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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제1부 40년대 - 나의 꿈과 예술과 삶은 白楊路의 품에서.. (47 차범석) (2008.03.2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추억 속으로

제1부 40년대

나의 꿈과 예술과 삶은 白楊路의 품에서 자랐지

47 차범석


1946년 7월은 유난히도 덥고 장마가 길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난데없이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와중에 나는 입학시험을 치러야 할 처지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원서를 내놓고 교통편을 걱정하다가 목포에서 서울까지 화물자동차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대에서 제대한 지 일 년 만에 늦깎이 대학진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 나이 23세였지만 시험을 앞둔 불안과 초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면접을 치르는 날이었다. “우리 연희전문학교엔 왜 지원했나? 무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검정테 안경을 쓴 교수의 싸늘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극작가가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극작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어진 또 한 사람의 시험관과 무심코 시선을 마주 치더니 되물었다. “극작가라니 희곡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표정은 어딘지 시큰둥하고도 냉담해 보였다. 내가 극작가가 되겠다는 그 자체가 가당치도 않다는 눈치 같았다. 모르면 몰라도 그 당시에 극작가를 꿈꾸는 학생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1942년 나는 중학 졸업 후 2년 동안 일본 동경에서 재수생활의 경험이 있었고, 그 동안에 영화며 연극을 자주 대하면서 막연하게 문학을 꿈꾸는 과정에서 진로를 연극 쪽으로 바꾸었다는 개인적이 사정을 설명 드리자 두 분 교수는 고개만 끄덕거릴 뿐 별 말씀이 없으시더니 알았다면서 턱으로 출구 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면접실에서 나오자 뜨거운 햇볕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고 말았다. 보나마나 낙방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하고 많은 꿈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극작가를 택했는지 내 자신도 그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갑작스리 어깨를 짓누르는 어떤 중압감에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해방이 된 고국에서까지 낙방을 하게 된다면 내 자신이 처참하다는 자책감에 한동안 망연자실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합격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 방랑 끝에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과 홀가분함도 물론 그 이유이겠지만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문과, 관문을 통과했다는 하나의 성취감에 새삼 흥분을 느꼈다. 다 지난 23년의 세월과 앞으로의 나의 미래를 대비시켰을 때 무한한 가능성만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었다. 나중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분 교수는 교무처장 서두수(徐斗銖) 교수와 사학과 홍순혁(洪淳赫) 교수였다. 문과(文科) 입학생은 약 120명 가량으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입학식이 끝나고 처음으로 안내 받은 교사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미가 나는 본관의 석조건물하고는 딴판인 어두침침한 짙은 잿빛의 2층 목조 건물이 문과 교실이었다. 대학이라는 선입감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어느 시골 중학교 건물과 같은 허술함이 더 컸다. 게다가 2층을 오르는 계단이 삐걱거리고 교실 안에 즐비하게 놓인 2인용 책상과 걸상은 영락없는 시골 학교 분위기였다. ‘致遠館’이라는 간판만이 걸려있을 뿐 내가 동경하던 대학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멋스럽고 낭만적이고 그래서 조금은 시적인 분위기가 감돌 법한데 현실은 전혀 다른, 내다버려진 멋없는 건물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학생들의 생김새부터가 위화감을 풍겼다. 팔도강산에서 모여든 학생들의 표정과 차림새도 가지각색이거니와 나이도 천차만별이라 흡사 한 무리의 노무자를 모아놓은 것 같다는 게 나의 첫인상이었다. 17, 8세의 아직도 여드름이 난 소년에서부터 30고개를 넘어선 아저씨에 이르기까지의 면면에서 대학생다운 신선감이나 매력은 느낄 수가 없었다. 군대나 징용에서 가까스로 풀려나자 우선 대학에 들어가 놓고 보자는 식의 군상들이었다. 빛나는 눈동자며 패기에 찬 청춘의 활력 따위는 느낄 수가 없었다. 흡사 외인부대 같은 분위기였다. 허기야 내 자신부터가 나이 스물세 살에다 2년이나 재수 생활에 찌들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저마다 겪었을 일제시대의 고난과 억압에 시달렸을 일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들은 용케도 살아남은 생명 그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모였다는 데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므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감성이나 정서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삭막한 분위기였다. 더벅머리에 미군 담요를 뒤집어 쓴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군복에 검정 염색한 잠바차림도 보였다.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자유시장에서 흘러나온 구호물자로 제법 멋을 냈는가 하면 말끝마다 영어를 뒤섞어가며 영어실력을 과시하는 학생은 모르면 몰라도 미군 하우스보이가 아니면 통역의 경력을 가진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군상이 우리 자신의 슬픈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 거울임을 직감했다. 고생 끝에 찾아 나선 종착역의 풍경 같은 한 가닥의 서글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품고 있는 푸른 뜻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자긍심에서 내가 굳이 극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세운 뜻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1946년의 가을은 유난히도 짧았다. 조석으로 지나가는 백양로(白楊路)의 서정적인 풍경이며 본관 석벽을 뒤덮었던 담쟁이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도 눈 깜빡할 사이였다. 그것은 뒤늦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나의 제2의 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는 교훈이었다. 그 가을날의 짧은 낮만큼 귀하고 아쉬웠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호기심과 작은 충동으로 나를 들뜨게 했다. 특히 학과목마다 전임 교수가 전공과목을 강의하는 현장 경험은 지난날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 시달려왔던 나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자 개안이었다. 국어, 영어, 철학, 윤리, 성문학(聖文學), 심리학, 동양 근대사 등 중학 시절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과목과 제2외국어 강의는 나에게는 신기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먼 훗날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스승이 몇 분 계셨다. 음성학의 권위자이신 김선기(金善琪) 교수, 영어독본을 강의한 이호근(李皓根) 교수, 그리고 제2외국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신 정석해(鄭錫海) 교수님은 나의 학문적 개안과 인생격정에 여러모로 역량을 주신 분이셨다. 김선기 교수는 별명이 ‘런던보우이’로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전공하셨다는 내력 때문이겠지만, 실상은 국어학자로서 그 실력과 경력을 굳건히 품고 계신 분이었다. 훤칠한 키와 넓은 이마, 그리고 항상 곤색 더블양복 차림으로 겨드랑이에는 한두 권의 원서를 끼고 다니시는 외형부터가 영국신사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존경하게 된 이유는 결코 멋스러운 외형에서가 아니었다. 김선기 교수는 ‘우리의 말’을 살리기 위하여 세칭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살이까지 하신 항일투사였다는, 유창한 어학력과 세련된 외모보다도 국어 사랑을 솔선수범하신 일편단심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한혼양재(韓魂洋才)’를 주창하시며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배양시키겠다는 데 그 인생관의 본령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었다. 음성학은 언어학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과학이자 이론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 기초적 이론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제부터라도 우리말을 바로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요. 힘이 되겠소.”라고 역설하셨다. 사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조선어독본』을 배웠을 뿐이다. 그 이후부터는 철저한 일본어에 의한 교육을 받아 왔고 일본 정신을 강요당한 셈이다. 그것이 타의건 자의건 결과적으로 우리의 모국어를 스스로 버린 셈이며 단 한 번도 그 진의를 의심하거나 거부할 줄도 모르는 채 20여 년을 일본사람으로 길들여 왔던 과거사가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다. 그러니 자기 모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자존심도 없이 무슨 문학이며 예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에 관한 자존심과 자각심 없이는 학문도 예술도 있을 수 없다는 김선기 교수의 열변은 나와 몇 사람의 학생을 충동질했다. 방과 후에 우리 네 사람은 김선기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김 교수는 즉석에서 지시를 내렸다. 준비물은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역저인 『우리말본』을 각자 구입할 것과 강의료는 무료이고 일주일에 한 번 김 교수 댁에서 모이라는 지시였다. 『우리말본』은 문자 그대로 최현배 선생님의 필생의 역작이자 우리 한글 문법을 집대성한 대표작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무보수로 강의해주시겠다는 김 교수의 환한 표정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김 교수 댁은 북아현동 이화여대 뒷문 쪽으로 통하는 산비탈에 있는 그다지 넓지 않은 국민주택이었다. 목요일 오후 우리는 그곳에 모여 우리말 공부를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내가 치원관 시절에 얻은 가장 값지고도 자부심에 찬 수확이자 인생의 개안(開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김 교수님 사모님께서 괴한에게 살해당한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59년 전 일이라 나의 기억도 흐려졌지만 김 교수를 면담하겠다는 한 좌익 학생테러리스트가 출타중인 교수님 대신 사모님을 살해한 사건이며 그 동기와 원인은 소상치 않았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첨예한 대립은 그 당시 학원가에도 종종 있었다. 예컨대 그 사건이 있던 얼마 후 연희대학교 창설자인 언더우드 부인의 살해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적인 용무로 언더우드를 방문한 시인 모윤숙을 살해하려던 게 언더우드 부인이 참변을 당했던 사건이었다. 이 두 개의 사건은 그 당시 연희학원 내에서 일어났던 가장 끔찍스러운 정치테러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사태가 있은 후 김 교수께서는 우리 대학을 떠나가셨고 우리들의 작은 꿈이었던 우리말 공부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학원 내의 태풍이 할퀴고 간 1947년, 나는 학제변경에 따라 전문부 문과에서 연희대학교 문학원 영문과로 편입을 하게 되었다. 그대로 진급을 하게 되면 2년 후면 전문부를 졸업할 수도 있었으나 나는 생각 끝에 학부 편입 쪽을 선택했다. 전문부 졸업보다 2년 더 공부하면 1950년에는 영문과로서는 제2회 졸업생이 되는 셈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빨리 대학을 마치고 실사회에 나가는 길도 있었지만 장차 작품을 쓰기 위해서라도 외국문학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가 필수조건이라고 판단되자 2년 정도 늦어진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때 전문부에서 학부로 편입한 동료는 김동길, 이근섭, 이명근, 송석중, 홍일 등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전문부 일 년 선배로는 배동호, 민관식, 유신일 등이 기억난다. 같은 대학이면서도 전문부와 학부 사이에는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게 가로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문부에는 전공과가 없지만 학부에는 그것이 세분화되어 있어서 학문의 범주가 비교적 분명하고 진로에도 정체성이 서 있다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겐 학부로 옮기면서 은근히 계획하는 꿈이 하나 있었다. 연극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해방 당시 연희전문학교에는 연전연극부가 있었다. 1946년 늦가을에는 대외적인 공연까지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연극을 보고 나서 크게 실망했다. 그러면서 언제든 때가 되면 제대로 된 연극써클을 조직하리라고 뜻을 굳히고 있었다. 그때 연극부에서 공연한 작품은 극작가 유진 오닐 원작 『지평선 너머』를 연전 출신인 윤준선(尹駿燮) 연출로 명동에 있는 시공관 무대에서 대대적으로 발표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공연 결과는 참패였다. 그 원인은 한마디로 학생극의 본분에서 벗어난 일종의 소영웅주의적 만용이었다. 학구적이라기보다 허영심과 자기 과신의 포로가 된 일종의 기성연극의 모방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미숙한 무대였다. 작품 선전도 그렇거니와 연출도 외부 기성인(물론 선배라는 인연도 있지만)을 기용한데다가 여자 연기자는 여학생이 없는 탓으로 외부에서 정체불명의 여인을 모셔놓고 적지 않은 개런티까지 지불하는 지경이고 보면 그것은 한마디로 학생극이 아니라 시정 흥행극의 모방에 불과했다. 나는 그 연극무대를 지켜보면서 ‘대학극다운 순수와 학문적인 체계화와 실험성’을 기반으로 하는 연극을 꿈꾸었다. 미래 지향적인 꿈과 신선한 창의력과 그리고 학구적인 연극으로 하나의 예술운동으로 승화되어야한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영문과에 재학 중인 동료 구선모, 박상필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며 연전연극부의 멤버이기도 한 김병규, 모개수, 신태민, 장운강, 정준 등을 규합하여 1957년 봄 연극써클을 탄생시켰다. 그게 바로 연희극예술연구회의 탄생이었다. 우리는 연극반 지도교수로 동양사 전공이신 민영규 교수를 모셨다. 그리고 첫 발표회를 가지기로 뜻을 모았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연극부원은 모두가 남학생이며 여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전문부 시절에는 그래서 외부에서 여성을 초빙(?)했으리라는 짐작은 가면서도 우리마저 그 전철을 밟을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학부제도가 서면서 대거 여학생이 입학한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장차 연극무대에 서 주는 여학생만을 호시탐탐 노렸다. 어쩌다가 연극부에 가입할 의사를 타진하면 혼비백산 도망치는 게 그 당시의 보수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한 여학생에 화살을 꽂았다. 정치외교과에 적을 둔 호기수였다. 체격도 용모도 세련된 데다가 이미 KBS어린이 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전업 아나운서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뒤흔들게 했다. 아나운서라면 일단 우리말 구사법에 능숙할 것이고 그 지명도가 관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데 그다지 거부감이 없을 터인즉 우리 사정으로서 최대 최선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기수 양의 외모가 눈길을 끌었다. 그 당대 유행하던 헤어스타일 ‘긴 머리칼’에다 꽃자주빛 나사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마치 외국 영화에 나오는 스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어떻게 호기수를 설득시키느냐가 급선무였다. 나에겐 그런 자신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문득 신태민 생각이 났다. 신태민은 나보다 두어 살 나이가 어리지만 전문부 학생 신분이면서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는 명랑한 학생이었다. 카톨릭 성가대의 합창단이라 노래도 능숙하고 사교적이며 인상이 부드러웠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의 매너와 신문기자라는 직업은 누가 뭐라 해도 섭외자로서는 적임자였다. 나는 신태민에게 제의를 했다. 우리 연희극예술연구회가 사느냐 죽느냐는 바로 당신의 수완에 달려있으니 ‘호기수’를 함락시키라고. 그런데 뜻밖에도 호기수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 천우신조인가, 성모 마리아의 은총인가!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창단공연작품은 안톤 체홉 작 『청혼』을 내가 번역, 연출하고 호기수, 신태민, 모개수 주연으로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학생극답게 꾸미지 않고 소박하나 열의를 가지고 학구적인 시도로 연극을 공부하자는 우리의 순수한 시도가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났다. 교무처에서 공연장소로 내정된 ‘채플’은 사용불가하다는 통첩이 왔다. 신성한 채플에서 감히 연극을 공연한다는 건 기독교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교무처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교무차장은 일 년 전 입학시험 면접 때의 그 시험관이신 서두수 교수님이 아니신가. 그러나 서 교수님은 전혀 내색도 안하시고 그 냉담한 말투로 나를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학교 내에서, 그것도 신성한 채플에서 연극공연을 한다카이 그게 말이 되나? 신성한 채플에서 무대에 못질하고 객석에서 담배 피우고… 그게 어디 될법한 일인가 말이다. 차 군… 안 그러나?”

나는 순간적으로 그분의 반대 이유를 눈치 채자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애걸부터 했다.

“교수님, 절대로 무대에다 못질 하거나 담배 피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제가 천지신명에 맹세해도…”

“차군, 그래 단호하게 말했다가도 나중에 약속 이행 안했을 때는 우짜겠노?”

“자퇴하겠습니다! 그러니 교수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학교당국에 폐 끼칠 일은 안 하겠습니다. 발표회 경비도 자체 부담으로 하겠습니다! 학교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은 절대 안 하겠습니다. 그래 여늬 대학의 연극처럼 극장을 대관하는 방법보다 교내 발표회를 택했습니다. 교수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승낙해주십시오! 교수님!”

서두수 교수는 그 특유의 비시시 웃음을 띠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차군은 극작가보다는 배우가 되는 게 제격이겠군!”


나의 대학생활은 쉴 날이 없었다. 연극 말고도 문학 써클인 새마을문학회의 동인으로서 정기적인 집회에 나가야 했고 기성문인들을 초빙하여 강연회도 가졌다. 문학회 동인은 공교롭게도 나 한 사람만 학부였고 모두가 전문부 문과 학생들이었다. 노영칠, 최기섭, 최연택, 최준 등이 기억에 남는 이름들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노영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민청(民靑)에 가입하였던 그래서 문학가동맹과도 간접적으로 손이 닿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정치적인 색채를 과시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오직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수강신청도 선택과목으로 국문과의 창작론은 거의 빼놓지 않고 수강했었다. 염상섭, 유치진, 이무영 등 당시의 대가들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되었고 특히 유치진 선생으로부터 희곡론 강의를 들음으로써 희곡문학에 관한 창문이 비로소 열린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러나 영문과 교수 가운데서도 내가 직접 강의를 받았던 분도 빼놓을 수 없는 권위자들이었다. 최재서, 박술음, 권중휘, 이인수, 김도성, 그리고 영작문은 미세스 언더우드 등으로, 특히 이인수 교수의 T. S 엘리옷 강의는 나의 문학 세계에 자극을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불행히도 6·25 동란으로 본의 아니게 짧은 생애를 마친 일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슬픈 추억이다. 그런데 교수초빙 문제로 학생들 사이에선 심심찮게 불평의 소리가 흘리나오곤 했다. 강사초빙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해방 전에 일본군국주의에 현실적으로 협력한 문인들이 끼어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모르면 몰라도 문학가동맹과 관련이 있는 학생들 쪽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누가 되었건 우리의 왕성한 학구욕을 충족시켜주는 분이라면 무슨 상관이겠는가라는 측면에서 그분들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새마을문학회에서 가졌던 초빙 문학 강연 중 기억에 남은 이벤트가 두 번이었다. 하나는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던 평론가 김동석(金東錫)과 재미작가인 강용흘(姜鏞訖)의 초빙 강연회였다. 김동석은 문학가동맹 측을 대표하는 평론가로 당시 반문학가동맹 문인으로 고군분투하던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와 쌍벽을 이루었던 존재였다. 이른바 ‘순수문학론과 민족문학론’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평론가였다. 요즘도 그 잔영이 남아있는 ‘순수와 참여’, ‘민족주의 문학과 순수문학’의 논쟁은 이미 1957년에 우리가 경험한 문학적 이슈였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시간이 되어 반대파 학생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자 그 문학 강연회의 실질적인 기획자로 알려진 영문과 교수이자 시인인 윤태웅 교수가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좌익문인을 무슨 이유로 초빙했는가라는 책임추궁이었다.

그런가 하면 재미작가 강용흘은 뜻밖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가 미국에 건너가 1920년대에 영문소설 『草堂』(Grass Roof)을 발표한 경력도 경력이려니와 그분과 함께 오신 시인 설정식(薛貞栻) 역시 영문학자로서도 평가받는 분이라 학생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작가 강용흘은 영문학뿐만 아니라 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강연 중간에 가끔 암송한 한시와 우리 시조의 수려한 표현력은 그 기교에 있어서 수십 년 동안 외국 생활에 젖어든 사람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학을 그토록 정확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그런 분이 해방조국의 재건에 꼭 필요한 인사일 거라고 한결같이 믿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당시의 실권자였단 이승만(李承晩) 박사와의 불화로 인해 본의 아니게 미국으로 추방(?)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1966년 여름, 미국 방문길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정치와 예술이 무슨 상관이냐고 비분하던 노작가 강용흘의 생각이 절로 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겨레와 나를 생각하지 않은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서양의 문화나 예술에서 표피적인 지식만 습득하거나 기술적 전달 만으로 한 시대를 앞서가고, 민족을 영도하고 있는 양 오만과 독선과 사리사욕의 포로가 되었다면 그것은 야망가일뿐 정치가가 아니라고 역설하던 노작가 강용흘은 평생의 과업으로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만 남았다고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인이 되었고 그 문학도 이름도 망각의 피안에서 떠돌게 되었으니 새삼 인생무상을 실감케 하는 나의 슬픈 추억의 한 토막이기도 하다.

나는 영문과에 적을 두었지만 동기생들과의 교류는 그다지 끈끈한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생활의 패턴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를 마치면 다음 공연작품의 준비를 해야 했고, 시내의 극 중에서 기성극단의 공연을 관람하거나 연극인을 만나는 게 일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닌 말로 한 끼 밥을 굶을 수는 있어도 보고 싶은 연극은 놓치기는 싫었던 게 내 생활이었다. 만나고 싶은 연출가, 극작가, 그리고 배우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그렇게 즐겁고 느긋할 수가 없었다. 궁극적으로 나는 학교보다는 연극이 본업이었다. 그 연극이 연극동맹 산하이건 아니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관객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파나 악극은 오락일 수 있어도 연극은 예술이어야 한다고 배웠고 또 믿었다. 그 본의는 동시대의 관객과 거리가 먼 낡은 연극이 아닌 지금의 우리에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연극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일제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더라도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그 틀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숙방에서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 나의 대학시절의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학생시절에는 전공과목 이외에 한두 가지 취미 생활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없었다. 등산, 당구, 운동, 담배, 술 등 접근할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 가운데는 연극의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사람도, 기회도 시설도 없는 광야에 서 있었다. 나는 홀로 떠내려가는 조각배와도 같다고 쓰게 웃었다. 연극 전문서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사할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흉금을 털어놓고 뜻을 허락할 친구 하나 없는 나에게는 일본어 서적일망정 그것을 섭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충무로에 나갔다가 구입한 『근대극전집』이 그것이다. 1927년 일본 제일서방에서 핸릭 입센 탄생 백주년기념으로 특별 간행한 42권 전집이었다. 그 안에 세계 각국의 명작이 망라되었고 부록으로 무대사진첩까지 따라붙었으니 그 책만 독파해도 연극의 진수에 한 걸음 접근할 수 있다고 결심을 굳혔다. 따라서 그것은 책이 아니라 나의 가정교사 격이었다. 화려하고 탄탄한 장정부터가 고풍스러운데다가 나로서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전 세계 각국의 대표희곡이 그 안에 숨쉬고 있으니 그것은 곧 나의 연극을 향한 길에 또 하나의 길을 닦아준 격이었다. 그러므로 희곡을 읽지 않고 연극을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세상에 어떤 희곡이 있었던가도 모르면서 극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무지와 무모와 무정견을 깨부시게 하는 그 책을 나는 평생의 스승으로 섬기며 대학생활을 계속하였다.

1949년 여름, 극작가 유치진 선생께서 나를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문총(文總)사무실이었다. 문총이란 전국 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의 약칭이다. 가을에 ‘전국 남녀대학생 연극 경연대회’를 계획 중이니 연희대학교 연극부도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권유였다. 일 년 전 우리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셨던 유치진 선생의 분부였다. 해방 후 처음 있는 대학극 경연대회이니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유 선생 얘기로는 참가단체에게는 제작비 일부지원이 있을 것이며 연출이나 미술 제작에는 필요에 따라 주최 측에서 인력동원을 해줄 수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으리라는 간곡한 권유였다. 나는 학교로 돌아와 『연희극예술연구회』 동인끼리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의논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회원들은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발표회를 가졌지만 모두가 소규모의 교내 발표회 형식이었고 외부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실력을 과시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라는 중론이었다. 나 역시 동감이었다. 그 동안 체홉의 『결혼신청』, 듀갈의 『무리유 할아버지의 유언』, 그리고 크라이스트의 『깨어진 항아리』 등을 발표하여 연희극예술연구회가 교내에서의 존재를 과시한 건 사실이나 외부진출이 없었던 것은 선의로는 학구적인 겸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의 야망에 불을 붙이도록 부채질한 연극학회의 권유는 우리를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나는 전체회원의 의지를 대표하며 유치진 선생을 찾아갔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레퍼토리 선정이 난관이니 작품을 천거해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자,

“학생들은 흥행극이나 저속한 신파극으로 갈채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연극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있다면 희랍극을 해보지!”

“희랍극이라뇨?”

“세계 연극의 역사는 뭐니 뭐니 해도 희랍의 비극이나 희극이 그 근원이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해보는 게 어떤가?”

“오이디푸스왕?”

“어렵겠지만 학생들끼리의 작업이 힘겨울 것 같으면 내가 한 사람 소개하지. 허집(許執)이라는 젊은 연출가 지망생이지. 일본대학 예술과 출신으로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니까 협력해 줄 걸세!”

이렇게 해서 제1회 전국 남녀 대학극 경연대회의 참가는 순풍에 돛단 듯 진행되었다. 참, 그러나 희곡 『오이디푸스왕』의 우리말 번역은 출판된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번역을 하되 시간이 1시간 전후를 넘을 수 없다는 규정을 감안하여 초역(抄譯)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연출도 내가 겸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는 대학 총장의 승낙서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 당시 우리 대학의 총장님은 엄하고 권위주의로 정평이 나있는 백낙준 박사님이었다. 누가 감히 그 어른 앞에 나갈 것이며 참가 동의서를 받아낼 것인가. 회원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결국은 내게로 그 중책이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일이 이쯤 되면 몸으로 부딪혀 볼 수밖에 없었다. 총장과 학생의 대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가당치도 않았다. 더구나 연극을 하게 해달라는 동의서를 받아내기 위해서 하늘과 같은 존재이신 총장을 면담하다니 상상도 못할 만큼 가슴조이고 어깨가 무거운 일이었다. 백총장의 그 만물상처럼 굴곡과 변화가 무상한 표정은 처음부터 냉담했다.

“학생, 왜 연극을 하겠다는 거야.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책을 읽어요 책을! 그리고 연극을 하자면 경비도 제법 들 텐데, 우리 대학 형편으로는 그런 비용을 충당할 예산이 태부족하니 그렇게 알고…”

백 총장께서는 이미 단안을 내리신 듯 자리에서 일어나시려는 자세였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재정 지원 없어도 됩니다. 그냥 참가해도 좋다는 승낙만 해주십시오. 경비는 저희들이 어떻게든 마련하겠으며 학교 측엔 단돈 일 원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총장님 싸인만 해주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모르면 몰라도 백 총장으로서는 학교 측에는 단돈 일원도 누를 끼치지 않겠노라는 나의 처절한(?) 결의가 다소는 공감이 되었는지,

“약속 지키겠나?”

“예! 절대로 지키겠습니다! 총장님!”

나는 백낙준 총장님의 싸인을 받아들고 연습실로 뛰어갔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완고하고 원칙주의고 대학의 진리를 존중하시기로 이름난 백낙준 총장님을 함락(?)시킨 나 또한 보통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희극예술연구회』가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진부를 타진하는 데 성공의 확률은 50퍼센트도 못 미쳤다. 그것은 바로 제작비가 문제였다. 학교 측에는 단돈 일 원도 신세 안 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우리는 막연했다. 연습비나 식대는 각자가 부담할 수 있겠지만 장치, 의상, 소품, 효과 등 제아무리 절약을 한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학도호국단 단장인 장순덕(張淳德)을 찾아갔다. 그 당시 학도호국단은 학교 측에서 제정한 적지 않은 예산을 책정 받아 체육, 학술, 예술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관장하는 주무세력이었다. 그리고 호국단 간부쯤 되면 수업에 안 들어가고 무슨 섭외다 회의다 출장이다 하며 돈 씀씀이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더구나 좌익학생들의 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을 우익 쪽으로 전향시키는 일에도 호국단은 특별한 권한마저 부여받고 있었다. 더구나 감찰을 맡은 학생이란 체육부 학생으로 완력과 금력을 겸비하여 학원 내외에서는 특별한 존재였다.

장순덕 군은 외교학부 학생이었으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는 이해와 동조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우리 극회의 처지와 이번 경연대회의 의의를 강력 주장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장순덕은 장고 끝에 내 손을 꼭 쥐었다.

“차형! 걱정 말라고! 궁하면 통하는 법이니깐! 헛허…”

장순덕의 호탕한 웃음은 나를 구해준 셈이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겪은 결과는 『연희극예술연구회』의 역량과 모교의 명예를 만천하에 떨쳤다. 우수상, 연출상, 연기상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연출상은 나, 연기상은 신태민이 차지했다. 그 무대가 얼마나 학교 당국으로서도 큰 관심거리가 되었는가는 이 한 장의 기념사진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시상식이 끝난 명동 시공관 무대에는 정석해, 조의설, 염은현, 민영규 교수님들과 장순덕 호국단단장과 그 간부들, 여주인공을 맡았던 영문과 민창기와 언니 민순기, 연극계에서 유치진, 허집, 최진 등이 대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사진은 결과적으로 나의 운명의 전환점이자 새 인생의 출발점을 명기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사진 생략; 편집자 주).

제1회 전국 남녀대학 연극대회의 여파는 결코 내 개인적인 영광이나 경력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희대학교가 연극운동에도 획기적인 탑을 쌓는 데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이 행사가 계기가 되어 그 후 연극계 영화계 방송계에 발자취를 남긴 역군들이 참가한 아홉 개 대학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기영 (서울대 의대)  ― 영화감독

 최찬봉 (고려대)         ― 방송인

 신태인 (연희대)       ― 언론인

 최무령 (중앙대)       ― 배우

 박현숙 (중앙대)       ― 극작가

 이경재 (서울치과대)   ― 방송극작가

 조동환 (서울약대)     ― 무용평론가

 조성하 (동국대학)     ― 배우

 이인선 (숙명여대)     ― 시나리오 작가


이상과 같은 많은 인재가 먼 훗날 이 나라 예술계에 기여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자부심과 긍지를 금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가지 괴이하고도 납득이 안가는 사건이 나를 놀라게 한 것이다. 『연희극예술연구회』가 해마다 발표회를 가지는 공연 팜플렛에서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연희극예술연구회의 활동기록이 말살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세대학의 연극사는 1953년부터 시작이 되었을 뿐 그 이전의 기록은 깡그리 사라진 것이다. 작년에 연세 개교 100주년 기념공연의 프로그램에서도 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연세영문학과가 60주년을 기리는 뜻에서 책자를 발간하는 의의를 하나의 애교정신임을 감안했을 때 이것은 누가 봐도 잘못된 과거사로 지적받아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깡그리 말살하며 그렇게 일을 저질러놓고도 나 몰라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이 엄청난 수모와 굴욕의 역사를 되짚는 나는 새삼 연세영문과 60년사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자랑스러움을 실감한다. 1950년 6월 그 참담한 민족의 비극이 아니었던들 나는 영문과 제2회 졸업의 영광을 친구들과 함께 누릴 수도 있었으련만 4학년 중도에 피난차 시골로 내려가야만 했던 개인사정은 졸업도 뒤늦게 1966년에야 이루어진 서운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실패나 치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약 5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던 백양로의 추억과 낭만과 꿈의 잔영들은 변함없이 나를 행복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아, 60년의 시간의 길이와 무게보다 더 길고 무거운 것은 나의 예술과 삶의 요람이 그 숲에 있고 잔디 위에 누워 있고 담벽에 새겨져 있기에 그것도 나의 고향집과 다를 바 없다. 내게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옛집이 있다는 그 한 가지 만으로도 나는 축복 받은 인간이라고 감사하면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