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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다시 “아아든의 숲”으로 (59 임상순)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다시 “아아든의 숲”으로


59 임상순




과거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역사기록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보면, “역사가들 때문에 역사 자체가 뒷전으로 물려나는 일”을 안타까워했던 아날학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Marc Bloch의 걱정을 불과 45∼6년 전의 일을 회상해 보는 이 글의 개연적 오류에 대한 핑계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입학식 끝난 지 불과 달포만에 영문과 신입생 전원이 하루 강의를 “몽땅 빼먹고” 태능에 가서 놀았다가 최이순 여학생처장님을 통하여 백낙준 총장님께 곧바로 보고되어 최재서 학과장님과 조의설 문과대학장님을 몹시 곤혹스럽게 해 드렸는데도 “이 사람들아, 학과장은 알았어야지”가 두 분이 내리신 꾸중의 전부였고, 우리는 전원이 근신처분을 받았다. 또 3학년 때는 KBS라디오 방송 사상 처음으로 삼원방송(KBS, 연세대, 고려대 세 곳에서 동시에 방송)을 통한 대학생 상식퀴즈 연고전, 그리고 MBC라디오 개국기념 대학생 장학퀴즈 연고전(이때 80점 대 25점 차이로 연세가 우승하자 고대생들이 방송국에 난입하여 해당 녹음테이프를 탈취, 훼손했음),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방송을 못하고 다시 MBC측 간청으로 시민회관(본래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이었는데 4·19혁명 후 시민회관으로 개칭한 것으로 기억됨)에서 서울대와의 퀴즈대결 모두에서 영문과 59학번 3학년 이정훈, 최영순과 사학과 2학년생(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이 출전하여 세 번 다 ‘더블 스코어’로 이긴 쾌거는 지금도 가슴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학생과 시민들로 가득한 서대문, 광화문, 경무대(현 청와대)로 가지 못하고 돌아서 중앙청 앞 근처까지 진출하여 민주화 혁명의 횃불을 밝혔던 일이다. 학교로 되돌아 온 학생들에게 백낙준 총장님은 대강당 정문 계단에 올라가 감격의 눈물이 섞인 쉰 목소리로 “연세의 아들딸들아! 너희들이 나아가서 행동으로 말을 다하였거늘 내가 이제 무슨 말을 더하랴! 너희들이 올바른 소신을 가졌고 그 소신을 발표할 용기를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3·1운동 때 여러분의 선배인 김원벽 군의 혼이 살아와 다시 돌아온 줄로 안다.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정신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한 삼일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줄로 안다. 너희들이 연세의 전통을 다시 세웠으니 후배들에게 영원히 교훈이 될 줄로 믿는다.”(1960년 4월 27일 『연세춘추』 1면)고 4·19는 3·1운동의 계승이라는 역사적 의미로서의 자리매김을 유일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해주셨다. 이 후 한 동안은 나라 안이 온통 민주화 시위로 들끓어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신문에 보도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민주화 물결은 학원에도 밀어닥쳐 급기야 우리 영문과에도 ‘학원민주화’와 ‘학과발전’이라는 명분아래,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문학에 주지주의를 도입했고, 영문학 특히 셰익스피어의 대가로 알려졌던 최재서 선생님이 객관적이고도 뚜렷한 그리고 학교를 떠나야만 할 구체적 근거도 없이―개성이 너무 강하여 독선적이고 유아독존적 오만으로 인하여 인간미가 없어 학과에 인화를 가져올 수가 없으므로 학과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연세를 떠나는 가슴 아픈 사태가 일어났다.


최재서 선생님은 일제시대 말기에 글을 통한 친일 행각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해방 후 “이후부터 10년간 붓을 꺾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셰익스피어전집과 Concise Oxford English Dictionary 한 권만을 들고 피난을 가겠다”면서 연구와 강의에만 전념하시다 끝내 ‘육이오 동란’이 발발하여 정말로 평소에 하시던 말씀대로 셰익스피어전집과 COD 한 권만을 가지고 피난지에서도 셰익스피어 연구에 몰두하시었다고 한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서야 사상계 등 잡지에 영문학 관련 글들을 발표하시고, 문학원론, 영문학사, 셰익스피어 예술론 등을 저술하시고, 1959년 5월 9일부터 주옥 같은 글들을 48회에 걸쳐 『연세춘추』의 “인상과 사색” 란에 발표하시었다. 그 가운데에는 As You Like It의 무대 the forest of Arden을 “아아든의 숲”으로 번역하여 “연세숲”에 대입하면서 As You Hike It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이 있다(이 글에서도 선생님을 생각하는 뜻에서 “아아든의 숲”으로 인용한다).


최재서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학원의 민주화와 학과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는지, 과연 맹자의 소위 폭주방벌의 불인불의한 행동이 있었는지, 이 분이 떠나신 후에 학과가 정말로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여 배타적 정신으로 일주하지 아니하고” 화합과 조화의 틀 속에서 학문의 금자탑을 쌓아가는 터전으로 발전하였는지에 대한 성찰을 나누어 봄직하다. 이는 영문과 60년사를 간행하면서 다시는 이 같은 아픔이 없도록, 그리고 “물결마다 앞선 물결과 자리를 바꾸며”(셰익스피어 소네트 60번)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전통의 영속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우리를 길러준 영문과가 개성으로 인한 갈등과 독선으로 개혁의 대상만 있고 발전은 없는 썩은 ‘소택’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희망을 일구어 가는 조화로운 “아아든의 숲”이었음을 단언한다. 우리들을 자택으로 부르시어 따뜻한 점심밥을 차려 주시며 사진을 통해 영미문화를 소개하여 주시고, 심지어 이 60년사 간행위원장을 맡아 수고하는 차수웅 동기와 함께 필자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등을 밀어주셨던 전형국 선생님의 어버이 같은 사랑, 점심시간 후에 몇몇 학생들과 함께 이화대학 후문으로 해서 정문 다리 앞 ‘파리다방’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우리들에게도 이야기하게 하시던 최석규 선생님의 따듯한 보살핌 속에서 넘치는 사랑과 쌓이는 신뢰로 학문과 인생을 키워가던 아아든의 숲 영문과는 분명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보금자리였다.


유럽은 종교전쟁의 참극을 겪고 나서야 관용의 소중함을 공유하게 되었다는데 영문과의 이 아픔에 대한 회상은 관용을 넘어서 더 깊은 신뢰와 사랑과 희망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우리 영문과에 크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낭만적인 개성은 자의적이며, 반란적이며, 반사회적이고, 고독한 생명의 충동이지만 이를 고전적 형식 속에 통제할 때 완전한 예술품이 얻어진다던 최재서 선생님의 평소의 지론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시대적 고민의 해결사로 자처하며 낭만적 열정으로 시대를 뒤집고자 했던 민주, 혁명, 개혁, 진보의 고담준론보다는 소박한 ‘함께 살아가기’가 우리 민족의 마음의 본질이었고 그 정서로부터 자유와 민주가 태어났음을 우리의 의식공간에 자리매김 해야 한다”던 한 역사학도의 말을 곱씹으면서 아팠던 과거의 편린에 대한 인상을 사색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