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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고 白樂濬 박사의 1분 연설 (58 황봉구)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고 白樂濬 박사의 1분 연설


58 황봉구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山川 依舊란 말 옛 시인의 虛辭로고”―아직도 이 나라 땅 끝까지 애창되는 정감 넘치는 가곡이다. 우리 국민치고 모르는 이 없으리라.


이 세상 그 무엇도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사람도 자연도 갖가지 인조물들도 이른바 森羅萬象이란 것이 끝없는 변화 속에 有限하다. ‘延世’ 교명에는 “歲歲年年 無窮하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어느 날 채플시간에 母校의 교명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던 당시 白樂濬 총장의 특강을 새삼 회고케 한다.


‘無窮’이라는 단어 속에 행여 ‘不變’이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지 않나 하는 오해가 있지 않을까 해서 부언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 어쩌다가 기회가 있어 캠퍼스에 들러보면 그 울창하던 ‘연세 숲’(校歌의 한 구절)은 온통 망가져 버리고 대신에 빌딩(교사건물)들이 즐비해 그야말로 ‘빌딩숲’을 이루고 있어서 새삼 놀란다. 오늘의 이 교가의 작사자도 바로 백낙준 박사 자신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연세인 모두가 사랑하는 모교의 놀라운 변화와 발전, 그리고 우리들의 학창시절 추억에 관해서이다. 다시 말해 한두 마디나마 그 학창시절의 추억이란 것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40여 년의 긴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우리 영문과 동창회 덕분에 그 시절의 편린들을 담아 볼 수 있게 됐는데, 한 조각이 못되고 반 조각이면 어떠할고.


필자는 졸업을 한두 달 앞두고 언론계에 입문해서 言論人으로서의 활동을 나름대로 줄기차게 계속 해 왔다. 그러면서 大學에서의 言論학 강의를 틈틈이 해 왔으니 상당기간 두 가지 일을 병행한 셈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다. 지금도 출강을 하고 있고 캠퍼스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변화들을 재미있게 보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다. 강의실 안에서 머리에 노랑물을 들인 별스런 유행에, 모자까지 쓰고 수강하는 학생들을 흔히 본다. 물론 실내 冊床占有도 대다수 남, 여학생들이 짝을 지어 좌석을 차지한다. 남학생, 여학생이 긴 시간 붙어 앉아 있으니 속삭임이 많을 수밖에 없고, 교수는 강의실 분위기를 위해서 쓴 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교사 밖, 校庭에서는 어떤가. 남녀 학생이 어깨동무 내지는 서로가 허리까지 껴안고 다니는가 하면, 함께 어울려 담배까지 맛있게 나눠 핀다. 물론 전체 학생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일부다. 호칭 또한 재미있다. 가장 일상적인 부름이 ‘오빠’이고, ‘XX야’, 야, 너 등등. 그래도 캠퍼스 여기저기서 남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 함박웃음 속에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인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들 시대와의 비교를 위해서 요즈음의 캠퍼스 생활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한 것일 뿐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다. 필자가 20수년 전 美國에 유학할 때 본 그 모습이 한국에서 그대로 이식된 듯해서이다.


그러면 우리들 시대는 어떠했는가? 남녀학생들이 어울려 다니거나 손을 잡는다든가, 단둘이서 장시간 대화하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대화를 한다면 물론 깍듯한 존댓말이고, 그것도 노트나 교재를 빌리는 정도의 지극히 사무적인 수준이었다. 호칭도 물론 ‘XX씨’, ‘미스X’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의실에서는 남학생 그룹과 여학생 그룹이 아예 일정한 거리로 경계선을 두고 나누어져서 무리지어 앉는다. 밖에서도 물론 여학생은 여학생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남학생은 남학생들끼리 어울려 캠퍼스 생활을 하던 것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혹시 여학생이 담배를 피웠다거나 어깨동무라도 했다가는 학급이 술렁거릴 정도로 놀라운 화젯거리가 될 수 있는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무렵의 시대적인 정서로는 동갑내기 여학생들이 같은 동갑내기 남학생들을 어리게 보았던 것 같고, 이 같은 시류에 따라 요즘처럼 캠퍼스 커플도 별로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英文學과 쪽으로 이야기를 좀 좁혀 가보자. 여학생 숫자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회과학 쪽이나 상경계, 이공계, 법정계 또는 신과 의과쪽 등등과 비교해 월등히 많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물론 많은 숫자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時流 내지는 시대상황에 연유해서랄까, 英文學과는 상위권 인기학과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고 남학생들은 물론,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미모까지 겸비한 재원들의 ‘범람 구역’이라고 해도 과히 손색이 없었을 것 같다. 근래에도 어쩌다 동문 모임 같은 것이 있으면 ‘그때 그 사람들’, 知性과 美貌를 다 갖춘 ‘브릴리언트 걸’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궁금해들 하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기는 참으로 아까운 才媛들이었는데 말이다”라고, 그렇다고 오늘의 英文學과가 그 시대만큼 부분적으로 나마 못 미친다는 뜻은 추호도 아니다.


다만 일일이 설명을 다할 수는 없지만 국내외적인 상황 변화가 人文學의 立地를 좁혀놓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자 배경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여학생들도 대학마다에 개설되어 있는 全體 專攻領域으로 對等하게 뛰어들어, 한 치도 손색없이 경쟁하고 있고, 역시 남학생 못지않게 사회진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세계가 그런 추세로 가고 있으니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거세게 몰아치는 국내, 국제 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과감히 대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고, 그 현상이 바로 변화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에서의 적응도를 내다보자면 自然科學, 社會科學 쪽이 앞선다는 계산에서라고 하겠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하자는 지면이 아니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文, 史, 哲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그 영역 속에 不變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言語學에서나 文學에서나 英語英文學은 다른 어문학 영역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깊고 넓은 경지를 개척해 놓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기 원년이후 수 세기를 서양문명이 선도해 왔고, 영어영문학은 그 세계에서도 정점에 둥지를 틀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영어 英文學의 全盛時代, 국내 정상급 교수진용, 모두가 선망하는 선진 학풍, 울창한 숲속의 캠퍼스, 이 모든 것이 최상이었던 여건에서 원 없이 누렸던 학창 생활이 아니었던가 싶다. 다만 국내 정치상황이 불안정해서 4·19, 5·16을 겪어야 했고, 재학 중에 軍服務를 해야만 했던 것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긴 했지만 학보병으로 최전방에서의 근무 경력은 젊은 시절에 거둔 소중한 경험이자 소득이었다고 치부하고 싶다.


4·19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조금은 성격이 다른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졸고를 마감하고자 한다. 4월 19일 당일 아침 전교생이 노천극장에 모여서 질서 정연하게 데모에 돌입했다. 新村 로터리-西小門­光化門­鐘路­孝子동­景武臺(지금의 靑瓦臺) 방향으로 연결코스를 잡고, 孝子동으로 해서 경무대 진입로로 막 들어서려고 할 때쯤 순간적으로 총성이 요란했다. 잇따라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쓰러지고 피투성이 학생들이 연방 들것에 실려 나오는 모습이 혼미스러울 정도로 사방에서 눈에 띄었다. 이때쯤 데모대와 나란히 걸어가던 교수 한 분이 황급히 앞을 가로 막고 서서는 “왔던 길로 해서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했고, 우리는 교수의 지시대로 학교로 돌아와서 노천극장에 다시 모였다. 4월의 긴긴 해가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이때 당시 체육 담당이었던 강필승 교수가 단상에 올라 총장님의 말씀이 있겠다고 하고 내려갔다. 40여 년이 된 오늘에까지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야깃거리는 다음 대목이다.


학생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총장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숨을 죽이고 등단을 기다렸다. 적어도 이 무렵까지는 정권의 붕괴까지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5분쯤 기다렸을까, 거구의 白 總長이 단상에 올라섰고, 올라선 후에도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이 없어 또 한 번 5분 정도 정적이 이어졌다. 드디어 말문이 열렸다. “내 사랑하는 연세 아들, 딸들아, 너희들이 나아가 내 할일 다 했으니 내 이제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총장의 연설은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눈물을 떨구며 단상을 내려갔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난 후였다. 예상보다 빠르게 사태가 급전직하로 치달은 것이다.


당시 白樂濬 총장의 그 1분 연설에 대해서는 그 후 학생들 사이에서도 說往說來가 많았다.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탁월했다던가, 정치적인 쇼맨십이 특출하다든가, 비명에 간 학생들에 대한 비분이 북받쳐서였다든가 등등해서―제일 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고 제2공화국 정부(장면 정권)가 들어설 때 그는 서울에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고, 참의원 의장에 선출됐다.


우리세대가 다니던 延世大學校를 이야기하자니 백낙준 총장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美國인 宣敎師 언더우드 박사가 서울 변두리 신촌 구석에 설립한 미션스쿨이 오늘의 延世大學校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설립자로서의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이 필요 없을 것. 그러나 오늘의 延世가 세기를 훌쩍 뛰어 넘어 1백 30여 년에 이르도록 韓國私學 頂上의 位置를 지키기까지에는 白樂濬 총장의 決斷力이, 通察力이, 推進力이 얼마나 큰 밑거름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면 말이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은 언제 어디 있어도 캠퍼스가 가득 찬 느낌 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많은 동문들이 이구동성 하는 이야기다. 인간 백낙준을 홍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분의 공과를 따지기 위한 지면도 아니다. 필자 개인의 “피상적인 인물관”이라고 해두자.


최근 필자는 교내에서 있었던 일부 학생들의 白 총장 胸像 철거 움직임, 학생회장의 反駁론 등과 관련한 뉴스를 보면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순리이고, 언제까지나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원리이지만 物質的인 변화이든, 精神的인(이데올로기 포함) 變化이든 그것이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延世人 모두가 母校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해 여름 시내 世宗호텔에서 있었던 英文學科 동문회에서 우연히 스승이자 英文學과 선배이신 金東吉 박사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근황을 언급하시는 가운데, “이른 아침 동틀 무렵마다 캠퍼스를 한 바퀴 산책하면서 도서관 앞마당의 白樂濬박사 胸像을 둘러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