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뉴 닫기
 
Community

커뮤니티

"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제1부 40년대 - 내 마음은 언제나 연희의 언덕 위에 (47 배동호) (2008.03.2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추억 속으로

제1부 40년대  

내 마음은 언제나 연희의 언덕 위에

47 배동호


들어가는 길은 더욱 멀었다. 철도 굴 위의 높은 고개에 서서 바로 앞에 조그마한 신촌역을 내려다보고는 바른 쪽 숲속에 교사가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해방된 늦은 가을이다. 나무 밑 흰 길이 끝나는 곳에 돌층계가 보였다. 그러나 교문이 안 보인다. 입학원서를 다시 만져보았다. 우리말로 된 연희전문학교 입학원서였다.

학관 위에 올린 태극기 밑에서 입학식이 거행된다. 일제의 국민복, 군복, 학생복, 군화 지가다비에 중절모자도 간간이 보였다. 중국과 만주로 끌려갔던, 일본으로 징용 갔던, 광산에, 초등학교에 묻혀있던 친구들이 갓 중학 4년을 마친 어린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것을 이미 복색이 말해주고 있었다.

겨울방학 전까지 강당에서 국어, 국사, 영어의 전체 합동강의가 있었으며, 때때로 저명인사의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말로 공부를 하게 되다니 하고 말을 하다가 문득 일본 놈 선생이 뒤에서 욕지거리하며 쥐어박던 어두운 중학교 교실이 아닌가하고 놀라 뒤를 돌아보며 악몽 뒤의 안도감을 맛보곤 했다. 일제의 혹독한 박해를 받아온 선생님들의 열렬한 강의에는 때로는 박수로 우선 보답하고 싶었으며 실지로 감격에 넘쳐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느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산상수훈의 진리를 설교한 기도회 시간은 진리의 세계를 우리에게 계시하였다.

과거의 연희와 미래의 연희를 동시에 가슴에 느끼며 자유와 진리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입학 당시의 그 잡다한 복색, 그 현저한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 곧 우리를 하나로 묶는 한 분위기가 생겨났음을 직감하게 됐다.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운 언덕과 숲이 여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연희로 가는 언덕길은 멀었으나 희망의 길이었다. 전차를 못 타는 아침에는 집에서 서대문까지 그리고 신촌까지 걸었다. 이대생과 같은 길을 통학하는 것은 즐거웠다. 시험 때엔 더욱 이대생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다음 해에 대학교가 설립됐다. 우리들은 각 대학을 학원이라고 칭했다. 전문부 1년을 수료하고 학원에 들어가 4년의 대학과정을 마칠 것인가 전문부 3년을 졸업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고 학원의 첫 남녀공학에 대한 시비로 화제가 옮겨갔다. 여학생들이 과연 입학해 들어왔다. 여학생에게 거친 짓들은 안 했고 모두 각기의 친절을 보였다. 연희의 분위기는 더 부드럽게 변했다.

전문부를 졸업하고 학원 2년에 편입시험이 있었다. 학원에 들어가 처음부터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제야 학문의 전당으로 바로 찾아 들어섰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해방 후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도 거의 하루의 휴강도 없었다. 그러나 그 간에 낯익은 얼굴들이 이 아름다운 언덕 위에서도 숲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은 역시 슬픈 일이었다. 원 부인이 흉탄에 쓰러지신 그날 연희의 숲도 음산했으며 땅은 몹시 질었다. 장례식 날은 모진 바람이 늦게까지 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날이 흘러갔다. 어두운 예감에 가슴이 떨렸다. 드디어 맑은 이른 여름 아침에 이 예감이 실현되었다. 6·25는 정말 고달픈 날이었다. 그 다음 날 노천극장에서 각급의 대의원이 최초로 선출한 학도호국단단장은 재회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비장한 말끝에 무기한 휴학을 선언하였다. ―어디를 가든지 마음은 연희의 언덕 위에 숲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