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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연대 영문과, 잘났다! (56 봉두완) (2008.05.03)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연대 영문과, 잘났다!


56 봉두완




내가 그 유명하다는 연세대 영문과를 어떡하다 나왔는지는 몰라도 이제 죽을 나이가 다 되어서까지 이렇게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재수 삼수 끝에 겨우 입학하고는 또 4년 줄곧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다녔기에 책이라고는 읽은 것도 별로 없고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연세대는 채플시간 빼먹으면 하늘에서 별 떨어질 만큼 큰일 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고등학교처럼 꼭 출석을 불렀다. 하루는 국문학과 박영준(朴榮濬) 교수님의 小說論 시간에 출석을 부르는데, “봉두완”하니까 내 친구 안종익 군(조선일보 계열회사 사장 지냄)이 “네”하고 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힐끗 쳐다보면서, “야, 임마, 나 봉두완이 목소리 알어!” 하는 바람에 교실 안이 폭소클럽이 되고 말았다. 물론 출석이었다.


3학년 어느 날 영문학과 과장 최재서 선생이 불러서 갔다.


“부르셨습니까?”


“응, 그래, 봉군!”


“네”


“학교에서 요청하는 건데 거 뭐 미군들이 USO 초청으로 우리대학에 온대… 노천강당에 가서 좀 수고해 줘, 안내도 하고…”


10여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온 미군병사들은 캠퍼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다과도 들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연세대 넘버원”하면서 안내하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그날따라 이봉국 교수님의 영문수필 중간시험 날이었는데 그걸 깜빡 잊고 있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려가니까 이미 시험이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헐레벌떡 교실 뒷좌석에 앉자마자 잘 아는 여학생한테 눈짓으로 시험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고 물었다. 그 여학생은 오히려 내가 훔쳐볼까봐 왼팔로 시험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런 소견머리 없는 여자가 나중에 보니 시집 하나는 잘 갔다. 하는 수 없이 안종익 군 옆으로 가서 시험지를 빼앗다시피 하며 열심히 베끼기 시작했다. 앞뒤를 오가던 이봉국 교수는 내 옆에 와서 툭 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봐, 남의 것 다보고 쓰면 어떻게. 안돼, 그러지 마” 하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님을 손으로 밀다시피 하면서, “가만 좀 계세요. 거의 다 썼어요.” 했다. 둘레에 있던 여학생들은 낄낄대며 웃음을 참느라고 시험지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었다. 영문과 선배인 교수님은 짜증스럽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 전 주일에 우리는 신촌 로터리에 나가서 가짜 막걸리에 염통 허파 숯불구이로 친교를 다진 사이였다. 그 덕에 베껴 쓴 나는 92점, 안종익은 85점을 받았다.


자조장학회에서 교재등사 타자 찍어 아르바이트한 급료가 나오는 날이면 언제나 늦깎이 학생이나 강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으레 선술집에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나는 그때부터 한턱내기를 좋아했다. 2학년말 지금의 코리아 헤럴드 신문주최 전국영어웅변대회에서 내가 우승하여 이승만 대통령상을 탔다. 그때 심사위원은 백낙준 총장, 호레이스 언더우드 교수 등 다섯 분이었는데 모두 나하고 이래저래 관계된 분들이었으니 불문가지의 결과였다. 노천강당에 가득 모인 학생들 앞에서 내가 타온 트로피를 모교에 증정하는 순서가 있었다. 백낙준 총장은 그 호탕한 목소리로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우리 연희의 총아 봉두완 군이 이렇게 모교를 빛내고…” 나는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고 좀 멀리서 트로피를 올려드리고 나서 꾸벅 인사하고는 금방 무대에서 내려왔다. 왜냐하면 조금 전까지 몇몇 늦깎이들과 담배를 신나게 피우다가 왔기 때문에 담배 냄새가 날까봐 두려웠다. 바로 며칠 전 문과대학빌딩(지금의 본관) 앞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몇몇이 담배를 꼬나물고 섰는데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 저기 호랑이 온다. 총장이다 임마!”


“이크…”


나는 마침 1층 창가에 서 있었기에 창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다이빙하는 노루처럼 뛰어들었다. 백낙준 총장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1층 위로 달려갔다. “휴우!” 잡히면 정학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때 착한 호랑이 손에 잡힌 토끼는 한 마리도 없었다. 호랑이는 그저 으르렁댔을 뿐이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나는 늦깎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웅변대회 입상기념 파티를 열었다. 참가인원도 7, 8명이나 되고 중국술 “백알”과 요리를 마구시키는 바람에 예산이 초과되어 하는 수 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귀한 손목시계를 맡기고 말았다. 그 때문에 동네방네 아들 자랑하던 아버지는 근 한 달 동안 그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별명이 ‘샤일록’이었다. 6·25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가정을 이끌어 가시며 사내아이 다섯을 키우고 교육시키느라 뼈가 빠지는 것이었다. 지방에 내려가 관청에서 비서 겸 통역을 해주며 학자금을 벌던 나는 학기 등록 때가 되면 우선 아버지께 미리 등록을 부탁드리곤 했다. 등록금은 7만 5천원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7만 원만 갚아 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5천원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을 탐독한 이유와는 다른 이유로 내 동생들은 아버지를 ‘샤일록’이라고 불렀다. 저녁 늦게 귀가하면서 우리는 “야, 샤일록 들어오셨냐?” 했다.


아르바이트로 그나마 수입원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기 때문에 여학생들과 만나 빵집에 가거나 다방으로 가는 경우 주로 내가 감오노릇을 했다. 내 고교 동창(노양환 우신사 사장)이 1957년에 정외과를 졸업하기 전 연세춘추 편집국장이었는데 그것에 자극을 받아 나도 3학년 2학기부터 연세춘추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법인에 있는 최기준, 유경환(시인), 이동건(부산방직회장)들을 따라 다니며 신문 만드는 법도 배우고 잡비도 몇 푼 얻어 쓰는 재미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는데 언제나 여학생 대책비가 엄청 모자라 어린동생 학자금까지 갖다 쓰곤 했다.


영문과 우리 반 46명 가운데 여학생이 12명쯤 됐는데 성적순은 항상 1등만 이상섭 군(영문과 교수 은퇴)이 차지하고 2, 3, 4, 5, 6등은 모두 여학생 차지였다. 안종익 군처럼 착실한 친구가 때때로 여학생과 경합했지만 나처럼 학기말 시험날짜도 잘 모르고 돌아가던 멍청이는 한 번도 성적이 30등 안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방학이 오고 여학생들이 시골로 내려가면 나는 언제나 빠짐없이 편지를 썼다. 가능하면 어데서 얻어들은 미사여구를 인용해 가며 영어로 썼다. 답장이 오기도 하고 모른 채 대꾸도 안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영문과의 경우는 아니지만 한 번은 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여학생의 하숙집에 갔다가 기겁했다. 여학생 둘이서 하숙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 편지가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가슴이 뛰고 당황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관심표명 한 게 잘못이었다. 두 여학생은 말이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 후부터 나는 여학생 한 사람만 따라 다니며 사귀기로 마음먹었다.


안종익 군과 나는 최재서 학과장 댁에 모친상이 있을 때 밤샘 뒤치다꺼리를 해 드렸고 우리가 좋아했던 오화섭 교수님의 새집에 가서는 둘이서 벽지도 바르고 청소도 해 드리면서 때때로 맥주 한 잔 얻어먹기도 했다. 한번은 아르바이트 한 끝에 비가 쏟아지는 날 늦잠을 자다보니 최재서 선생 과목 시험에 늦고 말았다. 보충시험을 쳤는데 무슨 내용인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시험지에 아는 대로 대충 그려 넣었더니 33점을 주셨다. 나는 속으로 언짢았다. “아니 영문과에서 60점이면 몰라도 33점이 뭐야… 밤샘 심부름을 다 했는데 본전치기 장사도 안 되네…” 그에 비해 오화섭 교수는 좀 여유가 있었고 융통성이 있었다. 교수님의 사랑스런 따님은 그때 신병으로 이화여고를 한 1년 쉬고 있었는데 우리들만 가면 가족처럼 반기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안종익과 나는 졸업 전에 운좋게도 신문사 견습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언론인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시험이라는 시험에는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다가 그 어려운 견습기자 시험에는 붙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올챙이기자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서 우리가 좋아했던 오화섭 선생 내외분과 맥주홀로 가서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지냈다. 한번은 선생님을 댁에다 모셔다 드린다고 신촌까지 온 김에 한 잔 더 먹는 바람에 우리는 그 집 마루바닥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은 나중에 그 집 따님과 함께 연극반에서 활동했는데 인생은 연극과 같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서 갓 돌아온 젊은 조교수와 눈이 맞아 사랑의 그림자만 남기고 떠나가고 말았다. 한번은 결사항쟁의 굳은 마음을 품고 그 사랑의 정적 앞에 섰다. “어떻게 교수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사랑하는 것은 느끼는 것”이라며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자유라는 식으로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사랑에 빠지는 쪽이 더 위험하다”는 말을 상기시키면서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 후부터 한 잔 마시기만 하면 패배자의 연가와 같은 노래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곤 했다. “사랑의 기쁨(plaisir d’amor)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실 나는 그동안 그 여학생의 환심을 사려고 꽤나 애썼다. 한번은 본관 4층 강당에서 국문과 학생의 시 발표회가 있다기에 가봤더니 여학생들이 황홀한 시의 세계에 온통 혼이 나가 있었다. 약간의 질투심과 당혹감을 이기기 힘들어 그날 나도 당장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적인 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시인(Poet)과 연인(Lover) 그리고 미치광이(Lunatic)는 똑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박두진 교수님한테서 시를 배우기로 했다. 구구절절 있는 것 없는 것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편의 시를 써서 제출했지만 그때마다 동시대의 저명한 시인인 교수님은 결국 인자한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국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봉군, 자네는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편이 났겠어…” 내가 시를 잘 썼다 못썼다는 한 마디도 안하셨는데 이제 와서야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있으니 얼마나 바보였던가? “나는 바보, 나는 바보, 나는 바보야!”


내가 그동안 여학생에게 써 보냈던 시를 정말 플라톤이나 T. S 엘리엇, 바이론이나 김남조 시인이 봤더라면 분명히 모두들 뒤로 넘어졌으리라. 그래도 그때 백양로를 걸어 다니면서 정서적으로 느끼고 배운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하다못해 영문과를 다녔기 망정이지 자칫 셰익스피어하고 웬수 될 뻔했다. 최재서 선생은 일제시대에 영문학을 한 분이지만 셰익스피어를 음미할 때는 시인과 같았다. 언제나 강단에 앉아 근엄한 자세로 시를 읽어가는 노교수, 때때로 혼자 헛헛헛 하며 웃고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덤비는 교수님이 어쩌면 살짝 간 것 같기도 했다.


Hamlet: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것을 최 교수님은 양념을 쳐가며 맛있게 읊으면서 혼자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지만 내가 왜 그때 부화뇌동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단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살아 부지 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는 식으로 맛있게 읊었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를 맞고 참는 것이 장한 정신이냐, 아니면 몰려드는 환란을 두 손으로 막아 항거하여 이를 없이함이 장한 정신이냐…”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 And by opposing end them?) 이렇게도 좋은 대사를, 그렇게도 훌륭한 스승들 밑에서 외우고 쓰고 읊을 수 있었던 젊은 날들을 지금 와서 무슨 말로 어떻게 노래 부르면 좋을까?


사실 나는 그때 하마터면 의과대학에 갈 뻔했다. 마침 그해 따라 노천강당에서 입학시험을 치뤘는데 수학문제 도움을 약속했던 친구가 십리 밖에 가서 앉았고 달달 외우다시피한 수학 예상문제 20개가 하나도 안 나오는 바람에 그때 나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의사 노릇하는 친구들은 나만 보면 위로의 말을 잊지 않는다. “야, 두완아, 너 그때 세브란스 시험 떨어지길 잘했어…” 그렇다. 떨어지길 잘했다. 아니면 연대 영문과를 못 다닐 뻔했잖아. 이놈들아!


우리 연세대 영문과!!


대한민국 유일무이의 아름다운 추억의 배움터, 사랑이 넘치고 정서가 흐르는 캠퍼스의 내음이 서려있는 그곳. 그래서 나는 지금도 누굴 만나 인사를 나눌 때는 꼭 “저 연대 영문과 나왔습니다” 한다. 정외과 나온 내 친구 노양환, 그럴 때마다 정말 그 꼴 못 보겠다며 한 마디.


“그래 잘났다 잘 났어, 연대 영문과 좋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