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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吳華燮 선생님과 奉斗玩과 나 (56 안종익)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吳華燮 선생님과 奉斗玩과 나

56 안종익

 

그때 우리 반 친구들은 오화섭(吳華燮) 선생님을 무척 좋아하고 존경하며 따랐다(그 시절 우리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타계하신 지 어언 4반세기가 넘었지만 나의 오 선생님 기억은 생생하다. 선생님은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아버지 같은 스승이셨다. 오 선생님에게서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가운데 Hamlet, Macbeth, Othello와 찰스 디킨스의 소설 A Tale of Two Cities를 배웠다. 강의실은 주로 학관 208호였는데 King Lear가 빠진 것은 아쉽다.

오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 선생님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무대 환경을 설명하시며 마치 당신이 배우인 양 대사와 동작을 온몸으로 ‘연기’하셨다. “셰익스피어 대사는 리듬과 박자가 있어. 아이앰빅 펜태미터(iambic pentameter)란 말야.” 그리고는 “따단 따단 따…”를 반복하시며 발을 구르셨다. 디킨스 소설의 닥터 마네트가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구두를 짓고 있는 대목에선 가엾은 노인을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장면을 떠올리셨다. 선생님은 영국식 발음을 하셨으므로 더욱 멋졌다.

선생님 강의는 우리를 셰익스피어 무대 속에, 디킨스 소설 속에 빠져들게 했고 그만큼 우리는 영문학(英文學)과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내가 햄릿의 독백 몇 구절을 외울 수 있는 것, 그래서 아직도 술자리 모임에서 기회가 주어지면 여봐라는 듯 읊어대는 것은 순전히 선생님 덕이다. 세월 탓에 군데군데 잊은 대목이 많긴 하나, 지금도 즐겨 외우는 햄릿 대사는 첫 독백 “O, that this too too solid flesh would melt ...”와 유명한 “To be or not to be ...”다.

몇 해 전, 주한 미국대사관 대변인으로 있던 제리 매클로글린 공보관(현 공보원장)과 나는 둘이 영문학 전공한 것을 알게 되면서 십년지기처럼 친해졌다. 때로는 술자리에서 시합이라도 하듯 햄릿 독백을 암송했다. 그는 번번이 나보고 상수라며 중도하차 했다. 암송 분량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앰빅 펜태미터에 영국식 발음까지 흉내낸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한 수 위였다. 내가 누군가, 오화섭 선생님 제자 아닌가.

오 선생님은 유머와 위트가 매우 뛰어나셨다. 어느 땐가는 강의실에 들어오시자마자 느닷없이 “나, 오화변이 됐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웃지도 않으셨다. 심각하시지도 않았다. 오화변? 어리둥절해 하던 우리는 사연을 듣고서야 박장대소했다. 선생님 설명은 이러했다.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오화변 귀하’라 적혀 있지 뭔가. 졸지에 오화변이 될 수밖에.”

섭(燮)을 변(變)으로 잘못 쓴 것을 가지고 그렇게 얘기하신 것이었다. 이 ‘사건’ 후 우리는 선생님을 아예 ‘오화변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선생님을 모시고 몇 몇 친구가 맥주 집에 갔을 때, 누군가가 짓궂게도 면전에서 그렇게 불렀는데 선생님은 “왜 그러나?”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시어 자리를 더 흥겹게 만드셨다. 참으로 선생님은 유머를 좋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선생님의 세 번째 수필집이던가, 『거기 수많은 길이』에는 ‘오초변’이 나온다. 한 신문배달 소년이 무슨 연유로 오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함자를 통째로 잘못 써서 오 초변(草變)이 됐다는 얘기다. 소년의 한문 실력을 탓할 수 없는 일이니 선생님의 획이 많은 함자나 탓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재다능하시고 정열이 남치셨으며 자존심 또한 대단하셨던 오 선생님은 우리가 감히 도전 못할 권위의 스승이시기도 했다. 연극평론가, 때로는 연출가, 음악 평론가에다 번역가, 수필가, 그리고 플루트와 클라리넷 주자… 그래서 생긴 것이 ‘오소리’란 별명이다. 우리 반 안병준(安丙俊)이 지은 것 같은데, 동물 이름이 아니다. 원래 ‘오소리티’(authority)였던 것이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석 자로 줄었고 거기에 ‘오’가 ‘吳’와 통하는 절묘한 것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별명, 아니 애칭은 그리 널리 쓰이지 않았으며 선생님도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오 선생님은 가끔 감상적이셨다. 강의실에서 샹송(‘로망스’)을 부르신 적이 두 번 있었는데, 우연이었을까, 그때마다 비가 왔다. 손에 책을 드신 채,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시며 노래하시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윗반 선배들로부터 들은 대로 우리가 열렬히 청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생님도 은근히 부르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청을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으니까. 어쩌면 우리를 유도하셨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감상적이 되시는 것은 큰 따님 혜령 때문일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선생님은 따님 얘기부터 꺼내신 다음 강의를 시작하신 적이 많았다. 어느 날엔 미소 지으시며 “어제 우리 딸이 일어섰네.” 어느 날엔 미간을 찌푸리시며 “다시 마찬가지야.” 그런 희비 교차의 날들이 한동안 계속됐다. 선생님은 로망스를 부르시며 우울을 떨쳐버리려 하셨는지 모른다. 이화여고 2학년이던 혜령은 두 다리가 아파 걷지를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후에 극작가로 여류명사가 된 오혜령은 벌써 그때 우리 반에서 유명 인사였다.

휴학하고 집에 누워 있는 그 여고생을 봉두완(奉斗玩)과 나는 가끔 보았다. 우리 둘은 학교 뒤 산 너머에 있는 오 선생님의 그 ‘아주 작은 저택’을 자주 방문했었다. 도배(塗褙)일을 도운다고 갔고, 문안드린다고 갔다. 선생님께 잘 보이려는 속셈이었지, 따님을 보러간 것이 결코 아님은 분명하다. 훗날, 치유된 오혜령이 동급생이 된 남동생 오세철(연대 상경대 교수 지냄)과 61년 각각 남녀수석으로 연세에 입학하리라는 것을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영문과 학생 봉두완도 이미 전교에서 유명 인사였다. 몇 년을 묵어 좀 늙은 축에 들었던 봉두완은 우리 반뿐만 아니라 학년과 과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봉 형’으로 불리며 대접을 받았다. 여기저기 포진해 있는 경복고(景福高) 후배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모두들 따라했던 것이다. ‘좀 늙은 축’이라 한 것은 그때 제대군인으로 복학한 50년 입학 곽승국(郭昇國), 심창식(沈昌植) 같은 진짜 늙은 선배들이 주로 우리와 함께 공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봉두완을 봉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나도 조금 묵었던 터라 ‘안 형’이라 부르는 후배가 더러 있었으나 그 때문이 아니고, 우리 둘은 입학 후 첫 만남부터 의기투합해 졸업할 때까지 붙어 다니다시피 했으므로 호칭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하학 후에도 꽤나 어울려 다녔다. 광화문의 다방, 관철동의 맥주 집, 마포의 봉두완 집이 주 무대였다. 그러는 사이 봉두완의 경복친구가 내 친구가 됐고, 나를 경복 출신으로 오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방에서는 폴 앙카와 패티 페이지 노래를 즐겨 들었다. 맥주 집에서는 셰익스피어 희곡, 디킨스 소설, 이봉국 선생님에게서 배운 찰스 램(Charles Lamb)의 수필을 논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들먹거렸다. 봉두완 집에서는 그의 방이었던 아랫방에서 늦도록 떠들다가 부친으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신 것을 보면 필경 그 날 우리 몸속에 알콜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부친은 아들보다 나를 더 좋아하셨다는 것을 봉두완은 알 것이다.

저명인사 봉두완 얘기를 더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봉두완의 타고난 성품 두 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 남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성격, 그리고 메모하는 습관이다. 내게 “돈 좀 꿔 달라”고 할 때가 있었는데, 돈을 받자마자 “밥 먹으러 가자”며 다른 친구들까지 데리고 갔다. 봉두완은 돈을 꿔서라도 밥을 사고 싶어 했다. 꾼 돈은 다음 날 갚았다. 또 “내 단점이 뭐야?”라든가 “어떡하면 좋겠어?”라고 내게 묻길 잘 했는데, 대답을 해주면 수첩을 꺼내 적었다.

봉두완은 항상 수첩을 지니고 다녔다. 지금도 같다. 겉이 까만 가죽으로 된 두툼한 수첩. 그때 것이나 지금 것이나 모양이 비슷하다. 그리고 부지런히 적는 것도 똑같다. 하여간 적기를 좋아한다. 칠순을 한참 넘긴 지금도 천주교회에서 나환자촌에서, 북한 동포 돕기와 바른 생활 운동단체 등에서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하는 봉사활동, 그리고 벌써 열권이나 낸 책… 그런 봉두완이다.

아무튼, 그때 우리는 연세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들 가운데서 우리 영문과가 1등임을 굳게 믿었다. 누가 뭐라 하면 “저 담장이넝쿨을 보라”며 영문과 강의실이 있는 학관을 가리켰다. ‘연세의 진리와 자유’ 외에 ‘영문과의 권위와 자부’의 상징이 아니냐고 했다. 그 생각 지금도 변함없다. 우리가 공부하던 학관이 학교본부로 바뀌었고 우리의 영문과가 황량한 시멘트 건물로 내몰린 지 오래지만, 나는 지금 푸른 방패 배지 가슴에 달고 겁 없이 기고만장하던 그때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