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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추억 속으로 - 제1부 40년대 - 신촌 6년 (46 황규식) (2008.03.2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제1부  40년대 초창기

신촌 6년

46 황규식


1) 新村 6年

(1) 해방 전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졌다. 연희전문학교는 1942년 조선 총독부가 적산(敵産)으로 처분하여 일인 교장이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4년 5월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필자는 그 해에 입학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학년을 수료하자 학도 근로동원이라는 미명아래 1945년 3월 평양 선교리 소재의 육군 항공창에서 노역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카미카제 특공대원(神風 特攻隊員) 탑승기의 부족, 조종사의 사기 저하, 기울어져 가는 태평양의 전황으로 미루어 패전의 징후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니 연희전문은 오욕(汚辱)의 1년 반을 씻고 다시 그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2) 연희를 택함

1945년 11월에는 4개 학부(문학, 신학, 정경상학, 이학)를 두고 학부마다 여러 학과가 생겼는데 문학부에는 국문, 영문, 사학, 철학과가 개설되고 각 학부 및 학과의 선택권을 재학생들의 자의에 맡겼다. 1946년 필자는 영문과 2학년을 수료하였는데(전문부 졸업은 3년임) 바로 그 해 8월에 연희대학교가 탄생하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자 필자는 문과대학의 전신인 문학원의 정외과와 영문과의 택일에 있어서 첫 번째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젊은 까닭에 이끌리기 쉬운 부나 권세, 명예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What is Life? How to live”라는 과제를 규명할 것인가의 틈바구니에 끼어 힘들었으나 결국 영문과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전문학교 2년 수료자는 구제대학(3년제) 입학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3년제)로 진학하느냐 아니면 연대(4년제)를 선택하느냐를 두고 두 번째 갈등을 하게 되었다. 연대를 택할 경우 1년을 더 수학해야 하니 부모님께는 죄송하였으나 그 당시 서울대의 국대안 반대로 인한 정기휴교는 심각한 도를 넘기도 했다. 오랜 생각 끝에 정들었던 연희 동산을 선택하여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3) 과도기의 진통

해방이 되자 일어를 사용해왔던 교수나 학생들이 갑자기 우리말로 바꾸니 웃지 못할 촌극들이 속출하였다. 전문부는 물론 대학 입학 후에도 한동안 이런 일들이 연출되었는데 이것을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할는지? 이를테면 어떤 낱말을 우리말로 읽어야 할 경우 일본식으로 발음하는 따위가 빈번했고 심지어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진부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언어의 침탈이 그 얼마나 가공한가를 통감케 했다.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것은 초등학교에서 주 한 시간의 ‘조선어독본’으로 겨우 연명해 왔던 터라 우리말에 대한 언어 훈련이 부족한 학부 1년생에게 「한글맞춤법」에 의거한 대학국어란 몹시 부담스러웠다. 특별히 국어의 정체성을 강조하시는 연전 3회 졸업인 김윤경(金允經) 교수의 경우, 정답 이외의 글을 서술하면 0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기도 하였다. 당신께서는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은 일일이 그 수효를 카운트하여서 채점하시니 마이너스 점수가 생기는 진기한 일도 있었다. 오히려 자신 없으면 쓸데없는 군말은 적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다. 따라서 60점을 받아 낙제를 면하기란 A학점 따기 못지않게 힘든 일이었다. 당시는 원망스럽기도 하였으나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우리말을 끝까지 지키려는 철학과 신념이 남다르심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4) 영문학을 맛보며

일본은 명치유신을 계기로 많은 영문학자들을 배출하여 이미 학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필자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영어영문학 논문집』 제1집은 1931년 연구사 발행으로 동경대학 소재의 일본영문학회가 편집한 것이다.

해방 전 한국에는 영문학 관련 학회는 전무한 상태였고 더러 영미에서 돌아온 학자는 있었으나 그 숫자는 드물었고 거의 일본 유학의 학자들이었다. 한국동란 이후에는 영어권으로 많은 영문학자들이 연구 차 또는 유학길로 떠나기도 하였고 학회가 결성되며 점차 장족의 발전을 기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은사님들의 의욕적인 열정으로 영문학의 방향(芳香)을 즐길 수가 있었다. 국내파 교수들은 물론 귀국하는 여러 영문학자들이 연희 전문에 문과가 있었던 탓인지 대체로 일단은 연대를 거쳐 타 대학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기에 우리로서는 훌륭한 학자들에게 사사할 수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상기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영어영문학에 관련된 아무런 토대가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요즈음 같은 영어영문학 관련 교과서, 교재, 연구자료, 참고문헌 등의 수급상의 속도나 물량 면으로 볼 때 당시로서는 출판 등 여러 가지 문화적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교재 등을 입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교재나 참고도서는 주로 안국동과 광화문통의 고서점을 활용하였다. 박술음(朴述音, 연전 문과 5회 졸업) 교수의 영문학사와 영어사는 90분 동안 판서로써 강의하셨는데 달필로 통상 두 판을 쓰셨다. 영문학 연습의 교재로는 사이토 다케시(齊藤 勇) 편의 『영국시문선』(English Poetry and Prose)이 있었는데 수강자가 10명 내외였기에 상기 고서점을 뒤져서 서로 소재를 알리면서 힘겹게 마련하였다. 박 교수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의 한 토막으로, 연보전의 운동장에서까지도 원서를 뒤지며 면학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언젠가 미군 부대를 다녀와서는 “백인이나 흑인들이 제 이야기를 잘 알아듣더군요.”라며 좋아하셨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석을 부를 때면 학생들의 이름 뒤에 반드시 “씨”자를 붙여서 존대어로 호명하시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연습시간에도 존대어로 지명하시는데 분명히 서툰 번역이고 해석일 텐데도 “잘 했어요.”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니 은연중에 학생들에게 신사도(gentlemanship)를 심어주신 것으로 안다.

최재서(崔載瑞) 교수의 경우 『영길리비평』(英吉利批評, An English Criticism)의 교재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시학』(Poetics)과 매슈 아놀드(Mathew Arnold)의 『비평론』(Essays in Criticism)이었다. 프린트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때라 원지를 철필로 써서 좋지 못한 지질의 갈색 갱지에 등사한 것이니 털면 우수수 모래가 흘러내리며 글씨의 선명도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아놀드가 시정신과 비평정신을 긴밀하게 결합시킴으로써 비평사에 있어서 현대비평의 선구자가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호근(李晧根) 교수께서는 영국소설을 강독하셨는데, 주로 늦은 오후 시간이었기에 버스도 없는 때였고 가을에는 이대 고개를 넘어 북아현동을 지나는 것이 정코스였다. 몇몇 호주가들은 약주를 좋아하시는 교수님과 동행하여 한잔 생각날 쯤엔 장덕조(張德祚) 여류소설가가 경영하는 빈대떡 집으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거나하게 취하게 되면 교수님의 인생론과 문학론에 도취되어 철없이 호연지기를 토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꿈과 이상도 컸던 때였다.

권중휘(權重輝)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과 『맥베스』(Macbeth)를 해설해 주셨는데 희곡은 소설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급박하고 압축된 삶의 모습과 의미를 감득케 했으니 색다른 기쁨을 더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모든 유형의 인물을 빈틈없이 훌륭하게 묘사한 극작가였으나 위대한 종교가나 성인은 어느 작품에도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영시는 김상용(金尙鎔) 교수의 낭만시 감상을 통해서 가슴 벅참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간혹 한문을 곁들이며 근엄하면서도 차분하게 문학개론을 강의하시던 이양하(李敭河) 교수의 모습, 교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T. S.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다루시며 열변을 토하시던, 어딘지 모르게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듯한 이인수(李仁秀) 교수의 멋있는 풍모, 불의의 흉탄으로 애석하게도 돌아가신 사모님의 반지를 당신의 손가락에 낀 채 쓸쓸하지만 태연하게 미국문학사를 가르치시던 원한경(元漢慶) 교수의 인자하신 모습, 연전 11회 졸업으로 런던대학 출신인 김선기(金善琪) 교수의 신사다운 자세와 두툼한 오토 예스퍼슨(Otto Jesperson)의 『필수 영문법』(The Essentials of English Grammar)을 왼쪽에 끼고 들어와서 교탁에 놓고 특유의 콧소리로 음성학을 강의하시던 말끔한 풍채.

이렇듯 교수님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니 덧없이 흘러간 60년 세월이 오늘 같기도 하여 감회가 무량하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의 무궁한 웅비와 진전을 확신하고 기원하면서 이만 작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