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뉴 닫기
 
Community

커뮤니티

"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 영문과와 May Queen 외 (54 김희정) (2008.05.02)
작성일
2023.01.02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영문과와 May Queen 외


54 김희정




1957년 5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합병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연희대학교 총장이셨지만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의 자격으로 백낙준 박사가 새로운 학교 현판을 거시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초대 연세여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선출 과정이 재미있다. 우선 여학생들만 소강당에 모여 여왕 후보를 2명씩 무기명으로 추천하였다. 추천자 명단은 교수회의를 거치면서 성적이 좋은 모범생 12명으로 압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여학생들은 대거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12명의 여왕 후보 명단은 2주일 동안 학교게시판에 사진과 함께 공개되었다. 선거일에는 전교생이 노천강당에 모여 투표를 하였고, 최다 득점자가 초대 여왕으로 선출되었다.


연세라는 교명도 모두의 뜻을 모아 정해진 것이다. 전교생이 노천극장에 모여 각자 원하는 교명을 적어내었고 그 합산 결과로 채택되었다. 우리 동기는 1954년에 연희대학으로 입학하여 1958년 연세대학으로 졸업한 연세대 1회 졸업생이 된 것이다.


백낙준 총장님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은 것 같다. 내 아버지와는 일제강점기에 연대에서 함께 강의를 하셨다. 1956년 총장님의 회갑연이 노천극장에서 열렸다. 그때 내가 재학생 대표로 자작 송수시를 두루마리에 붓으로 적어 낭독하였다. 그 송수시를 평생 소중히 보관해 주셨던 것은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다.


또 같은 노천극장에서 백 총장님으로부터 표창장과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과별로 성적 최우수자를 학교 게시판에 공고하고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장학금 수여식이 거행되었었다.


실로 예쁘지 않은 내가 May Queen이 된 것은 노천극장에, 게시판에 자주 오르내려 익숙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최현배 부총장님 회갑연에서 국문과 학생들과 송수시를 교독한 것도 노천극장이었다. 연세 YWCA와 녹양회 회장단의 명단이 공고된 곳도 게시판이었으니까. 자격이 충분했던 재색을 겸비한 많은 친구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나가신다, 우리들의 여왕을 보라…’ 연세여왕 찬가는 오화섭 교수님이 작사하셨다. 여왕 후보에 영문과 학생이 4명이나 있었고, 그 중에는 1년 후 사모님이 되신 재원, 김형순도 있었다.


여왕은 흰 갑사한복을, 시녀들은 연분홍 갑사 한복을 입었다. 차점자인 조정숙(화학 4. 후에 심문택 교수 사모님)은 왕관을 받쳐 들고 길을 인도했다. 다음에 여왕이, 그 뒤를 보라색 등꽃으로 엮은 flower chain을 어깨에 맨 시녀들이 5명씩 양쪽에서 따랐다. 중앙석에 이르자 총장님은 crown을 들어 내 머리에 씌워 주셨다.


다른 여학생들은 may pole을 중심으로 매달린 오색 천을 엮어가며 춤을 추었다. 연대 역사상 가장 화려한 event여서일까 국내외 기자들도 많이 왔고, 그 중 외신기자 두 명이 내 사진을 칼라로 찍어 총장님께 보냈고, 다시 총장님이 나에게 주셨다. 내 생애 첫 칼라사진들이다.


왕관은 신과대학생이 마분지로 만들어 은박지를 씌운 것이었다. 다음해 연세 마크가 들어간 은관을 제작하여 2대에서 5대까지 사용하였다. 여학생 처장실에 보관해오다 5대 행사를 마친 후 도난당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왕관과 함께 여왕 제도도 사라졌다.


1958년 2대 여왕으로는 의대 본과 1학년 백순영이 선출되었다. 나와는 36년생 동갑이고, 54년 입학동기이고 60년 졸업식도 함께 하였다. 의대 6년, 대학원 6년이니까. 둘 다 친구들보다 나이가 어린 것은 순영이는 재동초등학교 때 월반을 하여 경기여고에 갔고, 나는 덕수초등학교 5학년 때 검정고시에 수석 합격하는 바람에 이화여고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1958년 대관식에서 나는 쓰고 들어간 왕관을 벗어 2대 여왕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1959년 3대 여왕도 의대에서 선출되었다. 1960년엔 4·19로 행사가 중단되었고, 1961년 4대는 영문과에서, 1962년 5대는 다시 의대에서 여왕이 배출되었다.


5대 여왕 대관식에는 늙은 내가 crown을 쓰고 들어가 젊은 5대 여왕에서 왕관을 씌워 주었다. 행사 복을 타고 났나 싶었다. 세 번씩 관을 썼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2대 여왕은 방사선과를 전공하러 미국에 갔고, 3대와 4대도 유학을 갔기 때문에 서울에는 초대인 나만이 있었다.


연대에는 모두 5명의 여왕이 선출되었다. 영문과 2명과 의과 3명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타과 학생들이 몹시 불편해 했고, 일설에 의하면 상경대와 정법대 (사회대와 법대로 분리)에서 특히 그랬다고 한다.


연세대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의 일환이었을 뿐 아니라, 전교생이 다 같이 기뻐할 수 없는 제도를 이어갈 이유가 없어 5대를 끝으로 연세 Campus Queen 제도는 막을 내렸다.






결혼




“희정이는 운명적으로 세브란스 출신과 결혼을 해야 한다”며 아버지의 친구이신 김명선 부총장님과, 이병희 의대학장님, 오형석 보건소장님이 30살 노총각을 적극 추천하셨다. 명문가의 손자로 미국에서 방사선진단, 방사선치료, 방사성동위원소, 핵의학에 전문의 자격을 획득하고 돌아온 고려의대 교수라며… 우리의 2남 1녀가 모두 교수이니 훈장의 뿌리는 깊기도 하여라.


며칠 후 총장 공관으로 인사를 갔다. 우리의 절을 받자마자 총장님 말씀이,


“우리 희정이 데려가려면 강당을 지어 놓아야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은 정할 수 없습니다만…”


나는 두 사람의 배포에 황당할 뿐이었다.


다음에 남산 최재서 학과장님 댁으로 인사를 갔다. 대학원 졸업반이었고 논문만 남은 시점이었다. 반가움 반 서운함 반인 어조로,


“지금 논문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결혼은 논문 끝나고 하지. 신랑은 급하겠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우리는 약혼 3주 만에 결혼하였다. 신혼 여행지의 호텔 복도에서 “208 강의실이다” 외치며 달려가는 나를 보고 한심했던지, “영문과 강의가 208호실에서 많이 있었나보군…”


나에게 연세대 영문과는 역사이다. 학생으로 10년(박사과정까지) 강사로 20년을 보냈다. ‘Mommy!’라고 부르며 달려오던 학생들, ‘우리 엄마가 선생님 같았으면 좋겠어요…’ 하며 힘들게 말문을 열던 학생들, 아직도 꿈에 보인다. 종강 때 부르던 Auld Lang Syne도 귀에 여운으로 남아 있다. 아쉬운 것은 결혼하고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십여 년의 공백이다.


대학원 졸업반 때 TA로 최재서 교수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Wuthering Heights를 강의하였고 그때 그 강의를 듣던 학생이 바로 영어영문학과 60년사 간행위원장 차수웅 후배이다. 편집위원장 조신권 교수는 나와 학부, 대학원 모두 동기 동창이다. 별명이 목사님이었는데 그럴듯하지 않은가?


재학조교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신랑 가로되,


“남자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창조적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


“???”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일이야 말로…”


정말 그런 것 같아서 스스로 엄마의 길을 지복(至福)한 선택으로 만족했다. 고희를 넘긴 지금도 나는 당당하게 늙고 있다. 영감의 한마디 덕분에.


“마누라 값은 골동품 값이야. 세월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가치가 오르니까…”






세배에 얽힌 추억




54학번인 내가 연대를 다니던 시절에는 여학생이 귀해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교실에서는 난로(사실은 radiator)가에 앉아있는 남학생들을 일어나게 하고 여학생들을 앉게 하는 교수님들도 계셨다. 남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던 때라 여학생끼리 몰려다녔다. 이런 모습을 녹양회(綠羊會)로 명명해 주셨다.


내가 1학년 때에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으로 여학생 생활관, 알로하가 건립되었다. 1학기 동안 예의, 요리, 가정 경영, 복식 등 의식주에 관한 신부 수업을 받았고, 6학점을 받았다. 알로하에 총장 내외분이 싼타의 선물을 주시곤 했다. 숙식을 같이 했던 알로하 동기들은 지금도 그때의 실수며 감동을 전우들의 회고담처럼 되뇌고 있다. 연세 2대 여왕 백순영이가 내 옆방 친구였던 것도 묘한 인연이었나 보다.


이제 세배에 얽힌 그리움을 후배에게 남기려 한다. 먼저 최재서 과장님께 세배를 하러 남산의 목조 2층집으로 갔다. 그 추운 겨울에 불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에서 책을 읽고 계셨다. 방석만이 유일하게 오만한 학자의 체온을 유지해줄 뿐이었다.


형순이는 자주색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돈숙이는 빨간 치마에 색동저고리를, 나는 매화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세배를 하였다. 특유의 느긋한 웃음을 띠신 채


“성격대로 입었구만, 하하하…”


차를 들고 들어오신 사모님을 향해 짓궂은 어투로,


“이 사람 숙명고녀 다니다 결혼을 했는데, 내가 보고 싶어 찾아가면 부끄러워 도망을 가버리곤 했지…”


최 선생님을 향해 “실력은 있지만 인간성이 메말랐어. 교만하고 안하무인이야”라는 평을 동료 교수들에게 받으셨지만 내가 아는 최재서 선생님은 따뜻하고 유머 있고 제자를 사랑할 줄 아는 분이시다. 졸업 후에도 범문사에 자주 들리셨는데 그때마다 김군이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요즘 무슨 책 사갔느냐를 계속 물으셨다고 한다. 범문사 사장에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감사의 따뜻함이 솟구치곤 했다.


다음은 연대 Campus 안에 위치한 정석해 문과대학장 댁에 세배를 갔다. 근엄한 철학자시지만 우리 여학생들을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고 데칸쇼(Decartes, Kant, Shaw)에 관한 일화를 맛있게 들려 주셨다. 나는 특히 사모님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이대 피아노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를 마시며, “사모님, 피아노 한 곡만 쳐주세요…” 마구 떼를 썼다. 수줍은 듯, 괴로운 듯 묘한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으시더니 ‘소녀의 기도’를 치기 시작하셨다. 놀랍게도 피아노를 전공한 분의 touch가 아니었다. 속으로 ‘내가 쳐도 저보다는 나을 텐데…’ 방정맞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도 못치고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신혼 때 피아노를 치니까 학장님이 ‘시끄러!’ 하시더군요. 사색하는 데 방해가 되었나 봐요. 그 후로는 피아노 뚜껑을 단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어요.”


우리 여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에 휩싸였다. 사모님이 너무 거룩해 보여서였을까, 나도 이 다음에 저런 아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서일까?


내가 신혼 때 일이다. 연한 분홍색 nail polish를 칠하고 예쁘냐고 신랑에게 물었다. 너무 정직한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상을 찌푸렸다. 그 후로 47년간(재작년이 Ruby Wedding이었으니까) 단 한 번도 매니큐어를 하거나 nail polish를 칠해 본 적이 없다. 또 임신 초에 커피가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커피를 끊은 채 오늘날까지 커피를 입에 대본 적이 없다. 이만하면 학장 사모님을 비슷하게는 닮은 것 아닌가?


총장 공관으로 세배를 하러 갔다. 최이순 선생님, 김동길 선생님, 심치선 선생님은 항상 그곳에 계셨고 어린 우리들과 잘 어울려 주셨다. 총장 내외분은 ‘우리 딸들 어서 와…’라며 팔을 벌려 맞아 주셨다. 유난히도 떡이 얇은 떡국의 맛은 아직도 혀끝에 남아있다. 총장님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메기의 추억’을 부르자고 하셨다. 아까운 추억을 음미하시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따라 부르셨다.


세배를 마치고 Yonhei Heights(연희언덕)를 내려오며 심 선생님을 위해 ‘바위고개’를 불렀다. 연이어 김동길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2부로 부르며 스스로 화음에 취해 버렸다. ‘Oh Lord, my God, when I hear roaring thunder...’ Yonhei Heights에 물든 노을은 우리의 마음에 영원한 고향으로 살아 있다.






원한광 교수의 한국 문화 첫걸음




연세대 campus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주는 분이 창립자Underwood의 동상이다. 그분의 증손자가 원한광 교수이다. 1971년 원 교수는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를 받고 귀국하여 첫 박사과정 강의를 맡았다. 나는 영문과 박사과정에 ‘나 홀로’ 학생이었다. 19세기 영국소설이 전공이었기 때문에 Dr. Underwood와는 일대일 수업이 많았다. 아직 미국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 교수는 데모야 있건 없건 휴교령은 내렸건 말았건 읽어야 할 책과 과제물을 산더미 같이 내주었다. 학기가 끝난 후 ‘대한민국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라며 너무 미안했다고… 진력을 다해 지도한 교수에게서 사과를 받았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한 학기가 지나서야 공부 안하는 한국 대학 풍토를 알아차렸나 보다.


당시 원 교수는 한국말이 아주 서툴고 한글을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사람 죽으면 무덤에 앉아 있습니까?” “아니죠. 미국사람과 똑 같이 관속에 누워 있어요.” “그럼 왜 무덤이 높고 동그랗습니까?”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무덤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 거죠.” 알똥 말똥 어깨만 들썩(shrugged). 마침 조교가 시험지 철을 들고 똑똑… “문 닫고 들어오세요,” 내가 말하자, “들어오고 문 닫아가 맞죠. 문을 닫으면 못 들어와요” 조교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문을 닫고 나갔다. “한국말 crazy language입니다.” “모든 언어는 외국인에게는 다 crazy language예요.” “아참, 지금 몇 시예요?” “두 시 이십 분인데요.” “두 시 스무 분이라고 해야 되죠. 아니면 이시 이십 분이라고 해야 옳죠.” “그렇군요. 시(時)는 하나, 둘, 셋, 한국말이고, 분(分)은 일, 이, 삼, 한문이니 짝짝이네요.” 의기양양해진 이 양반 내친 김에 또 한마디. “Mrs. Kim,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한 개씩 과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죠?” “네, 그래요. 그런데 영어 단어는 모음 하나에 자음이 세 개나 있으니 철자가 어렵죠. bird 처럼요.” “내가 자음만 두 개인데 소리가 나는 걸 발견했어요.” “한글에 그런 건 없어요.” “‘ㅎ’만 두개인데 홍 이라고 읽던데요” ㅎ을 포개 놓으니 홍자가 됐겠다. 죽을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자음 ㅎ + 모음 ㅗ + 자음 ㅇ’을 설명하자 머쓱해진 젊은 교수, 수업 끝나고 5분씩만 한국말을 지도해 달라나. 역시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이쯤은 되어야지. 몇 해후 이 사건들을 교실에서 재탕하자 학생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특히 ‘홍’ 자에 이르러서는 발을 구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Glocalization (Globalization + Localization) 시대에 살면서 마음의 빗장을 풉시다. 문화는 서로 달라야 제 맛이 나는 법이거든요.” 한 마디 하고 책을 덮었다.


내 독선생이었던 이분이 바로 연세대와 새문안교회의 설립자이며 YMCA를 조직한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元杜尤)의 증손(曾孫)인 Underwood 4세이다. 2세인 Horace Horton Underwood(元漢慶) 박사는 해방 후 백낙준 총장과 함께 연대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를 측량한 사람이 Unerwood 1세와 2세라니 놀랍다. 1세와 동명(同名)인 3세 Harace Grant Underwood(元一漢) 교수는 학부시절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이다. 6·25동란 중에는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인천 상륙작전 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했고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이순신 장군을 높이 칭송하면서 당시 정부의 부패상이 드러날 것을 염려한 Underwood가의 마음은 연세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서로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를 남겼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 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 등의 수상으로는 그분의 한국 사랑을 기억하기에 모자람이 있다. 1세에서 3세까지는 모두 한국에 묻혔다. 4세만은 2004년 “한국에서 Underwood가족이 해야 할 일은 다했다.”는 말을 남기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Schooling Market이 연세를 비켜가는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나는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으며 흐려진 눈에서 그분의 호기심 많은 눈망울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