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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제1부 40년대 - 그 때 그 시절 (49 고현옥) (2008.04.0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그때 그 시절

49 고현옥


1949년 6월 희망과 꿈에 부풀어 숲에 싸인 아름다운 연희동산에서 행복하고 자랑스런 맘에 가득 차서 입학했습니다. 학교 안에 들어서면 양옆에는 우거진 백양나무 잎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한들한들 빛나며 하늘을 가리우고 그 아래를 걸어 들어가는 우리는 시라도 읊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히곤 하며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차통학을 했는데, 입학하자 영문학시간에 영국서 유학하시고 오신 김선기(문교부 차관)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영국 신사는 절대로 뛰는 일이 없고 뛰는 사람은 신사가 아니라고 하시니 우리도 신사 되려고 뛰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를 기다려야 하니 신사고 무엇이고 포기하고 뛰자뛰자하며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여학생 수가 적어 백낙준 총장님이 여학생 만나면 차를 세우시고 태워다 주시곤 했습니다. 그 시절의 선배님이나 동기생인 남학생들은 lady first의 서양 문명이 받아들여져 여학생들에 대한 태도는 즐겁게 해주었어요. 시험 공부할 때도 남학생들이 노트를 보여주며 같이 공부했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 시간에 노천극장에 모여 예배드릴 때면, 전교생이 한눈에 보이고 정답고 하나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세계 각처에서 오시는 목사님들은 이 연희대학은 동양(東洋)에서 제일 아름다운 대학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풍스럽고 정답고 숲에 옴팍 싸인 석조 건물은 문과대학, 이과대학, 신과대학 그리고 사무처 건물만 있었습니다.

저는 이북 황해도 해극이라는 곳에서 신정여자중학교 4학년 때 조부모님과 같이 월남해서 이화여자중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이과계통 공부가 취미가 있어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이과에서 공부하고 대학에 가야 하는데, 저는 의과 대학에 갈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부모님이 월남하지 못해서 6년 의과를 다닐 수 있는지 고민하다 포기하고 그 시절 연희대학 영문과는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학과여서 취미도 없고 기초도 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도 모두 훌륭하셨고 이 좋은 대학에서 노력하고 닦으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학년 때 필수 과목을 낙제 없이 마치고 2학년 때부터 전공과목을 선택 시간표를 제출하고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고 영작문 원일한 교수님 시간에 들어갔더니 학교에서 자기 집까지 가는 길을 소개하는 작문을 써 오라는 숙제였습니다. 열심히 모자라는 영어 실력으로 작성하여 제출하지도 못하고 6·25 사변이 났습니다. 전쟁은 모든 꿈과 희망을 한꺼번에 앗아가고 전교생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남학생들은 전쟁터에 가거나 통역 장교로 가거나 다시 보지 못하고 만 남학생 여학생이 많았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따라 피난길에 나섰는데, 종착지가 부산이었습니다. 부친께서는 무역회사를 차려 사업하시고 저는 한국은행에 다니다 영도에 연희대학 가교가 세워져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슬펐던 일은 원한경 박사님이 안식년이 되어 미국으로 쉬러 가셨는데, 6·25사변이 나니까 한국 도와야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 생각에 많은 구호물자를 갖고 한국에 오셨는데,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몇 안 되는 학생들이 부산 UN 묘지에 장례식에 가서 울고 울었습니다.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하셨는지, 정말로 애국자였습니다.

부산가교에서 수업받기 시작했습니다. 판잣집인 가교에는 책상도 없고 긴 의자만 있었습니다. 오화섭 교수님, 권명수 교수님, 최재서 교수님 그 외의 몇 교수님들이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어설프고 시험 때도 자리가 100점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든지 컨닝할 수 있었으니까요. 영문학 비평 최재서 교수님의 강의는 너무 어렵고 어디에 문제의 답이 있는지도 모르는 나는 100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화섭 교수님의 연극 강의는 소극장을 만들어 우리 각 대학생들이 모여 연극한다하고 몰려다녔어요. 휴식시간에는 영도 바다로 내려와 해녀들과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공부는 적당히 하고 음악회나 영화관이다 놀기만 하는 데 신경 쓰고 학교로 집으로 책가방 운전만 하고 왔다 갔다 했지요.

그래도 정신 차려 공부했으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었는데 하무하게 졸업하게 되었지요. 저는 어디에 가서도 연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 선배님의 주선으로 숭의여고 독일어 강사로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나갔습니다. 고 1학년이 한 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덕성여자중학교에서 정식 교사로 채용되어 2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집에서 전업주부로 속절없는 세월만 보내고 2002년 재상봉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식에 참석하여 몇 안 되는 우리를 단상에 앉히고 식을 하는데 저는 참석한 것이 후회스럽고 창피하고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고 슬픈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 좋은 대학에서 무엇을 했나. 몇 년 전부터 우리 친구들 넷이서 이대후문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하고 간식을 싸갖고 연세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 밑에 앉아 회상에 잠깁니다. 입학해서 그때는 뒷동산이 공동묘지고 가보지도 못했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아름다운 연희 동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젊은 후배들이 무한히 부럽기만 하고 이 넓고 아름다운 연희동산을 학교 캠퍼스로 잡아주신 언더우드 가에 깊은 감사를 올리며 폭넓고 풍부한 인간미를 형성하여 연세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