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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나의 연세 추억 (58 손 한)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나의 연세 추억


58 손 한




내가 연세 교정에 첫 발을 디뎠던 때가 1957년 초겨울이었으니 대략 50년을 연세와 함께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세월이 다져져서 그런지 그때나 지금이나 잠시도 연세를 잊은 일이 없다. 특히 영문과에 대한 애착은 유난히 강한 것이어서, 강의와 학생지도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대학원 진학생은 얼마나 되는지, 학부 신입생 지원율이 얼마나 되며 능력 있는 신입생은 얼마나 입학했는지, 졸업생들은 어떤 분야로 진출하여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매년 입학이나 졸업 때가 되면 이 모두가 궁금해지곤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도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연세, 그리고 영문과에 크고 작은 좋은 일과 좋지 못한 일들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좋은 일들이야 물론 여러 번 되풀이될수록 좋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다시 생겨서야 되겠는가. 그런 뜻에서 그간 우리 영문과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래서 학과를 뒷걸음치게 했던 기억하기조차 싫은 두 가지 일을 여러 동문들 또 후배들과 함께 되새김질해 보고 싶다.


나라 한 번 바로 잡아보자는 의로운 마음들이 한데 어울려 대학문들을 박차고 나왔던 일이 그 하나다. 연대생들은 당시의 교수식당, 그러니까 옛 학생식당 옆 건물에 가방을 맡겨 놓은 채 백양로를 뛰쳐나가 경무대(청와대)를 향했다. 서대문을 지나려다 이기붕 씨 집 앞을 꽉 메운 학생들 때문에 지름길이 막힌 우리는 대신 우회에 우회를 거듭하며 겨우 중앙청에 도착했으나, 결국 최종 목표 진출에는 실패했다.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 지 한참 되었고, 현 종합청사 근처의 경찰 무기고 쪽에서도 총탄이 날아왔다. 당시 함께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던 동료들과 선배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결정적인 순간이면 늘 몸 챙기는 사람은 그때도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날 늦은 오후, 버스가 서대문까지만 운행하는 통에 도보로 귀가하던 도중 이기붕 씨 집 앞에서 무장경찰관에 연행되어, 10여 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면서 서대문서에 끌려갔다. 돌이켜보건대 그때 우리들은 순수했다. 적어도 민주화 투쟁 운운으로 정치적 야심을 채우는 오늘의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에 비해서 말이다.


새삼스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격동의 시대상황으로 인해 학과가 두 갈래로 쪼개져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경하며 따르던 여러 선배 선생님들이 이념적인 충돌에 기인하는 이런저런 연유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며 학문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일깨워주신 선학들이었다. 그래서 늘 가까이 하려고 그분들의 하숙방도 찾았고 또 술잔도 함께 기울이곤 했었다. 그러는 가운데 영문과의 끈끈한 정도 서로 느끼며 나누었었다. 그래서 스승이란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후 그분들과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유감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소회를 떠나, 우리가 누렸던 바와 같은 그런 인간관계가 우리 뒤를 이어오는 후학들 앞에서 끊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스산하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교단진출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60학번 이후 10년간 영문과 출신 교수는 그 전에 비해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전에는 30명 입학정원에 적어도 4∼5명이 여러 대학에 진출해 왔으니, 단순논리로만 계산한다면 10년간 우리 학과는 40∼50명의 유능한 교수를 잃어버린 셈이다. 학교를 떠나 사회의 다방면에서 제 몫을 다하는 졸업생들에게도 아쉬운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대학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알찬 기회를 잃은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정도는 잊어 넘길 만하다. 역사적 상황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잊기 힘든 것이 있으니, 학부제에 관련된 일이다. 이 제도의 옹호론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여 자기 나름의 생각을 미처 정립하지 못한 상태로 대학에서 택한 전공을 적성에 맞든 안 맞든 졸업 때까지 붙들고 가야 하는 종전의 제도는 분명히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아니 실은 과거에도 이미 실패하여 폐기한 바 있는 제도인 학부제를 급하게 밀어붙이기 전에 종전의 제도에 대한 개선책을 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만병통치약 같이 여겨지던 학부제가 요즘 와서 어찌 운영되고 있는지, 당시의 옹호론자들에게 정말이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내 생각으로는 고개도 못 들고 다녀야 할 형편인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반대이니 인간사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들의 특별한 사회적응 능력과 수완에 놀랄 뿐이다.


아무튼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사건은 나라의 격동상황이 교수사회를 어지럽힌 경우이고, 두 번째 사건은 정부의 아집과 독선이 학생사회를 혼돈에 빠뜨린 경우라 할 것이다. 어느 경우건 새우 등만 터진 셈이다.


나로서는 학부제 실시여부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전에 기존 학제의 문제점들에 대한 나 나름의 개선책을 제안하고 있었다. 기존 학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자유를 대폭 허용하는 방법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학부제가 가져올 혼란과 충격을 피하면서 학부제의 기본 정신에 합일치하는 그런 방법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풀어서 뽑은 뒤에 다시 묶어서 졸업시키는 것이 학부제의 취지라면, 묶어서 뽑은 뒤 풀어서 졸업시키자는 것이 나의 제안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문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1∼2년을 지내는 동안 다음 두 트랙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처음 1, 2학년 동안은 영문과 기초 과목들을 우선 택하고 3, 4학년 상급반에 가서는 영문과 과목은 최소 1∼2개만 택할 수 있는 트랙. 또 한편으로는 처음 1, 2학년 때는 기초과목을 선택하되 3, 4학년 상급반에 가서는 영문과 전공과목을 정해진 대로 수강하는 트랙. 이 두 트랙 중 어느 한 편을 택하든 학생들은 영문과에서 필요로 하는 과목을 제대로 택하게 되어 영문과 졸업생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학부제의 급격한 실시가 초래할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학생들의 소속감 부족도 해소하고 초급학년 시절 방황하며 허비할 시간도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때마침 나는 안식년으로 출국할 상황이어서, 학부제에 대한 공식적인 결정을 1년간 유보할 것을 교수회에서 몇 차례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바 있다. 그런데 기한이 지나 귀국해 보니 이미 학부제 실시를 학교 차원에서 결정해 놓았다고 했다. 기막힌 일이었다. 어째서 이처럼 급하게 밀어붙이는가. 그때부터 학과회의를 소집하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면서 학교와 학생들 모두에게 보다 도움이 되는 합리적인 방향을 찾느라 애썼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느새 ‘갱리더’(gang leader)가 되어버렸고,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 왔다. 앞으로 학교에서 한 자리 하고 싶은 것이냐, 총장이라도 되려는 것이냐 등등, 참으로 혐오스런 입방아였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나의 취지를 설득하려고 당시(김병수) 총장을 3번 만나는 등, 나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 그러다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얘기해 본들 소용이 없겠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결국 허사였다. 아니 환멸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간 고민 속에 계속 미뤄오던 미국의 한 대학교수 자리에 때마침 급변화가 생겼다. 모든 것을 최종 결정했으니 올 의향이 정말 있으면 속히 오라는 재촉을 받은 것이다. 최후의 순간마다 나를 붙잡곤 하던 미련들이 이제는 환멸감 앞에서 다 소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결심을 굳혔다. 이것이 내가 정년을 앞둔 채 자진하여 연세대를 떠나게 된 사연의 하나다.


나의 사랑하는 모교를 떠난 이유에 대해 지금 와서 무슨 말들을 더 하랴. 영문과를 위해 행한 크고 작은 일들을 여기에 다 열거할 수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근무하던 시기에 함께 지내던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곁에서 지켜보았던 학생들이 새삼 그립다. 이 모든 분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들로부터 얻었던 도움이 고맙고, 그래서 그 결실의 모양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간의 힘겨운 일들을 혼자서 할 수는 없었음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기억들이 나에게는 지금도 그립고 아쉬운 추억으로, 아련하면서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