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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나를 기독 학자로 키워주신 고병려 선생님 (54 조신권) (2008.05.02)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나를 기독 학자로 키워주신 고병려 선생님


54 조신권




1957년 어느 날 졸지에 나의 부친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생활이 어려워 간신히 대학원을 마치고 인천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영어과목을 가르치다가 1961년 군에 입대하였다. 다행히 나는 시험을 거쳐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번역위원회 번역사병으로 배치되었다. 배당된 분량만큼 교범을 번역한 후 남는 시간에는 허락을 얻어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1962년에는 결혼까지 하였다. 1963년 제대 후 나는 외국에 나갈 형편은 안 되고 하여서 국내에서라도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시험을 보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964년 제1학기라고 생각하는데 개설과목 중 밀턴(John Milton)이라는 과목이 들어 있었다. 그 과목의 담당교수가 바로 고병려 선생님이었다. 그런 분이 영어영문학과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학부 때나 석사과정에서 강의를 들어 본 일이 없고 또 개인적으로 접촉을 해본 일이 전혀 없었다. 다만 신과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시다가 영어영문학과로 오셨다는 정도의 정보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사과정의 과목이 개설되어 그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벼운 흥분마저 들었다.


첫 시간에 들어오시는데 체구도 왜소하고 얼굴빛도 핼쑥한 것이 겉모습부터가 고결해 보이고 우선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한 학기 동안 『실낙원』 12권 중에서 처음 2권만을 읽었다. 적은 양이지만 한 단어 한 단어 라틴어의 어원을 명시하면서 설명하시는데 정말 그처럼 꼼꼼하고 성실한 강의를 처음 들어봤다. 그렇게 정독을 한 것이 나머지 10권을 읽어나가는 열쇠가 될 줄은 그 당시로서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한 학기가 다 끝나고 나서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선생님께서 따로 불러 어떤 이야기를 해주신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을 고요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도 교수가 된다면 저분처럼 되어야겠다는 것이었고, 기왕 내가 영문학을 한다면 신앙과 연결짓고 싶은데, 그렇다면 『실낙원』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논문을 쓸 때가 되었다. 나는 『실낙원』을 가지고 논문을 쓰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영어영문학과 교수 중에 한 분이 밀턴을 가지고 박사학위 청구를 했는데 통과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제가 아니고 구제 박사학위였다. 구제 박사학위란 교수 경력이 많은 분으로 과정을 밟지 않았지만 학문적 업적이 있으면 신청할 때 심사를 통해 박사학위를 주는 제도였다. 그런 제도가 그 해로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신제 박사학위만 인정한다는 것이다.


옆에서 아는 분들이 현직 교수도 학위 청구를 해서 안 되었는데 시간 강사가 그것도 신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 한들 학위를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면 법정 기간이 지나므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고 해서 구제 박사학위를 청구했다가 안 된 교수님을 찾아가서 미안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겠다고 했더니 한다는 말씀이 정말 실망스럽고 너무나 비속하여 내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즉 “세단차가 나가겠다고 하는데 똥차가 가로막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고병려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절을 하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부터 나는 그 인격에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지도교수를 맡아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에 사양을 하면서도 함께 최선을 다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승낙에 나는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논문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여러 번 만나면서 그의 인품을 통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그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몇 차례의 예비심사를 통해 많은 비판과 지적을 받았고 그때마다 선생님은 변호도 해주시고 고쳐도 주셔서 마침내 「실낙원에 나타난 밀턴의 인간관」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국내에서는 제1호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순전히 선생님의 영향이 아니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위가 통과되었을 때 그 기뻐하시던 모습은 언제나 눈에 삼삼하고 나의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는 고마운 모습이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아끼시는 제자들 몇 분을 선생님 댁으로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신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 불초 교생도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며 정겨운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고전학원을 열어서 널리 고전정신을 펴보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품고 계셨다. 아끼는 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바로 그런 뜻을 전달하여 동참케 하고자 하는 속내가 있었다. 선생님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정색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호머, 단테, 밀턴, 셰익스피어, 부라우닝 등을 원문으로 읽는 교육을 통하여 주로 기독교의 문학적 고전의 향기를 널리 확산해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선생님은 여의치 못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그만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그 뜻은 면면히 이어져 밀턴학회 같은 학술 연구회가 이루어졌고 거기서 밀턴 독회를 통해서 작지만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전공 영문학과 신앙을 연관지어 공부하는 눈을 뜨게 된 것이고, 그러자면 좀더 성경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서문학의 이해』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이런 소중한 결실은 선생님의 신앙과 학문의 밑받침 없이는 맺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어서 나는 『영문학에 나타나는 성서의 향기』와 『한국문학과 기독교 1』이라는 책을 낼 수가 있었고, 『정신사적으로 본 영미문학: 중세편』과 『청교도 애국시인 존 밀턴의 문학과 사상』 및 『청교도 신앙과 문학의 탐구』도 내놓을 수가 있었다. 이런 무게 있는 책들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눈으로 학문을 바라보게 해 주신 은사 고병려 선생님의 은덕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와 같이 선생님은 나에게 신앙의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고 그것을 글로 옮겨놓을 수 있는 자세와 열정을 갖도록 기초를 닦아주셨다. 이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개척자적인 일을 했다고 자부하게 되는데, 이것도 선생님의 감화와 영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사랑의 성자와도 같으신 분이다. 누구에게나 악의 없이 대하고 친절하며 온유 겸손하시다. 요사이 학생들은 인사도 할 줄 모르고 버릇도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교정에서 눈에 뜨이기만 하면 먼저 허리를 굽히셨다. 그러니 학생들이 인사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자신이 키우신 후학을 끝까지 거두시고 보살펴 주시는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시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데 자랑스러운 마음을 갖는다.


선생님은 또한 곧으신 분이다. 생활이 곧고, 마음이 곧고, 정신이 곧고, 믿음이 곧으시다. 사악하고 왜곡되고 굽으신 것이 없으시다. 어떻게 보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으시다. 너무도 단순해서 어떤 때는 민망하기도 하고 답답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좋은 점이 바로 그런 데 있으니 누구라도 그분을 만나보면 그런 신앙 인격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믿음을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해 보이는 분이시다. 나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셔오면서도 믿음을 놓고 교리논쟁을 한다든지 어떤 교회가 좋다든지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요사이는 과천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 밑에 있는 남태령 전원 마을이라는 동네에 같이 살게 되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승의 날에 찾아뵈었더니 가지고 계시던 귀중한 종교서적들을 횃불선교회관에 다 기증했다고 말씀하셨다. 왜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시지 그러셨느냐고 하였더니 선생님 말씀이 그것도 생각해보았지만 더 유용하게 이용될 곳이 횃불회관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기증하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회관에 나가 특강을 하신다고 하셨다. 지금 팔순인데도 젊은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계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원문에 가장 가깝게 사역(私譯)하는 작업을 계속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신약은 전부 완역하여 간단한 주를 부쳐 출간하셨다. 연초에 신년 인사를 갔더니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비교사전을 만드실 계획으로 깨알 같이 손수 박아 쓴 자료를 보여주시며 어떤 곳에서 출판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신념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선생님처럼 소망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살며 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전공을 살려 영미문학과 성경의 관계를 내 힘이 허락하는 대로 정리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보면 변화를 받고 보잘것없는 발자취지만 나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


믿음의 삶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학문의 길도 쉬운 것은 아니다. 더더구나 학문과 신앙을 연계하면서 초지일관 바르고 깨끗하게 사는 것은 어렵기 짝이 없다. 그런 중에서도 선생님은 말없이 사귀는 사람도 별로 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결같이 외길을 걸어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고병려 선생님은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바람에 이는 구름 한 점에도 부끄럼 없이 사시지 않으셨는가 싶다. 성 다미엔은 젊어서부터 “모든 것을 주께”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대로 생활을 하였다. 고병려 선생님은 성 다미엔처럼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그런 생활을 하셨다. (고병려 선생님은 2006년 4월 23일 소천하셨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