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뉴 닫기
 
Community

커뮤니티

"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영문학부와 대학원의 추억 (54 최승규) (2008.05.02)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영문학부와 대학원의 추억


54 최승규




나는 1954년 영문과 2학년으로 전과시험을 보고 신학과에서 편입했다. 편입 동기생으로는 최익환, 유명종, 김동환 동문이 기억난다. 김 동문은 영문과에 한 학기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갔다. 1960년 내가 Chapel Hill에 있는 N. C. 대학원 영문과 갔을 때 그곳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김 동문은 김자경 교수의 이대 수제자로서 줄리아드에서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학교를 같이 다닌 장상애 씨와 결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두 분의 친절에 감사드린다.


연세대 영문과 동급생은 20여 명 되었는데 여학생들은 전교에서 우리 반이 단연 제일 많았고 그것도 다들 수재에다 미인들이어서 다른 과의 남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강숙자, 박순호, 조동현, 최선자 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간 최은희 동문들이었다. 동급생이면서도 우리 남녀학생들은 4년 내내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대화를 못해 본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요즘의 영문과 남녀 후배들이 정답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영문과를 다시 한 번 다니고 싶을 정도로 부럽기까지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lost generation이었다.


한번은 여학생 기숙사 알로하에서 저녁 파티에 남학생 파트너를 한 사람씩 데려오라고 해서 최선자 동문께서 나에게 초청장을 준 일이 있었다. 아마 영문과 여학생들끼리 미리 상의하고 같은 종씨인 내가 오해받지 않기에 무난하다고 선정한 것 같았다.


남자 동급생들 중에는 재주가 많은 동문들이 여럿 있었다. 미국 가서 목사가 된 주장돈 동문은 채플 시간에 특별 찬양을 하던 연세 남성사중창단의 당당한 명가수였다. 지금도 루스(Ruth) 채플에서 성가대로 봉사한다.


연극계에서 명성을 날리는 김우옥 동문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이라는 Rigoletto를 이탈리아 원어로 부르던 영문과의 명창이었다. 나도 남녀 혼성합창 연습을 하면 이대의 고운 젊은 처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좋아서 박태준 박사가 지휘하던 메시아 합창단에 나가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대생과는 연애 한번 못하고 3학년 때 어느 서울음대생과 데이트하려고 멀리 동숭동까지 가서 임원식 교수님의 레코드 감상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재학생 시절 소설가가 된 최상규 동문이 있다. 그는 일찍 문단에 등단했고 술도 좋아했고 여자친구 관계도 복잡한 수재였다. 그는 김태성 동문, 김종갑 동문과 특별히 가까웠다. 나는 장연호 동문과 노고산동 지금의 홍대 근처에서 같이 하숙을 했다. 정일영 동문과 친하게 지냈다. 정 동문은 대단히 학문적이고 섬세한 감성의 신사였는데 대구가 고향이었다. 6·25동란 피난 때 최재서 교수님이 정 동문 집에 잠깐 계셨다고 들었다. 몸이 허약한 정 동문은 군대에 갔다가 아파서 일찍 세상을 떠난 아까운 친구였다.


꿈 많던 영문과 시절 교수님으로는 처음 만난 분은 전형국 은사님이시다. 나는 영문과 전과 시험에 합격하고는 그냥 고향 전주에 내려갔다 왔는데 전과 학생은 일반 학생보다 등록 마감일이 며칠 빠른 줄 모르고 실수를 했었다. 교무처에서 당시의 학장님인 정석해 교수님의 특별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 학장님은 안 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면서 사무실에서 “동(動)하시오!” 하면서 학장실에서 나가라고 하셨다. 그때 우연히 학장실에 오셨던 전형국 교수님이 “최 군, 지금 그분이 화나셨으니 일단 나갔다 다시 와서 사정하게나.”하고 충고하셨다. 한 시간쯤 후에 다시 가서 나는 허락을 받아 자랑스런 영문과 학생이 되었다. 세상 사는 지혜도 가르쳐주신 전형국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학부를 졸업하던 4학년(1956년) 때 처음으로 교수진과 재학생들의 영문학과 발표회가 처음 있었다. 최익환 동문이 발표한 사실주의에 대한 논문은 연세춘추에까지 실렸다. 나는 Sara Teasdale이란 시에 대해서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Time is a kind friend, He will make us old”은 나이가 든 지금도 새삼 생각난다.


1957년 대학원 영문과에는 김태성, 최익환 동문들과 나 세 사람이 합격했다. 최재서 교수님은 첫 학기에는 Coleridge의 Biographia Literaria를 강의하셨는데 최익환 동문은 최 교수님의 오역을 지적했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교수님이 “자네가 맞네.” 하고 인정하신 기억도 난다. 강의 시간에는 최 교수님의 딸인 최양희와 조동현 동문도 같이 청강을 했다.


최 교수님이 둘째 번 학기에 Wordsworth 세미나를 하셨는데 내가 The Prelude에 대해서 논문을 쓰겠다니까 서울대학 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려다 주시기도 했다. 한번은 이양하 서울대 영문과 교수님께 책을 갖다드리라고 심부름을 시켜서 동숭동 자택으로 방문했다. 당시에 이양하 교수님은 장영숙 이대 영문과 교수님과 예일대학에서 결혼하시고 한국에 갓 나오신 행복하시던 때였다. 장영숙 교수님은 6·25 전에는 정지용 시인과 이양하 교수 두 분이 경쟁적으로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때도 젊지 않으셨는데 장영숙 교수님은 미인이시었고 멋있게 W. H. Auden의 영 시집을 읽고 계셨다.


오화섭 교수님의 강의 시간은. 학과 내용뿐만 아니라 그분의 재담과 세상 사는 이야기의 식견에 학생들은 매혹되곤 했다. 당시 오 교수님은 한 때 동아일보에 음악평을 쓰시곤 했다. 어느 날은, 윤이상 교수님의 ‘까마귀’에 대한 작곡 발표회의 비평을 썼는데 저녁에 배재 고등학교의 음악회에 갔다가 하마터면 윤이상 씨한테 맞을 뻔했다고 분해하셨다.


윤이상 씨가 화가 나서 때리려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연대 학생들이 말려서 창피를 면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오 교수님은 음악 평론을 단념하신 것으로 안다. 내가 독일 유학시절에 윤이상 교수님이 하이델베르크에 오셨을 때 그 에피소드를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은 웃기만 하셨다. 모두 옛 이야기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나는 오화섭 교수님께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이 즐겨 쓰던 남색 베레모를 하나 사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 드렸는데 매일 쓰고 다니신다고 편지 주셨다. 그런데 이군철 교수님이 “오 선생 그 모자 어디서 났오?” 하시며 자꾸 멋있다고 하신다고 좋아하시던 오 교수님의 정을 잊을 수가 없다.


오화섭 교수님과 김형순 동문의 결혼식장에 참석했던 기억도 새롭다. 김윤경, 최현배, 조의설, 홍의섭 등의 중진 교수님들도 참석은 다 하셨는데 엄숙하신 그분들은 박수도 치지 못하셨다. 그러나 서울대학교의 젊은 고석구, 고려대의 여석기 선생님과 우리 대학원생들은 축하의 박수를 쳤다.


음악과 연극을 좋아하시던 오화섭 교수님 덕분에 내가 나가던 상동교회 찬양대 지휘자였던 영문과 선배이신 변성엽 동문의 ‘영시와 노래의 밤’을 재학시절 연대에서 가졌던 일은 새삼 행복한 추억이다. 오 교수님은 동경 유학시절에 산에 피크닉 가서 트럼펫으로 오혜령 동문의 모친이신 첫 부인의 마음을 매혹시켜 결혼하셨다는 로맨틱한 젊은 시절의 연애담도 들려주실 만큼 학생들과 가까웠던 다정한 은사였다.


나는 외국에서 30년을 살다가 1988년에 귀국해 국제학부와 문과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했다. 은사님들이 안 계신 교정은 허전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때 학생시절에 영어 작문을 가르치셨던 원일한(Underwood) 교수님은 연세대 이사님으로 아직 재직하고 계셨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부사나 형용사 같은 장식적인 단어들에 줄을 북북 그어 밤새 수정하셔서 다음날 시험지를 돌려주실 만큼 성실하셨다. 원 교수님은 우리에게 영어의 기본 구조(structure)들을 가르치시려고 무척 애쓰시고 당시의 헤밍웨이식 미국 영어를 권장하셨다. 미국 가서 term paper 쓸 때 교수님의 고마움을 다시 느꼈다.


나는 1959년 미국 국무성 전국 교수선발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제2차 구술시험을 치를 때 심사위원의 한 분으로 오신 원 교수님을 다시 뵙게 되었다. 4·19가 있던 해여서 연세대 학생들이 총장 서리셨던 원 교수님의 집에 쳐들어가 가구를 때려 부셨던 때라 뵙기가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원 교수님은 제자가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을 반기시고 아마도 영어 인터뷰에서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신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여러 교수님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도한다.


나는 대학에서 은퇴한 후 미술 출판사를 차려 좋은 미술 서적들을 우선은 내지만 영문과 선후배님들의 좋은 문학서적도 출판하고 싶다.


끝으로, 모교 연세의 영문과 선후배님들께 인사드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영문과의 장래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