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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제6부 스승들과 인물들 (2008. 03.1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1장 기억 속의 스승들


대학교육의 핵심적인 요건들 가운데 하나가 스승의 존재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문과에서 선철(先哲)의 사표로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많은 분들에 대한 기억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한결같으면서도 개인에 따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 수 있다. 스승의 은혜를 차별적 선택을 통해 기린다면 이는 어불성설이요 또한 송구스러운 행위에 해당하지만, 현재의 여건으로서는 완벽을 목표로 한 만족스러운 언급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제4장―특히 “전직교수” 란―의 도입 부분에서 밝힌 내용과 근본적으로 같은 바, 그곳에서 채택한 방법을 이곳에도 적용하여 ‘80년대 이전에 퇴임하여 작고하신 분들’로 국한시켜 서술하려 한다. 이 분들의 교육 관련 약력은 이미 소개했지만, 여기서는 좀 더 포괄적으로 약력과 업적을 언급한 다음 그분들 생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본인들의 글을 가려 뽑아 수록한다. 본란의 취지에 맞는 본인의 글을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제자의 회고담을 대신 싣는다.


● 근엄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심인곤 교수

• 약력

1898년           평북 구성군에서 출생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0년           평북 선천 신성학교 교사

1946년∼1960년  연희대학교, 연세대학교 교수, 문과대학장

1961년           연세대학교 정년퇴임

1961년∼1984년    충남 천원군 광덕면 매당리에 은거

1984년           별세

 

• 저서

『새 하늘과 새 땅­나의 찬양 나의 기도』(서울: 정우사, 1982).


• 회고의 글

내가 아는 심인곤 선생님 (46 김동길)1)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되고 피차에 갖가지 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역시 선생과 학생의 사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사람―그것은 주종의 관계가 아닐 뿐더러 이해(利害) 관계는 더욱 아니다. 부모와 자녀야 피로 얽히었으니 그 사이의 애정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으나 사제지간의 정은 본능을 초월한 것이어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세상도 많이 변해서 근년에는 학교 선생님들도 파업을 단행하고, 월급을 올려주지 않으면 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고 버티는 판이니 소위 잘 산다는 나라들에선 더욱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졌다 하겠거니와 공맹지도가 위세를 떨친다는 아세아의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스승다운 스승, 사명감을 가지고 교단에 서는 선생이 과연 얼마나 되며, 존경의 눈빛으로 선생을 바라보는 학생이 그 교실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나도 이제는 구시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내 일생을 통하여 우러러볼 만한 스승을 나는 과연 몇 분이나 모셨는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열 손가락을 다 꼽기도 어려울 것 같다. 20년도 더 되는 내 학창생활에서 내가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 여러 백, 여러 천을 헤아릴 텐데 지금도 받들고 싶은 어른이 열 분도 안 된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떨꼬!

심인곤 선생님은 내개 평생 잊지 못할 뿐 아니라 언제라도 모시고 싶은 나의 스승이시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46년인가 47년, 당시 연희대학교의 지금은 불에 타 없어진 치원관(致遠館)에서였다. 언제나 감색 양복을 단정히 입으시고 검은 빛 타이를 매고 계셨다. 그리고 고색이 창연한 좋은 가죽가방을 들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 강의를 받은 것은 학관 103호실에서 영문법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책도 노트도 없이 초크 한 자루만 들고 들어오셔서는 사이또(齊藤)의 영어로 된 문법책을 한 자도 틀림없이 그대로 흑판에 적으면서 강의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 그 기억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암기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 후에 영문과 상급반에 올라가서는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을 강의 받았는데, “인간의 최초의 불순종에 대해”(Of man’s first disobedience)라고 하는 첫줄로부터 청산유수로 그저 다 외고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공자님은 경서(經書)를 몇 번이나 다시 끈으로 꿰매어 거듭거듭 읽으셨는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무슨 책이나 백 번만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하는 법이니 읽고 또 읽으라고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언제나 근엄하신 표정으로 교실 안팎에서 학생들을 대하셨으므로 학생들은 버릇없이 선생님께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성적은 얼마나 박하게 주시는지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과목에 80점만 맞으면 우등으로 자처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학생이란 예나 지금이나 성적에 신경을 많이 쓰는 법이고, 받은 성적이 예상보다 나쁘다고 담당 교수를 찾아가 따지는 학생이 흔히 있는 법이지만, 선생님 과목은 아무리 점수가 형편없이 나와도 찾아가 따지려는 학생이 없었던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선생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한문에 능하셔서 영문학 시간에도 가끔 한시(漢詩)를 읊어 영문의 참뜻을 밝히려 하시던 일도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흑판에 영어를 쓰시거나 한자를 쓰시거나 가늘게 예쁘게 단정하게 쓰셨다. 흔히 초크를 꽉 눌러서 흑판에 써서 초크가 부러지는 일이 많은 데 내 기억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특히 영어의 필적(penmanship)은 일품이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다. 영어 글씨에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노력도 많이 하신 게 분명했는데, 그런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선생의 품격의 엄숙한 일면을 말하여 주는 듯하였다. 글자 한 자도 허술하게 되는 대로 쓰시는 일이 없으시던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어딘지 유교적 선비나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일제하에서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셨으므로 직장에서 쫓겨나 오래 어려운 살림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크롬웰이나 밀턴 시대의 청교도라고 불러야 옳을지도 모른다. 유교도 절개 있는 고결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기독교처럼 순교자를 내지는 못했다. 사실 선생님에게는 순교자의 자세가 있었다. 만일 일제 때 성직에 계셨다면 십중팔구는 순교하셨을 것이다. 해방 후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에 큰 교회를 세운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때, 선생님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적절한 예를 들어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셨다. “아무리 요강을 깨끗하게 씻었다 해도 거기다 밥을 담아 먹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 한 마디 말씀으로 우리는 선생님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왜놈들의 잡신을 섬기던 더러운 장소에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지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연희대학교는 기독교대학이어서 정기적으로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간혹 연사로 설교하시는 일이 있었다. 그 시간에는 그 장소가 옥외이건 옥내이건 청중이 조용하고 분위기가 엄숙하였다. 그 까닭은 첫째 선생님의 인격을 학생들이 다 우러러보기 때문이었고, 둘째 선생님의 설교는 하도 준비가 잘 돼 있어서 마치 시 낭송을 듣는 유쾌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고를 완전히 외어 가지고 노트는 앞에 펼쳐 있었으나 들여다보시는 일이 없었다.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으로서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체격이 항우(項羽)를 닮아 우람하지 않았고 음성이 데모스테네스와 맞서게 우렁차지도 않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는 정성과 진실과 호소력이 있었다. 선생님의 설교를 들은 옛날 학생들은 그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말씀의 배후에는 선생님의 정직하고 고상한 생활이 있어서 그만한 힘이 있었다고 믿는다. 말만 잘하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아니, 그런 사람, 그런 선생, 그런 지도자가 너무 많아서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아닌가!

나는(나만이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나와 동감이겠지만) 내가 선생님에게서 배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4·19 후에는 내가 학교에 붙어있지 못하고 들락날락한 관계로 자주 뵙지도 못하다가 연 전에 한번 결심하고, 은퇴하여 사시는 천원군 광덕면의 댁을 김찬국 목사와 함께 찾아가 뵈온 일이 있다. 여러 해 만에 뵈었지만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다름이 없으시고 다만 치아가 많이 빠져서 이젠 노인이시구나 하는 느낌을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라는 성경 말씀 때문인지 선생님은 은퇴하시고 나서 서울에 계시지 않고 외딴 농촌 어느 농가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정말 조용히 여생을 사시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만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듯하다. 선생님은 이제 인간과의 대화에는 흥미를 잃으셨는지도 모른다. 학처럼 고고하게 늙어가시는 선생님!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넷이 되신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정정하시다.

내가 작년에 다시 교직을 떠나고 새재(鳥嶺) 가까운 첩첩산중에 은거중이란 소문을 들으시고 시 한 수를 지어 보내 주셨다. 그 한시를 우리말로 옮기시고 다음에는 또 영어로 번역해 주셨다.


   幽 居

   

白雲忘世亭 새재의 망세정은

脫俗三千丈 높고 높아 삼천장

辭栗首陽薇 영천수(嶺川水)에 귀를 씻고 수양미(首陽薇)를 먹으니

不憂地上霜 인간의 시시비비 들을 수가 있으랴.


Hanging a bower of oblivion

Three thousand feet above the earth

Retired from society

No news of right and wrong.

   

선생님은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시골 논두렁길을 홀로 산책하시며, 명상도 하시고 기도도 하시겠지. 옛날 연희동산에 사시던 때에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만은 하셨다. 그 습관은 철학자 칸트와 흡사하다. 우리도 아마 그 시간에 우리들의 변변치 못한 시계 바늘을 맞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고독하신 선생님! 아드님 한 분은 6·25 동란 중에 생사를 알 길이 없게 되었다고 하고 따님 한 분은 혼자되어 선생님을 모시고 있다고 들었다. 사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지난번 뵈러 갔을 때, “사모님은 안녕하세요?”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은 태연한 어조로, “벌써 천당에 갔어요”하고 말씀하셨지만 다소는 쓸쓸한 표정이셨다. 사모님은 정말 천당에 계신다고 선생님은 믿고 계시는 것 같았다.

선생님도 어느 날 천당에 가시겠지. 한국 사람들 중에 다만 몇 사람이라도 천당에 갈 수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선생님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이 붓을 놓는다. 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시다. 그래서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 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지주의 비평의 최고 지성인 최재서 교수

• 약력

1908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1933년           경성제대 대학원 수료

1936년∼1945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경성법전 강사

1936년∼1960년   『인문평론』지 주간으로 비평 활동

1950년∼1960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학과장 

1960년∼1961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원장

1961년           동국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50년∼1964년    아메리카 셰익스피어 협회 회원

1962년∼1964년    한양대학교 출강

1964년           별세

 

• 저서

『문학과 지성』(서울: 대동출판사, 1948). 『문학원론』(서울: 춘조사, 1957). 『영문학사』 3권(서울: 춘조사, 1958∼60). 『셰익스피어 예술론』(서울: 춘조사, 1963) 외 다수.


• 회고의 글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은사 최재서 선생님 (54 조신권)


항간에는 최재서 선생님을 친일분자로 몰아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다. 물론 평론 활동을 통하여 그가 친일적인 성향과 흔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매국적인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한낮 나약한 지성인이었을 뿐이다. 그가 친일 평론가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운 학문적인 지대한 업적이나 그가 맺고 유지했던 인간관계 같은 것까지 송두리째 팽개쳐 땅에 묻어 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과 제자로서 그로부터 물려받은 학문적 전승과 그 분과 맺었던 사적인 친분 관계 및 잊지 못할 일들의 일단을 적어두려 한다.


가) 학자 최재서

“최재서 교수는 조국해방과 더불어 울창한 연희 숲을 찾아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 문학 속에 침잠하기 위해 상아탑의 조용한 생활을 스스로 즐기신 분이시다. 연희 숲에 문학의 향기를 그윽하게 뿌려가며 오로지 영문학의 대성을 위해 그분은 셰익스피어 연구에 심혈을 바치셨다. 그러다가 국난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울 수복과 함께, 그의 완숙한 문학의 이론을 전개시키는 주옥 같은 논문들을 잡지(『사상계』와 『새벽』)에 발표하여 낙양의 지가를 높여 주었고, 끝내는 『문학원론』을 완성 출간시켰다.”2)

이렇게 해서 출간된 『문학원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을 나는 읽어 본 적이 있다. “해방 후에 자유의 단 맛을 알았지만, 또 질서의 귀중함을 깨달았다. 나날이 어려워만 가는 혼란한 환경 속에서 나는 질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럴 쩍 마다 나는 문학 속에 침잠했다. 나는 그것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고 자기 변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는 적극적으로 진실하게 또 풍부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함을 자신했기 때문이다.”3)

이처럼 문학 속에 침잠해서 사는 것이 친일이니 비인간적이니 하는 매서운 현실적인 비판과 질책을 피하고 해방 후의 혼탁한 현실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하셨던 것 같다. 문학 속에 침잠하여 사색 연구한 결과가 바로 『문학원론』이라는 책이 되어 출판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표현 자체는 구투지만 매우 유려하고 내용이 그때까지 볼 수 있었던 문학개론서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 당시로서는 독보적인 문학원론서였다. 각론을 쓰시겠다고 하셨지만 각론을 쓰지 못한 채 1964년에 별세하셨는데, 학문적으로 볼 때 그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최재서 선생님은 문학을 사랑하고 작품을 많이 읽고 연구는 하셨지만 창작을 시도하거나 1977년에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낸 『인상과 사색』이라는 에세이집 말고는 가벼운 글을 써 본 일이 없으신 순수한 학자였다. 그의 『문학원론』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동란 전에 나는 학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있어 피난을 가게 된다면, 나는 『콘사이스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셰익스피어 전집』만을 가지고 떠나겠다고.’ 과연 1950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나는 그 두 권 책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친구의 짚차에 편승해서 남하했다. 피난지 대구에서 나는 『햄릿』과 『맥베스』와 『리어왕』을 다시 읽었다. 아무 주해도 없이 적은 영어사전만을 의지로 읽으니까 자연 골똘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나는 이 작품들에서 이전에 맛볼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발견했고, 그래서 신산한 가운데서도 산 보람과 또 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문학은 체험의 조직화이며 감정의 질서화이며 가치의 실현이라는 이론이 추호의 틀림도 없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선생님 자신의 말씀 그대로 그가 가지고 가셨던 셰익스피어 전집을 피난지에서 자세하게 읽고 골똘하게 사색하며 느꼈던 문학적 체험을 조직화하고 질서화하여 1961년에서 동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고, 그 2년 뒤인 1963년에 『셰익스피어 예술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도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은 그가 연구하고 축적한 영문학 지식을 책으로 펴냈을 뿐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강의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전달하였다. 영어영문학과 3, 4학년 2년 동안의 과정이었던 “영문학사”와 “비평사”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고 그것을 필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내용 자체는 실로 어느 영문학자나 평론가도 따를 수 없으리 만큼 해박하고 풍부했다. 생전에 강의했던 노트를 정리하여 영문학사를 몇 권으로 나누어 내놓았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내놓은 “영문학사” 3권은 『중세영문학』, 『르네상스 영문학』, 『셰익스피어』 등 3권이다. 물론 “영문학사” 강의는 17세기를 빼고는 18세기까지 깊고 자세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비평사”도 19세기까지 잘 정리된 강의를 하셨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되지는 못했다.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최재서 선생님은 한 번도 딴 데로 눈을 돌리지 않은 진정한 영문학자요 문학이론가였다.

 

나) 평론가 채재서

최재서 교수가 비평 활동을 한 기간은 1934년에서 1941년까지 7년 동안이다. 7년 사이에 쓰여진 글들은 앞뒤가 맞지 않아 일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1) “한 조각의 빵을 위하여, 한 잔의 술로 말미암아, 한 마디 오해가 원인이 되어 우리는 얼마나 비루한, 혹은 우스꽝스러운, 혹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가? 그러나 자아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입장에서 그것을 본다면 그는 노예이고, 인생의 피에로이고, 우열한일 것이다. 여기에 풍자가 발생할 계기가 생겨난다. 그러나 현대인에 있어 이 같은 관찰자는 다른 사람에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자신 가운데에 이 같은 관찰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


(2) “산문정신이란 예술적 자아가 고갈에 빠지려 할 때에 언제나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거기서 새로운 활력을 찾아내려는 정신이다. 그것은 현실을 거부하지 않는 정신이요, 민중을 숭배하는 정신이다. 현재에 있어 어느 모로 보나 위기에 서 있는 작가가 모든 지적 자긍을 버리고 민중 속에 용해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5)


(3) “단적으로 말하면 구라파 전통에 뿌리박은 소위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도서문화의 종합을 지반으로 하고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국민의 이상을 시험한 대표적 문학이어야 한다.”6)


“위의 세 인용문을 나란히 놓고 볼 때에, 문학에 있어서의 자의식을 강조한 (1)과 민중의식을 주장한 (2)와 일본정신을 내세운 (3)을 앞뒤가 맞도록 해석하기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최재서의 비평은 비평 자체로서 연구되는 것보다, 지식인의 자유주의와 식민지 토박이의 노예주의가 한 사람의 비평 속에 동거하는 심리적 사례로서 연구되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시대의 비평 활동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광복 이후 고통스러운 침묵을 견뎌내며 이룩한 최재서의 문학이론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비평적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지적은 김인환이 그의 『문학과 문학사상』에서 기록한 내용에 의거한 것이다.

김인환의 말대로 일제시대의 문학론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침묵 속에서 현실적 고통을 감내하며 일구어 낸 그의 문학이론은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한다. 그 나름대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날카로운 비평의식과 해박한 문학이론을 섭렵하고 있었다. 그런 비평문들을 모아 놓은 것이 1948년에 나온 『문학과 지성』이고 1961년에 출간한 『최재서 평론집』이다.

1920년대 프로문학론이 신문학비평을 심화시키면서 1930년대 전환기의 모색비평이 가능하게 되었다. 프로문학론이 퇴조하면서 일어난 공백기를 서구적 리버럴리즘으로 극복하게 된다. 김윤식이 『근대한국문학연구』에서 말한 바대로 여기에는 백철의 휴우머니즘론, 최재서의 주지주의론, 이원조와 김남천의 고발문학론 등이 포함된다. 주지주의문학론은 일종의 영문학의 비평방법인데, 시론은 김기림과 이양하가, 소설 및 비평방향은 최재서가 대표한다. 이들은 모두가 그 방향의 전공자들이다. 이들에 의해 한국문예비평은 처음으로 비평기능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이 검토되었고, 서구문학이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주지주의문학론,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적용될 수 없는 방법론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당시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그의 풍자문학론은 높이 평가하여야 하며 정치 현실에서 문학이 얼마나 독자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내지는 사회사와의 연관성 위에서 문학사는 자기의 땅을 가질 수 있다는 문제를 내보여 준 커다란 성과라 할 만하다”고 평한 비평가도 있다.

비평가 최재서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나라 1930년대를 이끌어간 전문적인 평론가였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리얼리즘 소설을 사랑했던 영문학자 권명수 교수

• 약력

1911년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

1920년∼1926년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

1926년∼1931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1931년∼1937년    일본 동경 릿쿄대학(立敎大學) 예과 및 문학부 영문과 졸업  

1938년∼1943년    평양 광성중학교 교사

1946년∼1948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194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1950년           영자지 『코리아 타임즈』사 교정부장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동국대학교 교수 겸임

1952년∼1976년    연세대학교 교수, 영문과 학과장

1976년 2월       연세대학교 정년퇴임

1986년           별세


• 저작

『신동아』와 『중앙』에 단편소설과 영미소설 번역 발표, 『조광』에 단편 소설과 수필 발표(1931∼37).


• 남기신 글

연세를 떠나면서: 추억의 얼굴들7)


나는 부산 피난 당시 연세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영도 한편 끝 천막교실에서 비로소 학교가 수습이 되고 신학기를 맞이할 때 참여했던 것이다. 1·4 후퇴 후의 실의, 초조, 굶주림의 1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때 영도 가교사에서 만났던 몇 안 되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그러한 어두운 빛이 떠돌고 있었다. 백낙준 총장이 문교부장관직에 있었고 김윤경 선생이 총장 서리, 정석해 선생이 문과대학장이었다. 개강이 임박해오고 준비를 서두르면서 정 선생은 무슨 과목을 맡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 나는 준비할만한 교재도 없었고, 책을 살 돈을 학교에서 주겠다고 했으나 살만한 교재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햇빛이 내리 쪼이는 천막교실 속에서 어느 날 나는 책을 쳐들고 엉성하게 앉아 있는 학생들 앞에서 짖거리고 있을 때 예고 없이 백낙준 박사가 미국 사람 하나를 데리고 들어섰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해야만 되었던 때인 만큼, 당시 곤경에 빠진 학교의 상황을 보이는 것이라고 나는 직감했다. 우리는 당시 레이선 박스나 입다가 보내준 의류 같은 구호물자를 받고 위안을 삼고 있었다.

환도 후 백 박사는 총장직으로 돌아왔고 학교도 질서를 되찾으면서 기구도 차츰 커져갔다. 교직원의 수가 늘고 그들에게서는 많은 변동도 일어났다. 다른 학교로 옮겨가는가 하면, 미국으로 떠났고 정년이 되어 시골에 파묻히기도 하였다. 일전 나는 문병차 조의설 박사를 찾아갔는데, 그는 자기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을 알고 전화로 신동욱 씨가 몸조리를 당부하더니 먼저 갔노라고 어이없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신 선생의 일을 얼마 전 신문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환도 후에도 정법대학장, 교무처장 같은 요직을 거치면서 피로를 모르는 딱 바라진 체구에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나와는 대화를 곧잘 나누어주었다. 한번 내가 돈암동 어느 골목을 지나다가 “신동욱”이란 문패를 보고 그 일을 물었더니 자기와 같은 성명이 서울에 넷이나 있다고 일러주었다. 연세대학교를 훌쩍 떠나서 건국대학교로 간 지도 벌써 여러 해 전 일이었다.

몇 달 전인가 나는 신문에서 또 장지영 선생의 별세소식을 읽었다. 90 고령이었다. 내가 장지영 선생과의 접촉이 끊어진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키가 작고 깨끗한 차림새의 상냥한 노인. 허술하게 나무판대기로 만든 영도 가교사의 직원실에서 노인은 어느 날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급한 사정이 있는데 돈 좀 빌릴 것이 있느냐고 사정하듯 말했다. 조심스러운 그 노인이 그런 말을 꺼내기에는 얼마나 주저했던 것일까. 그 액수는 나는 잊어버렸지만 내 능력으로 융통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장 선생과 나 사이는 남달리 가까워졌다.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장수의 비결을 무를라치면 이성관계를 멀리하고 화가 치밀 때에는 몇 시간이고 화초를 가꾼다고 자랑 비슷이 말했다. 어느 땐가 도무지 학교에서도 만나볼 수 없어서 내가 아는 다른 대학에 국어강사로 소개할 생각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몸이 노쇠하여 일체 강의를 피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영도에서 두 번째 맞는 신학기에는 대구에 와 있던 최재서 선생이 나타났다. 검고 기름한 얼굴에 콧수염이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이 어딘가 병약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꼿꼿한 어깨에 턱을 곧바로 처 들고 있는 품이 가까이 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최 선생은 학생들 앞에서 간단한 연설을 할 때에도, 한편 손을 주머니에 꽂고, 몸가짐이 딱딱해 보였다. 부산 광복동 근처 길가를 지나다가 그가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닦고 앉아 있는 그 꼿꼿한 자세가 나는 곧 눈에 띄운 일도 있었다. 봉급날 월급봉투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백양로를 걸어나오면서 혹 그와 부딪히는 수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 가는 늦은 오후였지만, 바쁜 걸음으로 걸어들어 가면서도 어쩐 일이냐고 묻는 말에 볼 일이 좀 있다고 하면서 봉급일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문과대학 교수회 때였다. 의견이 오고가는 도중에 최 선생은 화를 벌컥 내더니 자리를 걷어차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다. 나는 한 번 남산 밑 그의 집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그는 책상 앞에 정좌하고 있었다. 잠시 지나가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뒤 헤어지게 되자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집이 크다고 인사를 했더니 내집의 평수를 물었다. 120평이라는 대답에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가 연세대학교를 떠난 뒤의 일이다. 내가 어느 날 충무로를 지나가고 있었을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이켜 보니 최 선생이 반기면서 한편 팔을 높이 들고 내 앞으로 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박한 인간미를 그도 지니고 있었다.

하여간 그런 최 선생과는 반대로 마음놓고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중국어의 김용현 선생이었다. 그는 뚱뚱한 체구에 통 넓은 바지를 휘청거리면서 걸었다. 애교 있는 웃음을 잘 띄웠고 이야기 할 때마다 손짓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부산 시절에는 영도에서 시내 쪽으로 함께 걸어나오면서 피난살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북이 고향이란 말을 듣고 냉면을 즐겨 먹느냐고 나는 물었다. 몹시 즐긴다는 대답에 한번 냉면을 같이 하자고 약속했다. 환도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흔히 동행이 되었는데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웠던 때여서 우리의 화제는 결국 그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 앞이 좀 어떨 것 같소?” 빤히 아는 이야기를 한 번 더 물어 볼 양이면 그의 얼굴은 갑자기 흐려지면서, “절망이야, 절망!” 하고 뱉듯이 말했다.

문과대학 이층 휴게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일이다. 그는 손을 들어서 내게 농을 걸기 시작하면서, 내게서 찬바람이 쌩쌩 돈다느니, 무욕의 화신이라니 마구 짖거리이었다. 나는 얼핏 대구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우리 냉면이나 한번 같이 합시다,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권 선생이 냉면 먹자고 한 지가 8년째야, 부산서부터 8년이 된다는 뜻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금 미국에 있는 송석중 군이 소리쳐 웃었다.

나는 위에서 장지영 선생과의 관계를 이야기 했지만, 상경대학장을 맡았던 홍승국 선생은 장 선생과는 가까운 사이 같았다. 흔히 식당에서 만나면 나는 동석을 했고 학교에서 나갈 때는 함께 걷기도 했다. 홍 선생은 이야기 할 때에는 뺨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번은 중국 영화 “매당화”가 좋았다고 내게 일러 주었다. 그 후 나는 그 영화를 보았는데, 부성애를 그린 영화 같이 지금 기억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교양영어를 맡고 있어서, 어느 날 함께 걸어나오면서 단편소설에 나오는 문구 해석을 가지고 최재서 선생과 의견 대립이 있었던 일을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가 없다고 중얼거렸으나 나는 그 일은 캐어묻지를 않았다. 문과대학 2층 휴게실에서 간혹 창 앞에 서서 있으면 홍 선생이 수업에서 나와서 책을 들고 건물 밑을 지나가면서 손수건을 꺼내어 어깨의 분필가루를 털고 하는 것이 보였다.

환도 후 학교에 들어온 신임교수 중에 비교적 젊은 층의 유창돈 선생은 나와는 뜻하지 않게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는 동경 시절에 동양사를 전공한 수재로 대학동창이 있었다. 유 선생은 얼굴 모습, 성격, 말씨 모두가 그에게 몹시 닮아 있었다. 이름자만이 돈(惇)과 의(宜)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걸어본 결과 그의 친아우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반가워했고 형도 월남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하면서, 일본에 와 있는 북한의 잡지를 보고 형이 김일성대학에 교편을 잡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뜸 형의 기념물이라곤 하나도 가져온 것이 없으니 사진이라도 있으면 달라는 것이다. 마침 내게는 학생복을 입고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유 선생은 또 서울고등학교에서 백 총장의 자제를 가르친 것이 인연이 되어 백 총장에게 알려졌고 그것이 연세대학교로 오게 된 동기라고 묻지도 않는 말까지 털어 놓았다. 킥킥거리고 웃기를 잘하는 그는 잡담을 해 가면서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답안지를 넘기면서 채점을 했다. 한번 내 딸아이가 연세대학교 입학시험에 낙방이 된 일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나오는 택시 속에서 흥분한 어조로, 총장보고 내가 “악법이라고 그랬어요, 악법이라고요” 하고 소리쳤다.

강당 앞 터전에서 문과대학장으로 그의 장례식이 조촐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때 내 앞에 서있던 여학생 하나가 소리쳐서 흐느끼고 있는 것이 들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 여학생의 놀람과 비통도 우리와 같았던 모양이다.

운구가 백양로 저편으로 사라지고 모두 헤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있었다. 그때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장기원 박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별 할 말이 없어서, “허무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장 박사는 “그렇구먼요” 나직하고 힘있는 대답이었다.

장 박사는 운동으로 단련된 듯한 떡 벌어진 가슴에,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추운 겨울날에도 계속해서 세 시간씩 정구를 친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부총장으로 앉아 있을 때, “누가 나를 육십이 넘었다고 보는 사람이 없어요” 하고 싱긋 웃으면서 자기 방에서 들려주던 일이 아직도 나는 잊히지 않는다. 장 박사가 세상을 떠난 것은 유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나와의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은 바로 몇 달 후의 일이다.

나는 이 글 시초에서,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환도 당시의 상경대학 김척도 교수의 일을 적었어야만 했었다. 그도 동경에서는 동창이었던 만큼 나와 사이가 가까웠고, 나는 그의 신변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이북에서 넘어온 몸으로 끝내 독신을 지켰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기인(奇人)시 된 인물이었다. 주초는 물론 다방 한번을 드나드는 일이 없었다. 학교와 하숙방이 그의 세계의 전부였다. 식수난이 극심한 영도에서 그는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부녀자들의 끝에 서서 주전자를 들고 돌부처처럼 하루의 해를 보내고 했다고 김용현 선생은 환도 후에도 곧잘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문과대학 층계나 복도에서 오가다가 내가 병세를 물어보면, 당뇨병은 의사들도 약이 없다고 하더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조심해서 악화를 피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했다. 얼마가지 않더니 그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수업시간에는 담벼락을 더듬어 가면서 교실을 찾아 들어갔다. 이윽고 중태에 이르자 학생 몇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임종 후 요 밑에서 모아두었던 월급의 예금통장이 나왔다. 기족도 없고 친척 하나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백낙준 총장, 김윤경 선생을 비롯해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서울역 건너편 그 당시의 세브란스 병원 우중충한 좁은 마당에서 간략한 장례식을 치렀다.

흘러간 4반세기, 내가 연세대학교에 봉직해 오면서 비교적 친분이 두터웠던, 이제는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얼굴들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이 이상 그들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볼 용기는 사실 없는 것이다. 혹 복도에서 지나치게 될 때에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그래 좀 어떠세요”하고 말을 은근히 부쳐오던 홍이섭 선생의 일을, 퇴직금을 어떻게 써야할는지 묘안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던 박영준 선생의 일을 여기서 더 더듬어야 할 것인가. 이들보다 부질없는 생을 누리고, 이제 가로질러 있는 정년의 문턱을 넘어선다고 해서 직장에, 사회에 그만한 이윤을 나는 가져왔던 것일까. 백양로를 걷는 내 마지막 발걸음은 무거울 뿐이다.




● 고매한 신앙인격을 늘 지녔던 고전학자 고병려 교수

• 약력

1911년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용동에서 출생

1930년           평북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35년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일고등학원 졸업

1938년           조도전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 연구

1940년∼1944년    경신중학교 교사

1944년∼1947년    신의주 동중학교 교사

1947년∼1954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1954년∼1976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학과장

1976년 2월       연세대학교 정년퇴임

2006년 4월       별세


• 저서

『신앙과 시』(서울: 신흥출판사, 1976), 『성서와 신앙』(서울: 기독교서회, 1980), 『공관복음』, 『누가 사기』, 『요한 문학』, 『바울 서간』, 『기타 서간』 4권(서울: 기독교서회, 1984∼89), 『시편』(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 남기신 글

배동호 선생의 추억8)


배동호 선생은 연희대학교 전문부 최종 졸업반 학생이었다. 나도 그 해에 처음으로 연세대학교에 부임하여 그 반의 영강을 맡게 되었는데, 지금처럼 일정한 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고 선생들의 자유재량으로 선정하여 자기의 교재를 쓰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대학교 수업을 맡게 되었기 때문에 무슨 교재로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던 중 도서관에서 Schiller의 William Tell의 적당한 영역본을 발견하였고, 다행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작품의 독일어 원본을 서로 대조하여 읽어 가면 잘 이해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을 교과서로 사용하여 보았다. 역시 쉴러의 간결, 웅견하고 함축성 있는 문장이 일반 학생들에게는 다소 해득이 곤란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요행히도 그 반에는 함성용이라는 영어 발음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학생이 있었으므로, 그 학생이 낭독한 것을 배동호 학생이 번역을 하여 명콤비를 이루어 가지고 그 반의 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갔기 때문에, 나는 신임하자 곧 이 두 학생에 의하여 구제를 받은 셈이 되었다. 그 후에 배 선생은 전문부를 나오고 대학 영문과로 진학하여 학생 때에 벌써 수 백 권의 영어 소설을 독파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대학원을 거쳐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모교에 남아 영국 소설과 영강의 과목을 맡아 가르치면서, 학생지도와 아울러 영문과의 모든 일을 자기 일 이상으로 생각하여 그야말로 모교에 대한 희생적인 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때에 무심코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세계의 소설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요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고드는 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방대한 소설 전집을 다 통독하고는, 그 무렵에 한국에 와 연세대학교에서 영어학을 담당하고 있던 루코푸 선생에게도 권유하여, 그 선생이 자기도 문학자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하고 싶다는 술회를 하였다고 내게 전해 들려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을 더 연구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떠나간 후로는 아예 다시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한국에서 기념 추도회 때에는 추도회 장소인 아스토리아 호텔에까지 갔으나 호텔 지배인의 착각으로 그런 회합이 없다고 하여 돌아왔더니, 예정대로 추도회가 거기서 거행되었던 모양이다. 그 후에 중동지방에서 한국 사람으로는 유례없이 사회사업에 투신 성공한 이 박사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배동호 선생은 영국에서 연구하던 중 파리에 잠깐 여행을 왔다가 파리의 대로상에서 각혈을 하고 쓰러진 모양이었다. 프랑스 경찰에서 한국 공관에 연락되었을 때는 이미 그의 영이 그의 육체를 돌볼 수 없게 된 후였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국에 있는 주위의 사람들은 왜 그러한 병약체를 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하였으며, 그 자신은 또한 어찌하여 자기의 건강에 대하여 그다지도 무심하였던가, 혹은 그가 아직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주위에 얼마나 더 외적 환희와 내적 초탈을 한꺼번에 가져다주었을까 하고 애석히 여겨보고 한탄도 하여 본다. 그는 문학에 대한 정열로써 항상 자기를 불태워 버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외로운 정열의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는 없었을 것이요, 자기 자신도 그의 해당자는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문학과 인생을 위해 살다가 그로 인하여 희생된 사람이었다. 천국에 가면 반드시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 유머와 위트가 넘쳤던 영어학자 전형국 교수

• 약력

1915년           만주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출생

1923년∼1934년    용정 영신소학교, 영신중학교 졸업

1934년∼1938년    경성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8년∼1940년    길주공업학교 교사

1940년∼1943년    용정 명신여자고등학교 교사

1944년∼1945년    연길 간도국민고등학교 교사

1946년           길주공업학교 교사

1946년∼1947년    주한 미24군사령부 번역관

1947년∼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사

1950년           미국무성 교환교수

1951년∼1952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졸업(석사학위)

1952년∼195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교사

1953년∼1981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학과장

1962년∼1964년    문교부 편수국 영어장학위원 및 교육과정위원

1962년∼1970년    한국대학어학실험연구협회 회장(초대로부터 3대까지)

1964년∼1968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

1968년∼197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장

1969년∼1973년    한국대학 출판협회 초대회장

1975년           연세대학교 교수평의회 부의장,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소장

197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8년           교육공로 표창

1981년           연세대학교 공로패 포상, 서울시 교육공로패 포상

                 연세대학교 정년퇴임

2002년           별세


• 저서

『영어발음교본』(서울: 대도문화사, 1950). Basic English Dictionary(공저, 서울: 수문각, 1955), Lessons on Pronunciation(서울: 대도문화사, 1955). Geoffrey Chaucer, Canterbury Tales: Prologue(편저,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2) 외.

     

• 남기신 글

정든 강의실을 떠나면서9)


학생들의 물결 속에 파묻혀 백양로를 다니기를 어느 듯 이십팔 개 성상이 되었다. 옛날에 서 있던 아름드리 백양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등 갖가지 나무에는 지난날의 이야기가 서리어 있다. 정든 많은 건물들, 그 중에서도 학관은 잊지 못할 사연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내 연구실과 강의실이 여기 있었고 한 평생을 내가 여기서 살다시피 한 곳이다.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던 동료교수들 특히 영어영문학과 교수들의 곁을 떠나게 되어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금할 수 없다.

연세대학교의 창립자이신 언더우드는 캠퍼스 복판에 세 건물을 지으시고 각 건물을 본관, 학관, 아펜셀러홀이라 명명하고 본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 핀슨홀을 지어 학생기숙사로 사용케 하였다. 네 건물 중에서 학관만은 사층을 올리고 중앙에 타워를 세워서 캠퍼스의 상징부를 만들고 후에 문과대학을 여기에 정착시켰다. 대학 중에 대학이 문과대학이라는 옛말도 실감나게 하였다. 이 네 건물은 연희전문시절의 유물로서 담장이 넝쿨로 덮여서 더욱 고색이 창연하다. 이 석조 건물의 앞 이마와 양 편에 방패형 무늬의 석재를 파 넣고 그 속에 태극문양을 조각하였었다. 이는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표시로서 창립자의 세밀한 설계와 놀라운 예지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이 태극이 말살되고 그 자리에 히노마루(日丸)를 조각하여 넣었던 것이 1979년 가을에 와셔야 다시 태극으로 복원되었다. 이는 늦은 감은 있으나 그래도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 학관 115호 강의실을 떠나려 하고 있다. 지난날 여러 해 동안 주로 이 강의실에서 영어발달사와 영어구조론을 강의하여 왔다. 이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고인이 된 세 은사님과 몇몇 교수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연전시절에 나는 여기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외솔 최현배, 이양하(李敭河)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인보 선생님은 검정색 중절모에 회색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까만 색 갓 신을 신으시고 강의에 열을 올리셨다. 조선의 얼이 강의의 중심이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님은 꼬장 바지를 입으시고 경상도 사투리로 우리말본의 초고를 읽어 가셨다. 나라사랑의 기본이 한글 애용이라고 역설하셨다. 이양하 선생님은 무뚝뚝한 말씨였으나 영문학강의를 통하여 휴머니티의 체취를 물씬물씬 풍겨 주었다. 당시 학생들은 정인보 선생을 대나무에, 최현배 선생을 소나무에, 이양하 선생을 영국신사에 비유했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내 연구실에는 수년 전부터 한죽풍송(寒竹風松)이라는 주자의 휘호가 걸려 있다. 내 방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나는 이 족자를 볼 때마다 세 스승을 연상하였다. 청초하고 순박하고 견실한 푸른 나무와 훈훈한 바람을 느끼게 하는 세 스승이었다. 또한 이 족자를 볼 때마다 한결 김윤경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면 한결 김윤경 선생은 ‘언제 뵈어도 화로와 같이 훈훈한 바람, 어느 때는 너무너무 곧아 돌 좌상 같은’ 분이셨다. 대나무, 소나무 사이로 훈훈한 바람이 불면 115 강의실은 내 꿈엔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연세춘추사 앞에 서 있는 윤동주 시비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이다. 문과대 교수회의에서 이 시비를 창건하기로 결의한 일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로 기억될 것이다. 그와 나는 북간도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그리고 이 백양로와 학관에서 자란 동문이다. 그는 여기서 시심이 자라서 드디어 ‘하늘과 별과 바람’이라는 시를 썼으리라.

나는 연세대학교를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비교해 볼 때가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일찍이 문이 셋이 서 있었다고 한다. 처음 문이 겸손의 문이고 중문은 미덕의 문이고 최후의 문이 명예의 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서 영국 학생들은 삼덕(三德)을 배워서 훗날의 영국 정신문화의 터전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연희전문학교가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한 것이 1915년 봄이다. 공교롭게도 연세대학교의 실제 나이가 나와 같다. 연세대학교에는 삼덕의 문은 없으나 큰길을 교육의 근본으로 삼아온 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문이 없어 큰길을 보여준 창립정신을 더 고매한 정신으로 찬양하고 싶다. 제자의 길, 진리의 길, 자유의 길은 백양로와 같이 넓고 긴 길이다. 수많은 연세인이 이 길을 걸어왔고 지금 걷고 있고 내일도 걸으리라. 옛 성현의 말 같이 인능홍도(人能弘道)라 하였으니 나도 이 길을 넓히는 역사에 미력이나마 한 평생을 여기서 보냈다. 이것도 나의 자랑이며 기쁨이다. 회고하건대 학관 주변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4·19때 민주학원을 염원하던 농성교수들의 함성이 여기서 터져 나왔다. 때로는 군화소리도 드높게 캠퍼스의 정적을 깨는 일도 있었고 페퍼포그의 세례도 받아 한없이 눈물도 흘려 보았다. 교문도 여닫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듯한 이야기가 숨어 있으리라.

나는 지금 여기를 떠나련다.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 그리고 정든 사철나무들과 건물들, 씩씩한 젊은 독수리들, 그리고 정들었던 교직원과 작별하는 심경은 착잡하다. 많은 미련을 남기고 떠나련다. 이제 백양로로 걸어나가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 풍유와 양식과 지성을 갖춘 영원한 예술인 오화섭 교수

• 약력

1916년           경기도 부천군 남동면 만수리(현재 인천시)에서 출생

1930년∼1935년    중동중학교 졸업

1935년∼1937년    와세다대학부속 제2와세다 고등학원 문과 수료

1937년∼1940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1940년∼1941년    동 대학 대학원 수료(논문: 세기말 문학 연구)

1941년∼1944년    중동중학교 교사

1944년           중국 천진 공상대학 부교수

1945년           중국 천진 도서관 양서과 서기

1945년∼1946년    중국 천진 한국문화원 교원

1946년∼1950년    고려대학교 부교수

1952년∼1953년    국립부산대학교 부교수

1953년∼1962년    연세대학교 교수

1962년∼1964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962년           제3회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1963년∼1965년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1963년∼1979년    한국 셰익스피어 협회 이사

1964년∼1965년    성균대학교 교수

1965년∼1979년    연세대학교 교수

1966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과장

1970년∼1972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5년∼1977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1979년           별세


• 저서

『물같이 와서 바람같이 가다』(서울: 삼중당, 1966), 『이 조그만 정열을』(서울: 삼중당, 1973), 『거기 수많은 길이』(서울: 삼중당, 1978), 『한국대표 수필문학 전집』(서울: 을유문화사, 1975).


• 역서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오닐 희곡집』(서울: 수도문화사, 1962). 쏘온톤 와일더, 『우리읍내』(서울: 수도문화사, 1959).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박영문고 51』(서울: 박영사, 1975). 셰익스피어, 「오셀로」, 『완역판 셰익스피어 전집 l』(서울: 정음사, 1964) 외 수십 편의 희곡과 다수의 소설 번역.


• 회고의 글

군(君)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47 차범석)10)


1974년 7월 30일에 발간한 『극단산하 10년사(劇團山河 十年史)』를 펴볼라치면 오화섭 선생님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10년 전 초가을이었던가, 소공동 중앙공보관 회의실에서는 극단을 하나 만들어 이 땅에 극예술의 꽃을 피워보자는 열성파들이 모여 「산하(山河)」라는 극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보다 나이가 위이고 기타 여러 가지 이유가 붙어서 초대 대표가 되었다. 물론 장기 집권할 생각은 애당초부터 없었고 한 동안만 그렇게 해달라고 하여 잠정적이라는 조건부로 대표라는 이름을 받았던 것이다. 극단 이름은 차범석 씨가 지은 것이지만 그때 나는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가서 그 이름이 감칠맛이 있고 시정이 넘치는 이름이라고 느껴졌다. 초기의 짧은 기간의 대표직을 내놓은 뒤 차범석 씨가 대표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산하」는 많은 창작극과 그에 못지않은 번역극을 상연해 왔고 한 때는 침체한 때도 있었으나 변치 않은 단원 간의 협동정신이 「산하」를 영원히 푸르게 만들 것을 의심치 않는다. …


이상의 글 가운데서 내가 오 선생님과 어떻게 만났으며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굳이 내가 이 글을 여기 인용한 것은 「산하」 얘기를 꺼내려는 게 아니고 오 선생님의 깔끔하고, 솔직하시고, 그리고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시는 겸손의 덕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오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6·25 전인 1949년 「여인 소극장」이라는 극단이 활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 극단은 그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계시던 박노경 여사가 이대 졸업생들을 기간 멤버로 창단하여 그 대표와 전속 연출을 맡고 있었던 매우 신선한 극단이었다. 그러나 그 뒷바라지는 박 여사의 부군이신 오 선생님이며 그 극단에서 공연된 대부분의 작품은 “오설(吳說)” 번역으로 된 작품들이었다. 그 오설은 다름 아닌 오화섭 선생의 필명이었다. 나는 그 당시 시공관 앞에서 오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나는 연대 재학 중으로 연희극예술연구회를 이끌어 왔던 터이고 오 선생님은 고대 영문과 교수였으니 신분상으로는 엄청난 층하가 있었던 처지였다. 오 선생은 항상 흑감색(黑紺色) 양복을 입고 다니셔서인지 얼굴이 유난히도 희어 보였고 안경테의 검은 빛이 도리어 차가운 인상을 더 깊게 나타내 보였다. 나는 점차 희곡을 쓰겠다는 야망에 불타 있었던 터이라 그 당시만 해도 희곡 서적이 전무하였으므로 오 선생님의 번역 작품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관람하던 열성파였다. 『고향』, 『라인강의 감시』, 『깊은 뿌리』, 『오셀로』 등 그 시절에는 가장 앞서가는 외국작품들이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나면서 「여인소극장」도 그 대표였던 박노경 여사도 이 땅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 환도가 되면서 오 선생님이 나의 모교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피난지였던 나의 고향에서 풍문에 들었을 따름이다.

오 선생님은 얼핏보기에는 차가운 표정이지만 유난히 눈웃음치실 때의 표정은 천진한 소년 같은 면도 계셨다. 대학강의, 음악평론, 희곡번역 등으로 왕성한 예술활동을 하시던 때 나는 「제작극회」를 조직하여 소극장 연극운동을 전개하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오 선생님과 만나게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오 선생과 나는 연극계의 선배와 후배의 관계였을 뿐 이렇다할 사제관계는 아닌 셈이었다. 그러던 터에 나는 오 선생님으로부터 간곡한 설득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때 MBC에 근무 중이었고 모교에 시간 강사로 나가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종로에 있는 맥주집 낭만에서 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차범석 씨 학업을 아주 끝내버리지 그래!”

“예?” 

“일년 남겨두고 중퇴라니 억울하잖아요? 복학하시오. 그리고 이왕에 내친 길인데 졸업장 따내세요.”

“선생님,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어떻게 학교에 다닙니까? 늙어도 이만 저만이 아닌데요.”

“그까짓 일년,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이번에 학교에서 복학생을 받는 기회가 생겼으니 눈 딱 감고 수속하세요. 영문과 4년 중퇴라니 억울해요. 남은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남은 일이란 그 당시 문과대학 학장이신 전형국 교수님께 사정얘기 하겠다는 것과 박영준 교수님, 이군철 교수님, 정병조 교수님들의 엄호사격까지도 포함해서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5년 만에 모교 영문과에 복학하여 1966년 9월 코스모스 졸업의 영광을 따내게 되었으니 내가 연세대학교 개교 이래 가장 오랜 시간 끝에 졸업장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오 선생님의 제자였다. 물론 1년밖에 안 다녔지만 나는 연세인으로서의 완전한 자격과 긍지를 오 선생님의 덕분으로 얻어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오 선생님은 언제나 나를 부르기를 “씨”였다. 나는 졸업 자축의 술자리에서 “선생님! 쑥스러워요. 이제부터는 ‘차군’이라 불러주십시요”라고 말씀하였더니, “거물 제자한테 감히 ‘군’이라니! 아이구 무서워요”라고 가가대소 하시던 오 선생님의 약간의 금속성이 섞인 웃음소리는 만년 청년이요, 풍유와 양식과 그리고 지성을 갖춘 영원 신사이셨다.

그러나 오 선생님은 늘 나의 곁에서 인도해주셨다. 그러기에 「산하」 창단에도 우리는 오 선생님을 대표로 추대했고 연세인이 많이 모인 조직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앞서 인용한 글 가운데서도 오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씨”라고 부르셨으니 가깝고도 먼 어른이 바로 그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배 알기를 뭣처럼 알고 선배 등을 짚고 넘어가기를 그 무엇으로 아는 요즈음의 후배 아닌 후배들의 이지러진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마지막 선배였던 오화섭 선생을 그리워한다. 욕심 없고, 명예 안 좋아하시던 우리 선생님 생각을 한다. 아…  나도 인제 오 선생님이 가셨던 그 나이가 되었는데….


● 시와 고전을 사랑했던 학자 시인 유영 교수

• 약력

1917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1927년∼1932년    용인군 용인면 감량장 공립보통학교 졸업

1933년∼1938년    경성공립농업학교 졸업

1939년∼194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6년∼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1943년∼1945년  『경성일보』 편집국 근무

1944년∼1945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회령, 청진에서 수감 후 보호관찰 중

 8·15 해방

1945년∼1946년   『조선통신사』 편집국 근무

1946년∼1947년    국립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서

1948년∼1956년    태성고등학교 교사 및 교감

1955년           육군사관학교 외국어과 강사

1955년∼1964년    서울대학교 강사

1956년∼1983년    연세대하교 교수, 학과장

1978년           서울시 교육회 교육공로 표창

1981년           문교부 중고등 교육과정 심의의원

1982년           Who’s who in the World 1982-3 판에 수록

198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3년           연세대학교 정년퇴임

2002년           별세

• 저서

『밀튼의 서사시 연구­실락원의 미학적 구조론』(서울: 연세대학고 출판부, 1968), 유영 시집 『일월(日月)』(서울: 정음사, 1970), 유영 제2시집 『천지서(天地序)』(서울: 중앙출판공사, 1975), 산문집 『나의 대학의 오솔길』(서울: 동서문화사, 1980) 외.


• 역서

호우머, 『일리어드/오디세이』(서울: 정음사, 1959). 『타골선집』(서울: 을유문화사, 1962). 밀튼, 『실락원』(서울: 을유문화사, 1963). 단테, 『신곡』·『신생』(서울: 정음사, 1972) 외 수십 권의 작품 번역.


• 남기신 글

땅을 쓸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11)


어깨 넘어 글로 한문을 통달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이 외우시지만 글씨만은 그런 식으로 익힐 도리가 없는 고로 아버지는 글씨 못 쓰는 것이 한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대여섯 살 때부터 새해가 오면 으레 어린 나에게 입춘에 대한 글씨를 쓰게 하셨다.

“봄이 오면 큰 복이 오고(立春大吉)/ 해가 비치면 경사가 많다(建陽多慶)”라는 구절이 가장 많았고, 다음에는 “땅을 쓰니 황금이 나오고(掃地黃金出)/ 문을 여니 만복이 오도다(關門萬福來)”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려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써서 기둥에 붙여 왔는데 처음에는 그저 소박한 시골 집안에 소박한 꾸밈으로서 해가 바뀌니까 심기(心氣)를 새롭게 하는 한 풍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아, 조상들이 가정의 청소를 강조하고 또 통풍과 환기에 신경을 쓴 것이니 위생관념이 철저하여 또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로서 좋은 점이로군”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흰머리가 나면서부터 ‘청소’와 ‘환기’에 대한 선현들의 생각은 단순히 건강이나 위생에만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리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로서 과장은 있다 해도 땅을 쓸어서 황금이 나온다면 부자 안 될 사람 없고 문을 열어 많은 복이 굴러들어 온다면 이 세상에서 재앙이 없어짐은 물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니 너무 지나친 표현으로 후세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시가 옛날 사대부나 유학자의 글이라면 그런 피상적인 데만 머무르지 않았을 것 같다.

위의 글에는 좀더 형이상학적인 뜻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땅을 쓴다는 것은 ‘내 땅을 지키라’, ‘나 자신에 충실하라’, ‘스스로에게서 근원을 찾으라’는 주체성을 은유로서 강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사 자신 속에 실패, 흥망의 계기와 관건이 있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맹자의 경우도 비슷하게 보인다. “길은 가까이 있건만 모두들 먼 데서 구하고자 하고, 일은 쉬운데 있건만 어려운 데서 구하고자 한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길진대 천하가 다 태평하리라.” 여기서도 강조하는 것은 만사 스스로를 지키고 개척하고 분수와 사명에 투철할 때 천하는 태평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서양의 경우에도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그리스의 금언인 “그대 스스로를 알라”는 것은 이런 뜻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아마도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로 보인다. 또 인류 영원한 과제로 내려오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솝의 우화』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늙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뒤뜰에 내가 너희들에게 주려고 황금을 묻어 놓았으니 너희들이 파서 잘 쓰라고 하였다. 황금이란 말에 열이 오른 형제는 열심히 뒤뜰을 파보았다. 그러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해도 또 팠다. 언제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기를 몇 해를 계속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파고 판 덕에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그 제서야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다. 즉, 내 땅을 지키고 내 집을 잘 지키면 그것이 곧 황금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후 열심히 가사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다시 메델링크의 유명한 『파랑새』도 그러한 우의를 극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한 티틸과 미칠 남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옆집의 호화로운 놀이를 보고 황홀한 찰나에 마녀의 유혹으로 행복을 가져온다는 파랑새를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밤의 나라, 과거의 나라, 미래의 나라 등을 두루 돌아다니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다가 지쳐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가 꿈이요 파랑새는 바로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였다. 그런데 그것도 이미 날아가 버렸다.

이 역시 가까이에 행복을 두고 멀리 방황하는 인간 욕망의 허망함을 풍유한 것이라 본다. 행복을 먼데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서 항상 찾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진리는 항상 가까운 데 있는 것이다. …

다음 문을 열라는 것은 개방주의를 뜻한 것이 아닌가? “총장실 문은 열려 있다” 혹은 “장관실 문도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의견을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것이니 널리 여론과 건의에 응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 네 스승이 있을 진저. 그들의 착함은 따르고 그름은 이를 고칠지어다”라고 하여 누구든 남에게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공자는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하고 돌아서며 어른도 어린이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하였다는 고사도 있다.

일본 속담에도 “셋이 모이면 문수(文殊)의 지혜”라고 하였다. 혼자보다는 남의 의견을 듣고 남과 힘을 합치는 데서 큰힘이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임종의 자리에서 유언 겸 아들 형제를 앞에 불러놓고 나뭇가지를 가져오라고 하여 하나씩 꺾으라고 하고 다음에는 셋을 합쳐서 꺾어 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셋은 그렇지 못하다. 협력의 덕을 강조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왕이 신하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으면 신하는 왕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요, 신하의 근심을 스스로의 근심으로 삼을진대 신하 역시 왕의 근심을 스스로의 근심으로 삼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경(書經)』에는 “하늘의 견문은 백성의 견문을 따르고 하늘의 명덕과 두려움은 백성의 명덕과 두려움을 따른다.”라고 하여 민심이 곧 천심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런 점은 서양의 경우 특히 두드러지게 보인다. 호우머의 『일리어드』의 경우 전쟁 중에 사태의 변동이 있을 때는 반드시 회의를 열어 중론에 따라서 앞일을 결정하되 상하 누구의 의견이고 신중히 참작을 하는 예의와 아량을 갖추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도 역시 주체는 항상 병사요, 부대 자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령관은 항상 전 부대 장병에 의존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렇게 보면 “땅을 쓸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는 말은 만사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되 반드시 문호를 개방하여 다수의 의견을 창작하고 중지를 모으라는 민주적 선현의 슬기가 재인식 될 수 있다. 따라서 구심적인 자아의식에 철저함과 더불어 원심적인 중의를 존중하라는 조상들의 통찰은 서양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역시 일찍부터 깨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 입심 좋고 기지가 번뜩였던 대학의 재사 이군철 교수

• 약력

1919년           평남 개천에서 출생

1934년           개천보통학교 졸업

1939년           서울중앙고보 졸업

194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1948년∼1955년    상명여고 교사

1952년∼1958년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1955년∼195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