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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뻐꾸기 울음 외 (58 안건일)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뻐꾸기 울음 외


58 안건일




뻐꾸기 울음


­백낙준 님을 그리며




4·19 그 날


연세 숲의 뻐꾸기는 모질게도 울었다.




스크럼을 짠 어깨마다


제 딴은 조국의 내일을 메었다고


올 찬 젊음이 파도처럼 설레었다.




태평로에서


탱크를 몰고 나온 군인들과 마주쳤을 때


죽음을 생각했다.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빛깔이 하얀 것이어서


두렵지 않았다.




공포탄과 최루탄과 먼지와 매캐한 연기


배는 고프고, 목은 메고, 볕에 익어 얼굴은 따갑고




심장은 뜨겁게 뛰었으나


몸은 패잔병처럼 지쳐서 돌아온 교정에


용제(庸齊)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 저 뻐꾸기 소리를 들어보세요.


‘복국(復國)’ ‘복국’하고 웁니다.


여러분이 보여 준 나라 사랑에


조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될 것입니다.>




흐느적거리던 봄날의 피로가


복국(復國)을 우는 뻐꾸기 한소리에 씻겨져갔다.




민주화로 향하던 시대의 전환점을


뻐꾸기 소리로 읽어내던 스승은 가고 없는데


뻐꾹 뻐꾹


오늘의 저 소리는 무엇을 우는 걸까






실락원(失樂園) 가는 길


­심인곤 교수를 회고하며




<1>


『실락원(失樂園)』은 17세기 영국의 문호 존 밀턴의 대표작으로 지옥의 왕인 사탄이 군사를 단련시켜 하느님께 도전하는 의지와 고난과 갈등을 흥미롭게 풀어 가는 서사시이다. 그런데 『실락원』이라는 말이나 글자를 접하게 되면 나는 40여 년 전에 영문학을 강의하던 노(老)교수 한 분과 하숙집 아주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며 나만이 아는 추억의 향기에 젖어 하얗게 웃음 짓곤 하는 버릇이 있다.


1960년 봄학기의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실. 심인곤 교수의 『실락원』 강의가 시작되는 첫 시간이다.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노교수의 깡마른 체구에서 어찌 그리도 힘 있는 안광(眼光)이 솟던지, 날카로운 시선으로 학생들을 훑어보고는 ‘천년을 덤덤하게 살아가는 느티나무보다는 열흘을 화려하게 피다지는 장미꽃이 되라’고 일갈(一喝)하신다.


출석부를 펼쳐보고


“김×× 읽어봐요.” 한다.


김 아무개는 떠듬거리며 읽어간다.


“거기까지 해석해 봐요.”


김 아무개는 묵묵부답이다.


“이×× 해석해 봐요.”


이 아무개도 입을 열지 못한다.


밀턴의 17세기 영어는 어휘나 문법이 현대 영어와는 사뭇 달라 학생들이 참고서 없이 읽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으니 첫 시간부터 교실 분위기는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그 당시 영문과 학생들은 제 딴엔 똑똑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락원』 강의의 첫 시간은 적지 않은 파문을 몰고 왔다. 학생들 중에 절반 가량이 여학생이었고 ‘5월의 여왕’ 선발대회에서 1, 2등을 한 미색(美色)이 모두 그 중에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경색(競色)은 물론이고 서로간의 자존심 대결도 만만치 않을 때였다. 그 미인들로부터 은근한 시선을 받고 싶어 했던 남학생들 간의 물밑 경쟁도 어찌 없었겠는가.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첫 시간에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몸부림이 시작되었지만 밀턴의 영어는 시간이 거듭되어도 쉽사리 학생들의 손에 잡혀지지 않고 심 교수의 질책은 늘어만 갔다. 그러자니 『실락원』 강의 시간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교수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아래로 깔고 고개를 드는 자가 없었다. 자유분방해야 할 대학생들의 즐거움이 사라져버린 교실, 그곳이 바로 『실락원』의 축소판이 아니었던가 한다.






<2>


그 무렵 나는 여가가 있을 때면 자주 종로 5가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거리에 즐비한 고서(古書)가게를 기웃거렸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책이라도 발견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을 무척이나 행복해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느 가게에서 일본어판 『실락원』을 발견하였다. 매섭게 쏘아보는 심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책을 뽑아들었다. 일본 년호 大正 元年에 발간된 세계문학전집 중의 한 권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출판업계 동정으로는 동아출판사와 을유문화사에서 경쟁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고 있긴 했으나 밀턴의 『실락원』에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았던 모양인데 일본에서는 大正 元年에 이미 발간되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의 년호 大正 元年을 서기로 환산해보면 1912년이니 그 당시 계산으로 이미 48년 전에 일본이 이룩해 놓은 『실락원』의 번역 사업을 한국은 아직도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 앞에서 멀리 앞서가는 일본의 뒷모습이 몹시도 커 보였다.


그 책을 사들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장품 가게에 들러 학생의 처지로서는 거금을 주고 화장품 하나를 샀으니 그것은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바치고자 하는 뇌물이었다.


안집의 동정을 살피다가 적당한 때를 봐서 하숙집 안방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예고 없이 방으로 들어서는 하숙생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인 내외 앞에 낡은 책 한 권과 포장된 화장품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17세기 영어를 공부하는 데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한글로 번역된 책도 없어 부득이 일본어판 책을 구했다는 것과 틈나는 대로 조금씩만 번역해주면 공부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부탁을 드렸다.


나로서는 아주머니가 결코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 여학교를 졸업한 인테리 여성임을 아주머니 스스로가 평소에 은근히 자랑해 왔을 뿐만 아니라 자주 일본어 책으로 독서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완강하던 아주머니의 거절 의사였지만 반복되는 나의 부탁에 조금씩 누그러지더니 마침내는 허락으로 돌아섰다. 오히려 대학생들에게 하숙 밥을 지어주는 육체적 노동자로서의 탈을 벗고 학문적 동반자가 된 듯한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친구들이 하나 같이 긴장하고 싫어하는 『실락원』 수업시간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모두들 자기 이름이 불려질까 두려워서 움츠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은 교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만만해 했었고, 어쩌다 내 이름이 불려지고 교수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때는 나의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나를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는 여학생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학생들 쪽으로는 곁눈질을 해보았던 적도 몇 번은 있었으리라 싶다. 스스로가 작은 영웅이 되어 행복해 했던 학창시절의 풋고추 같은 추억들을 돌이켜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바로 그해 가을 을유문화사에서 밀턴의 『실락원』을 세계문학전집 중의 하나로 번역 출간하였으니 『실락원』 원서강독에 얽힌 학생들의 애환도 에피소드도 더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3>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살아왔던 지난 세월의 억압받고 찬탈 당한 아픈 상처는 후학들에게 일본에 대한 원천적 적개심을 전세(傳世)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견해와는 관계없이 오래 전에 17세기 영문학의 거봉 『실락원』에 일본은 그들의 국기를 꽂아 놓고 멀리 앞서 가버렸다. 그 뒤를 힘겹게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면서 이를 악물었던 영문학도로서의 그 시절의 싱그러움이 지금도 입에 고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느 한 개인이나 국가의 흥망과 성쇠는 결코 고정된 값은 아닐 게다. 스스로의 후진성을 깨닫는 순간 그 후진성은 선진으로 가는 에너지가 될 것이니까. 참고서 없는 17세기 영어를 강의하면서 질책과 독려에 열을 쏟았던 노교수의 고집이 아니었더라면 학생들은 번역본 없는 우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본에게 48년이나 뒤쳐져 있는 우리 번역문학의 현주소를 확인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망 로랑의 말대로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회가 현대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뇌리에 유전(流轉)하고 있는 갈등과 모순이 곧 낙원을 잃고 사는 우리들 모습의 실체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어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모습일 것이다.


천년을 사는 느티나무처럼 안일(安逸)에 정거하지 말고 열흘을 피고 지는 장미의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우라고 했던 노교수의 해맑은 절규가 오늘따라 뜨겁게 다가와 맥 빠진 나를 담근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