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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향기 그윽한 (61 오혜령) (2008.05.25)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향기 그윽한


61 오혜령




동경의 세계


모태에 있기 전부터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도록 예정된 사람처럼,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대 영문과를 동경하며 살았다. 선친(고 오화섭 교수)께 세뇌당했다기보다, 선친의 영어 장서를 감탄하며 나도 언젠가는 영어로 책을 읽으리라는 꿈을 키운 것 같다. 물론 선친께서는 반드시 영문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내 마음에 새겨 주셨다.


선친은 당신의 딸이 작가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우리 고전문학을 섭렵하기도 해야 하겠지만, 서양의 고전을 공부하며, 우주적이고 철학적이며 존재론적인 명제를 작품의 주제로 삼기를 원하셨다. 부모의 전공을 딸에게 그대로 물리고 싶으신 속마음을 가끔 드러내 보이셨다. “집에 있는 책들로 공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내가 모은 책들 가운데는 희귀본도 퍽 많단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어학 재능을 따져 보지도 않고, 제1지망과를 적으라는 설문지에 으레 ‘연대 영문과’라고 써 넣게 되었다. 아버지는 여중 1학년 때부터 독해력을 길러야 한다시며,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여행기』를 원서로 강독하도록 숙제를 내 주셨다. 한 페이지를 강독하는 동안, 거의 100개에 이르는 모르는 단어를 발견했고 또 너무 문법이 어려워, 밤을 새우며 얼마나 찔찔 짰는지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는 시험을 보자고 하셨다. 단어는 만점을 맞을 수 있었지만, 해석은 너무 많이 틀려서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책 한 권을 다 읽은 무렵부터, 나는 영어문장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문리가 튼 셈이었다. 그 후로 영어에 재미를 들였고, 여중 2년 시절에는,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에 재학 중이던 고종사촌 오빠가 우리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되어, 간단한 영어회화 공부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랑의 산실


그러나 여고 3학년 때, 예비수녀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서강대 영문과를 가기로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또 이화여고에서는 서울대 영문과를 가라고 압력을 넣어서 고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로, 입시 일주일을 남겨 놓고, 극적으로 다시 연대 영문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북성, 덕수, 혜화 등으로 하도 옮겨 다녀, 모교라고 할 학교가 없고, 이화 때도 2년이나 휴학을 했기 때문에 동기생들이 애매해져서, 정이 없다. 그래서 연대가 나의 사랑의 산실이고, 영문과가 나의 영원하고도 유일한 고향이 되었다. 캠퍼스에서부터 은사님들에 이르기까지, 오직 연대 영문과만 자랑하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의 영문과 동기들은 졸업 후 2년이 지난 때부터 모이기 시작해서, 39년 동안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인다. 내가 동창회라고 참석하는 유일한 모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모교를 가볼 시간이 나지 않아,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있다. 시골로 이사를 오기 전에 딱 한 번 추억을 더듬어, 내가 학창시절에 걸었던 길과 공부하던 강의실, 그리고 연극 연습하던 곳들을 순례한 적이 있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니, 강산이 두 번 더 변한 시간이다. 그때 그 자리에는 이제 아무 것도 없으리.




추억의 길


줄곧 교수 사택에서 살던 나는 청송대 길을 지나 총장공관 앞길로 등·하교했다. 숲길을 걷기만 해도 운치가 있었다. 점심 도시락을 먹기 위해서 청송대 숲 나무 그늘에 앉아 있기도 했고, 송충이를 잡느라고 소나무를 털던 일들도 아직 생생하다. 어쩌다가 결강이 되면, 무리를 지어 숲으로 가서 노래도 부르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다. 눈이 내리는 날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 가며, 영시와 우리 시를 읊곤 했다.


고 김현승 시인의 영식이 나의 동기여서, 그와 문학작품 이야기와 영적 담화로 꽃을 피웠다. 그는 목회자가 되어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졸업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여학교 때 2년 휴학을 한 까닭에 졸업이 늦어지는 바람에 후배들과 한 학년이 되어서 그런지, 유난히 인생 상담을 많이 한 편이다.


신과대학 뒷길 ‘아카시아길’은 늦은 밤, 연극 연습이 끝나고 합숙소로 가는 길이 되어, 우리는 꽃향기에 취해서 마음껏 낭만을 노래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는, 곧장 합숙소로 가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아카시아길 안의 숲으로 들어가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인생을 논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잘 죽을까를 줄곧 질문으로 제기한 나는, 그때부터 웰빙보다는 웰다잉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왜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가?”라는 빠스칼의 존재론적 물음을 되뇌며, 그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아직도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존재론적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웰다잉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노천극장이었다. 여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연희극예술연구회」의 정기공연을 보러 다녔고, 특히 총연습하는 날은 담요 한 장을 가지고 가서 노천극장에 앉아, 밤 새워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장소는 담쟁이덩굴이 멋진 문과대학 건물이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를 듣던 기억이 또렷하다. 수업을 거부하며 걸상과 책상을 교실 문 앞에 쌓아놓고 교수님을 교실로 못 들어오시게 하는 일에 가담한 것은,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로 남아 있다. 훗날 사건의 주범이 나라고 말씀드렸을 때, 당신의 강의가 재미없었으니 당연하다시며, 빙긋이 웃으시던 전형국 교수님, 그날의 잘못을 보상하려는 듯, 졸업 후에는 극진히 모셨는데, 별세하신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가나 보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고병려 교수님도 올해에 유명을 달리하셔서,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다. 고병려 교수님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개인적으로 교습 받아, 지금까지 고전어의 도움을 받고 있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교수님의 인품에 매료되어 자주 찾아 뵈온 날들도, 모두 내 기억의 창고 속에 가지런히 쌓아 놓았다.


또한 교양영어를 가르치셨던 최익환 교수님은 지금까지도 교분관계를 갖고 있다. 선친의 수제자이기도 하려니와, 나의 은사인 까닭이다. 예리한 통찰력과 박학다식에 반하여, 그분의 강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2년 전부터는 연대 영문과를 졸업한 문인들의 모임, ‘문향회’가 발족되어 참석하고 있다. 가장 원로이셨던 차범석 선생님이 얼마 전에 운명하셔서, 또 하나의 빈 자리가 내 마음에 생겼다. ‘오늘은 네 차례, 내일은 내 차례’임을 각인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연세 영문과의 추억과 향기 그윽한 사랑의 역사이다. 어디에 내어 놓을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내가 영문학을 전공했고,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생명의 동인(動因)이 되어준 나의 모교 연세대학교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건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교의 이름을 빛내지는 못했지만, 연세 문과대학 영문과 졸업생으로, 미천하나마 말석이라도 차지하고 있음을 눈물겹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