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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추억 속으로 - 제1부 40년대 - 60년 전을 돌이켜 보면서 (46 김동길) (2008.03.20)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제1부  40년대 초창기

60년 전을 돌이켜 보면서

46 김동길


내가 연희대학교 전문부 문과 1학년에 입학한 것은 1946년 여름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동안 북에서 살다가 독재자 김일성 밑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지내고 다시 기차를 타고 철원까지 왔다. 거기서부터는 걸어야만 했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논두렁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38선을 넘던 때에 나는 아직 만18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다.

그 해 연희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이 학교로 몰린 것은 일제 말에는 대학의 문과는 학생모집이 없었고 오로지 이공계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연희대학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라고 하여 더욱 인기가 높았던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캠퍼스에는 건물이 3개 밖에 없었는데 신입생들은 본 캠퍼스에서 좀 떨어져 있는 치원관(致遠館)이라는 목조건물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문과 1학년생들 중에는 대단한 청년들이 여럿 있었던 중에도 차범석, 임명진, 윤영교, 송석중 등은 두드러진 존재들이었다. 동급생 차범석이 수필을 써서 우리들 앞에서 낭독하던 모습, 그 음성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거늘 벌써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구나. 그는 연극에 투신, 많은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들이 무대에 올라 명실공히 이 나라 극작가의 대부가 된 것이다. 임명진, 윤영교, 송석중은 그때 이미 영어 실력이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그 중의 두 사람은 외교관이 되어 국제무대에서 활약을 했고 송석중은 영어학자가 되어 미국 어느 대학에서 여러 해 가르치다 세상을 떠났다.

김선기 교수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심인곤 교수에게서 영문법을 배웠다. 윤태웅 교수가 문학을 강의했는데 그의 사상적 경향이 못마땅하여 우리 몇은 끝까지 반대 입장에 있었다. 젊은 김창수 전임강사가 과학개론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말을 안 들어 가끔 매우 비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호근 교수는 영시를 강의하면서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릴 때마다 한 번씩 고개를 흔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도 내 귀에 생생하다. 국사를 가르친 홍순혁 교수는 문과 1학년의 담임이 되어 학생 개개인의 사정을 캐묻기도 하였다. 윤응선 교수의 옛 가사와 옛 시조 강의도 기억에 남아 있다. 교무처장이었던 서두수 교수는 일본문학 『겐지모노가다리』 연구의 권위자라는데 우리에게는 국문학을 강의하였다.

당시의 전문부는 3년제이었고 2년을 마치면 본과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1학년을 마칠 무렵에는 1학년 수료생들에게도 본과 진학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고 하여 몇몇 학생들이 응시하였는데 나는 가까운 친구 이근섭과 함께 영문학과에 지원하여 입학이 허락되었다. 그때부터 본 캠퍼스 학관인 언더우드 홀에서 강의를 받게 되었다. 큰 강의실 하나에 문과대 1학년 학생이 다 모여 교양과목을 수강하였으니 학생 수가 고작 1∼2백 명이었을 것이다.

이순탁 교수는 월북한 백남운과 경제학계의 쌍벽을 이루던 학자였다. 그의 경제원론 강의도 기억에 남아 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1848년인데 이 교수는 1948년이라고 흑판에 적어 모두 웃었다. 경제원론을 배우던 해가 1947년이었기 때문에 아직 오지도 않은 1948년이 황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석해 교수는 본디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우리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도대체 흥미 없는 과목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대게 딴 생각하며 늘 웅성웅성하였다. 뒤에 충남대학 총장이 된 민태식 교수가 한문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을 향하여 “한문을 배우는 데 너무 시간을 많이 소비하지 말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영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일러주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뒤에 월북한 정진석 교수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강의했는데 많이 배우지는 못했다.

2학년으로 3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보다 많은 영문학자들을 대하게 되었다. 문학평론의 대가 최재서 교수, 영문법의 권위자 박술음 교수, 영시를 서정적으로 학생들에게 풀이해 준 김척도 교수, 희랍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고병려 교수 그리고 강사로 한 강좌를 맡아 강의해 준 서울대학의 권중휘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이화대학의 김상용 교수는 영시를, 그리고 당대의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실력을 가졌다던 고려대학의 이인수 교수는 런던대학 출신인데 영문학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은 분이었으며 흑판에 쓰는 그분의 펜맨쉽에 학생들이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 사변이 터지던 해에 강의를 시작한 김기림, 이학수 두 교수는 납북된 것이 사실이고 이인수 교수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고 들었다.

학생시절에 내가 심취했던 시인은 미국 시단의 기린아 월트 휘트만이었지만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용재 백낙준 총장이었다. 스팀슨 홀 2층에 조그마한 강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총장 시간이 따로 있어서 백 총장께서 그 시간을 통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사람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느냐? 어느 학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칼슘이 얼마, 지방이 얼마 등등 다 합쳐야 2달러 몇 십 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그 분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인간이 지닌 정신의 가치, 그것을 소중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그 시간에 앉아서 총장 말씀은 안 듣고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던 친구들은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그 당시에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2학년 때인가 캠퍼스 서쪽에 자리잡은 원한경 박사 댁에서 지도층 여성들의 파티가 있었는데 거기에 괴한이 침입하여 모윤숙 씨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는데 그 총알이 빗나가 원 박사 부인을 살해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 부인에게서 영작문을 배우고 있었다. 3·1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오라는 숙제를 다 끝내기도 전인데 그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었다. 그때 학교의 노천극장에서 원 부인의 추모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음성학을 가르치던 김선기 교수가 나를 학생 대표로 그 식전에서 추모사를 하도록 주선하였다. 나는 난생 처음 그런 큰 행사에서 연설을 한마디 하게 된 것이었는데 내 추모사를 들으면서 백낙준 총장께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그런 내가 드디어 요새 말로 하자면 총학생회 회장에 입후보하여 당선된 것이었다. 그때에는 총학생회라는 말이 없고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제창한 일종의 전시 군사훈련의 개념에 따라 학도호국단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임명제이어서 학교에서 정외과의 장순덕 형을 학도대장으로 임명했었는데 그 다음 2대부터는 각 과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에 의하여 선거로 학도대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폭력이 난무하던 어지러운 때였지만 입후보한 나는 강한 정견발표를 하였고 투표결과 영문과 학생이던 내가 압도적 다수표로 학도대장에 당선된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에 접어들었다.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 혁신의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6·25 사변이 터지는 바람에 회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동지들과 학교를 지킨다고 목총을 들고 학교건물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과대학의 박성래 교수가 학교 금고에서 여비를 얼마 꺼내서 주면서 “공산군이 서울 근교에까지 진격했으니 자네들은 잠시 남쪽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게”라고 하여 한강철교는 이미 부서진 뒤라 서강으로 하여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안양으로 수원으로 밤을 세워가며 피난 가던 그날이 꿈엔들 잊히리야.

부산으로 피난 가서 영도의 가교사에서 졸업장을 받아 당당히 연희대학교 영문과 졸업생이 되었지만 중공군 때문에 다시 피난길을 떠나기 전 얼마 동안 최재서 교수의 남산 댁을 찾아가 이근섭과 함께 얼마 동안 강의를 받은 것 외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이렇다 할 강의를 받아보지도 못하고 졸업한 셈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Fifty Famous Stories로 시작한 나의 영어 공부가 브론티의 Jane Eyre를 거쳐 셰익스피어를 읽게 되었고 토마스 칼라일의 Sartor Resartus를 애독서로 삼게 되었으니 연희대학교의 영문학과가 나를 이만큼 키워준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지만 연희동산에서의 영문학도 시절이 그립고도 그립구나. 테니슨과 함께 “Tears, Idle Tears”를 읊조린다. “And thinking of the days that are no more(돌아오지 못할 날들을 생각하며)” 이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