통령인 타르야 할로넨은 “국가의 지속적인 국제경쟁력을 창조한다는 것은 국가경제, 특수산업, 개인기업 등의 차원에서 볼 때 규모의 크기가 아니라 기술력, 창조적 사고,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핀란드 정부가 80년대 불황을 극복하고 전통산업을 탈피하여 오늘날 무선통신 등 정보산업의 강국으로 부상한 배경에는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과 산·학·연, 지자체 및 공공기관의 협동시스템이 이루어낸 ‘오울루 신화’가 중심이었다. 인구 10만 도시 오울루가 기술도시(Technology City)로 1984년 선포된 이래 오늘날 20만 인구의 IT클러스터로 되기까지는 국립기술청(TEKES)을 통한 개발자금 공여, 기존 오울루 대학과 1992년 설립된 오울루 전문대와의 산학협동 등이 원인이 되었다. 인구 520만의 기술혁명은 500억 불의 수출을 키웠고 정치, 행정의 부패가 없고 동종업체끼리 또는 서로 다른 이종업종 간의 공동기술개발을 ‘유익하고 창조적인 충돌(useful and creative collision)’로 표현하는 정부정책의 성장 동력 그 자체였다. 역사상 오랜 기간 스웨덴의 속국이었으며 제정러시아 지배의 자치령을 벗어나 1917년 독립되어 오늘날 세계시장에 우뚝 선 기술 강국의 성장과정이 우리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깨끗한 정부와 오염되지 않은 스칸디나비아의 청정환경이 만들어낸 오울루 클러스터의 성공은 다시 가동을 서두르는 한국경제의 제2 성장모델로 삼아야 되지 않을까? 핀란드의 GDP 대비 연구개발비는 1984년에 1.4%였으나 2000년에는 3.3%로 세계 최고수준으로 증가했으며 그 중 30% 이상이 오울루 지역에 투입되었다. 또한 노키아는 이 클러스터의 최대 수혜자이자 오늘날 각종 연구개발 참여와 사업확장을 통한 최대 기여자로서 많은 재정기부를 담당하고 있어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 자기기업 확장을 위한 이미지 선전효과가 아닌 진정한 타기업 기술발전을 위해 쓰이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곡 ‘필란디아’의 장중한 멜로디와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 의 격렬한 리듬이 동시에 들려오는 환청 속에서 두 나라가 앞으로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면서 헬싱키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월요일의 시내풍경은 중요 상점들이 문을 닫은 일요일에 비해 훨씬 활기차고 붐벼서 마치 주말의 서울거리 같은 분위기였다. 핀란드 기술산업연합회(Technology Industries of Finland)를 방문하고 전자전기분과위 사무총장 레오 락소넨, 차석인 패트릭 프로스텔 씨 등과 만나 현안을 협의하면서 그들의 간단한 브리핑을 들었다. ‘기술은 모든 회원사의 공통분모이다’라는 기치아래 기술혁신을 통한 국제경쟁력, 영업력, 국제노동경쟁력 등의 강화를 위한 연합회의 기능은 정부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국가경쟁력은 기술산업의 창의성 있는 ‘영감으로부터 혁신으로’(from inspiration to innovation)라는 기업철학으로부터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핀란드 전자전기 산업의 규모가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까지 보면 1995년에 비해 약 3.5배나 성장했는데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인근 국가들은 20∼50% 정도 성장에 불과했거든요.” 락소넨 씨는 이와 같은 급성장의 배경에는 노키아를 중심으로 한 오울루신화 때문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그 성장의 내용도 순 이익률, 순 자산비율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기계류 산업보다 안정적으로 비교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1990년부터 12년간 통계로 본 노동임금의 변화는 노사정 간의 단체협약(collective agreement)으로 2002년 기준 평균 인상률 2.1%에다 회사 사정에 따른 노동시간 단축 등을 고려해 평균 1.5%, 합계 3.6%의 임금인상에 그치고 있어 매우 안정적이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도합 25%의 임금 상승을 보였고 기술, 사무직과 현장근로자의 임금인상률은 거의 동일하며 최근 일반기술직이 조금씩 우대를 받고 있는 점이 한국과 비교해 크게 다른 점으로 생각된다.


“정부의 기술 산업에 대한 지원은 이 나라의 기술상품 만큼이나 국제적 경쟁력이 있습니다. 정부가 기술개발 책임자로 자임하면서 기업과 함께 뛰는 거지요.”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헬싱키 무역관 정철 관장은 자기가 주재했던 다른 유럽국가보다 너무나 특이한 시스템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보다 과장되어 다른 나라에 홍보된 면도 없지 않다는 말도 했다. 얼마 전 절친한 동업계의 S전기 L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AC드라이브계통의 기술을 오래 전에 핀란드 회사와 기술제휴해서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는 그는 “기술적인 초일류기업 레벨은 아니지만 그 조그만 나라가 세계시장 곳곳에 강한 영업력으로 진출하고 있거든요. 영업을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일체가 되어 있어요. 저는 주한핀란드 대사관에서 자주 초대를 해주어 가곤 하는데 회사 규모에 관계없이 비즈니스가 있는 한국회사들은 모두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월급이 한국과 비해 크게 높지 않은데도 검소한 생활과 저렴한 물가 때문에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얘기했다. 필자도 체류하는 동안 비싼 명품점이나 화려한 옷을 입은 시민을 별로 보지 못했다. UPS를 거래하는 P사 K사장은 정직한 핀란드 공장의 체제에 감탄하고 있었다. “보통 UPS를 테스트할 때 우리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오차 범위만 마크하면 되는데도 디테일 스펙에 있는 숫자가 될 때까지 테스트를 몇 시간이고 합니다. 여러 나라에 소스 인스펙션을 다녔지만 핀란드만큼 정직한 기술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헬싱키에 도착하기 전 토요일 비엔나 시내 관광버스에서 만난 핀란드 출신 중년 스튜어디스는 핀란드의 세계적 거장인 첼리스트 아루토 노라스가 몇 년 전 한국을 다녀갔다고 말하자 자기도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면서 시벨리우스 생가의 위치를 알려주었었다. 북구 신화에 나오는 인간이 죽은 후에 간다는 상상의 호반인 ‘투오넬라의 백조’를 작곡한 시벨리우스 얘기에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핀란드는 기술강국이면서 예술의 나라라고 자찬했다.


‘영감으로부터 기술혁신으로’라는 문구에 있는 영감은 바로 시벨리우스적 창조성일 것이다. 상상의 호수 위에서 애잔한 잉글리쉬혼의 음색처럼 백조는 조용히 그러나 당당하게 유영하고 있다. 세계시장을 마찰 없이 누비고 있는 핀란드의 기술경쟁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