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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제3부 학생들의 역대 문예활동 (2008.03.16)
작성일
2022.12.30
작성자
영어영문학과
게시글 내용

1996년부터 학부제가 시행되면서 학생회라는 이름의 자치기구가 대부분 유명무실해지고 학생들은 소속감 없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마음과 뜻의 결집을 필요로 하는 활동들도 자연히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영문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학생회도 학생대표도 없어져 영문과의 전통과 활동은 쇠락해져가고 있다. 금년 들어서부터 몇몇 영어영문학 전공 학생들이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면서 영문과 학생회장을 선출하는 등 전공을 중심으로 하는 결속력과 학구적 유대감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운동의 성공적인 결실을 기대하면서 지난날에 있었던 영문과 학생활동의 양상들을 ‘문예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내용상 짧은 서술이 가능한 것들부터 먼저 언급하기로 한다.



1장 시와 음악의 밤


1. 외부 행사 참가


1954년 12월 11일 “문학의 오후”라는 이름의 작품발표회가 『연희춘추』사와 『이대학보』사의 공동 주최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두 학교 학생들 30여 명이 참석하여 시와 소품을 낭송하였고, 다른 대학교 학생들도 많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좀처럼 얻기 힘든 작품발표의 기회를 학생들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연희대학교 측에서는 이기하, 김정숙, 김경희, 이선영, 황운헌, 한영환,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측에서는 정연희, 허미자, 홍명희, 김남환 등이 참가했다. 영문과 행사는 아니었지만 영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수 참석한 모임이었다.

1955년 5월 3일에는 문과대학 학도호국단 및 국어국문학과 주최로 제2회 “문학의 오후”가 개최되었다. 이은상의 “기원”, 유치환의 “바둑이”, 윤동주의 작품 등이 대독되어 학생들을 격려했으며, 학생들의 작품발표와 더불어 박두진의 “청산도”, 박영준의 “달걀 한 개”, 정창범의 “현대의 불안”, 전영경의 “사도행전”, 석용원의 “5월 수복 어머니” 등의 특별 찬조도 있었다. 이런 기라성 같은 기성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고 호평을 받는 것은 흥분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문학의 오후” 세 번째 모임은 1956년 6월 19일 오후 3시부터 국어국문학회 주최로 소강당에서 열렸다. 박희연(국문 3)의 “밤의 정령”, 유경환(정외 1)의 “호수의 노래”, 육명심(영문 2)의 “질항아리” 등이 낭송되었는데, 이는 모두 수준작들로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959년 11월 22일에 개최된 “연세문학의 밤”(제9회) 행사는 그 동안 198회의 교내 작품발표회를 가졌던 줄기찬 문학수업의 표현이었다. 특히 동문 작가의 적극적인 참여로 재학생들의 문학 의욕이 크게 고취되었다. 박영준, 양주동, 박두진 등 교수들의 참여와 장서언, 전영경, 황우헌, 이용원, 정공채, 최상규 등 동문 작가 및 유경환(정외 4), 왕수영(국문 4), 마종기(의학 1) 등의 재학생 작가, 박태옥(영문 3), 강위석(수학 3), 김대두(영문 4), 이영희(국문 3), 정건영(국문 1), 정현종(철학 1), 김춘석(국문 1), 육명심(영문 4), 장정자(국문 2), 최연홍(행정 1) 등 문학 활동에 정진하고 있는 재학생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영문과 동문으로서는 황우헌과 최상규가 참석하였고, 재학생으로서는 박태옥, 김대두, 육명심 등이 참가하였다.

이 세 번의 “문학의 오후” 또는 “문학의 밤” 행사는 영문과 단독으로 개최한 모임은 아니었으나 영문과 학생들이 그때그때마다 참가하여 자신들의 자작 작품들을 낭송하여 평을 받고 토론하는 계기였고 이를 통해 문학 훈련을 받는 기회였다.


2. 영문학의 밤


영문과 단독으로 영문학의 밤을 개최한 것은 1958년도이다. 그 해 11월 10일 당시의 영문과 학과장이던 최재서 교수는 수도여자사범대학 강당에서 제1회 “영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의 문과대학장 조의설 교수의 사회로 시작되어 경기고등학교 교사 서광수 동문의 “문학에 있어서의 질서관,” 본 대학교 문과대학 송석중 선생의 “헉슬리의 미래세계”, 이봉국 조교수의 “셰익스피어의 무대와 그 예술”, 최재서 교수의“셰익스피어 비극의 개념” 등에 대한 강연 발표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바리톤 변성엽 동문이 박정윤 씨의 반주로 “My Lovely Celia”(George Monro), “Flow Gently, Sweet Afton”(Robert Burns), “Bonnie Doon”(Robert Burns), “The Last Rose of Summer”(Thomas Moore), “Sweet and Low”(Alfred Tennyson), “Love’s Old Sweet Song”(G. Clifton Bindham) 등 영시에 곡을 부친 노래들을 불러 참석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의 순간도 있었다.

제2회 영문학의 밤은 1963년 11월 1일 의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당시의 학과장 권명수 교수의 격려사로 시작하여 시 낭송과 노래가 있은 후 제2부 행사로 영어연극 공연이 있었다.

2년 후인 1965년에는 영문학의 밤 행사가 학생들의 영어연극 공연으로 대치되었다(좀 더 구체적인 사항은 아래의 “영어연극”란 참고). 5월 14일 이현화 연출, 최가일 기획으로 김명렬, 이령자, 김현익이 출연하여 의과대학 강당에서 The Valiant를 공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문학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된 영어연극 공연이 1965년 이후로는 독립하게 된 것이다.

1970년에는 당시 2학년 학생들을 주축으로 제3회 영문학의 밤이 구 상경관 강당에서 “시와 음악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김태종, 유인국, 조정태, 최종철이 남성4중창으로 ‘켄터키 옛집’을 노래했고 이영수, 이혜련, 조정태, 최종철이 혼성4중창으로 “Annie Laurie”, “Swing Low, Sweet Chariot” 등을 노래했다. 중창에 이어 조정태와 유인국 등 몇 사람의 자작시 낭송이 있었으며, 영문과 동문이자 선배인 성찬경 시인 또한 특별출연으로 자작시 낭송을 해주었고, 음대 학생의 피아노 연주도 있었다.

1972년 5월 20일 구상경관 강당에서 제4회 영문학의 밤 행사가 개최되었다. 69학번의 임문호, 전용호, 강경화, 안경원, 이미숙 등의 영시 낭독이 조신권 교수의 지도 아래 있었고 강경화의 자작시 낭독이 있었으며, 중창과 독창의 순서도 있었다.

제5회 영문학의 밤은 1985년 4월 23일 무악극장에서 개최되었다. 대학원생 이경구의 베오울프 한 장면의 고대영어 낭독, 대학원생 안경원의 피아노 독주, 조신권 교수의 독창, 이성일 교수의 바이올린 연주 등이 있었다. 이듬해인 86년도에도 무악극장에서 시와 음악의 밤이 열려 대학원생 하미나의 피아노 독주, 대학원생 윤정호의 영시 낭송, 이성일 교수와 사회학과 전병재 교수의 바이올린 듀엣, 이상섭 교수 및 신임 문경환 교수의 독창 등이 있었다.

영문학의 밤은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며 시와 음악의 흥취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의 행사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학생회가 참여하면서 점차 정치적인 색깔을 띠면서 순수성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수들의 관심도 멀어지게 되었다.



2장 영어연극


영문과의 영어연극은 작품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영문학의 세계에 좀 더 친숙해지고자 하는 학도들의 뜻에 의해 시작되어 대학문화 속에서 각광받는 학생활동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989년 이후 정기 영어연극 공연의 맥은 끊어지다시피 하였다. 90년대부터 학생들은 교환학생과 이중전공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아야 생존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할 뿐만 아니라 점차 학부제로 전환되면서 일학년부터 한 학과에 소속되어 소속감을 느낄 기회가 감소함으로써 정기공연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다. 다만 일부 드라마 과목 시간에 수업의 일환으로서 가르치는 교수의 지도 아래 단편적인 영어연극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저절로 커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듯, 연세대 영문과의 영어연극이 그 맥락을 유지했던 것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무악 기슭의 조그만 무대 위에 온 정열을 쏟은 여러 동문들의 숨은 땀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현실적 침체 현상에 대한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고 1980년대 말까지 영어연극의 밑거름이 되었던 여러 동문들의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 연세대 영문과 영어연극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 하나의 역사로 정립하고자 한다(입수된 정보의 한계로 인해 서술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누락된 사항들이 더러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누락된 정보가 언젠가 채워져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1. 연세대 영어연극의 성립


영문과 영어연극의 전통이 틀을 갖추기 전인 1930년에 Les Miserables이 대학 차원에서 공연된 바 있으며 이것이 우리 대학 영어연극의 효시다. 그 후 1953년과 54년에 연희극예술연구회는 고 오화섭 교수의 지도ㆍ연출로 각각 한 차례의 영어연극(The Dear Departed와 Refund)이 공연된 바 있는데, 사실상 이는 영문과 학생들의 연극연습 과목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영문과에서 희곡을 가르치는 오화섭 교수가 영문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연희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기획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던 중 영문과가 자체 행사로서 공연의 첫발을 내디디기 시작한 것은 1963년 11월 1일로, 그때 공연된 것은 Booth Tarkington의 The Trysting Place다. 이로부터 학과 내의 잔치 비슷한 행사로 영어연극이 해를 거듭하면서 1985년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학과 내의 ‘즐기는 행사’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대학 영어연극의 모범으로서 주목을 받으며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연세대 영문과는 수많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영어연극 공연의 전통을 지켜온 것이다. 당시는 어느 대학도 영어연극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으니 만큼, 연세대 영문과의 공연은 모든 영문학도의 탐구와 실험의 정신을 일깨운 중요한 시도였다.  

연세대 영문과의 영어연극이 다른 데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여기서 더 중요하게 기억해 두어야 할 만한 사항은 그 어려운 시작이 전적으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위에 언급한 The Trysting Place를 소개하는 1회 공연에서부터 연출 등 모든 일을 학생 스스로의 힘으로 했다. 권명수 교수의 지도하에,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현화가 연출을 맡았고 김준철, 신영희, 정상미, 이현남 등이 출연하였으며 그 외의 많은 영문과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이현화 동문이 후일 굴지의 극작가로 활약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공연 장소는 의과대학 강당이었다.

당시의 공연 모습은 지금과는 좀 달라서, 위의 공연은 ‘영문학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어 1부에서는 시와 음악, 2부에서 영어연극,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사정이 열악한 가운데 교수들의 염려 속에서도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우리 영어연극은 연중행사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어연극 제1회 “영문학의 밤”이자 또한 제1회 영어연극 공연이었다.

1965년 5월 14일 제2회 영문학의 밤―내지 제2회 영어연극―행사에서 The Valiant가 소개되었는데, 역시 이현화 동문의 연출로 의과대학 강당에서 공연되었다. 최가일이 기획을 맡고 김명렬, 이령자, 김현익 등이 출연하였다. 현재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성일 동문도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스태프진에 참여하여 일조하였다(그가 후일 교수로서 연세대 영어연극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내력도 있다).

영문과의 영어연극이 ‘영문학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공연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며 제3회부터는 독립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1966년 11월 29∼30일 양일간 공연된 제3회 영어연극, August Strindberg의 Easter는 우리 영어연극의 역량을 대외에 과시하고 안으로는 그 전통과 기반을 확고히 다진 뜻있는 공연이었다. 이현화 연출, 김용국 기획으로, 고기자, 구학서, 이령자, 신형자, 오기환, 윤춘석 등이 출연하여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었다. 대부분의 소도구들을 각자의 집에서 가져오거나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 했던 상황 중에서 Easter는 박대선 총장의 공관에서 모든 소품들을 빌려다 공연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 스태프로는 김용국, 김태홍, 이철수, 구경회, 민경희, 신용장, 남상을, 권용자, 박옥남, 장덕희 등이 참여하였다. Easter 공연에 부치는 오화섭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당시의 공연 모습을 회고할 수 있다.


우리 영문과 학생들이 학회활동의 하나로 영어연극을 하겠다고 한다. 연극이 학생생활을 윤택하게 해 준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윤택하다 함은 오랜 시간의 연습을 겪은 뒤에 오는 풍부한 인생체험이어야 한다. 연극은 곧 진실한 체험예술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은 이제 영어를 말하고 영어가 주는 생활감정에 젖어보는 공부를 한 셈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들의 이번 발표는 교실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연극에서 서툴지 모르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면에서 풍부한 정서를 간직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다. 인간이란 따지고 보면 약하지 않다는 낙관을 연극이 보여주듯이 추위를 무릅쓰고 밤늦게까지 연습에 몰두하는 학생들의 정열 역시 대견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번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의 손에 의해서 무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발음과 억양을 지도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해야 되겠다.


1968년에 공연된 제4회 영어연극은 J. M. Burrey의 The Will이었다. 네 번째 공연인 The Will은 1968년 9월 19∼20일 양일간 외국인학교 강당에서 한상철 연출, 박병태 기획으로 막이 올랐었다. 출연진은 김덕배, 안영대, 우남희, 김순자, 박철종, 이혜영, 조연제 동문 등이었다. 이렇게 영문과 영어연극은 탄생되어 대학연극의 선도 역할을 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2. 드라마 페스티발


1969년부터 영문과의 영어연극은 그 성격을 약간 달리하게 되었다. 1953년경부터 연세극예술연구회 지도교수 겸 연출을 맡아 대학연극을 선도하여 온 오화섭 교수는 1969년부터 영문과 각 학년별 대항 영어연극 공연을 주도하였다. 그 해에 이루어진 영문과 영어연극 공연은 학년별 경연의 형식이었다. 『연세춘추』는 이를 “셰익스피어 탄생 405주년 기념 제1회 영어연극”이라는 행사명으로 다루고 있다. 이름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로서 셰익스피어 탄생일로 간주되는 4월 23일에 개최되었다. 2, 3, 4학년이 각각 한 작품씩 공연하여, 가장 훌륭한 공연을 선정하고, 또한 각 학년에서 한 명씩 최우수 연기자들을 뽑아 수상하였다. 이는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영어연극에의 참여의 장을 제공하고자 하여 교수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었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1969년 4월 22∼23 양일간 외국인학교 강당에서 학년마다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2학년은 Stanley Houghton의 The Dear Departed, 3학년은 Marcel Aymé Lithuania, 그리고 4학년은 Eugene Labiche의 Wedding March를 각각 공연했다. 이 중에서 3학년의 Lithuania 공연이 우승하였고 학년별 최우수 연기자상은 조연제(2), 문경환(3), 이영철(4) 동문이 각각 수상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것이 “셰익스피어 탄생”을 기념하는 제1회 영어연극이었지만, 영문과 영어연극의 전체 역사 중 위의 공연은 제5회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횟수를 계산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제6회 영어연극 공연은 1970년 4월 22∼23일 양일간 종합관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는데, 2학년은 Thornton Wilder의 The Happy Journey를 이혜련, 유인국 등이 출연하여 공연하였고, 3학년은 There is no Glory in the World를 박규순 연출로, 박혜경, 손 빈, 신한곤, 김종문 등이 출연하여 공연하였다. 4학년의 공연은 없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셰익스피어 탄생기념 Drama 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2, 3, 4학년이 각각 공연했으며, 1학년도 막간에 노래를 부르는 등 축제에 함께 참여하였다. Drama Festival은 영문과 내의 큰 잔치였으며 교수들과 학부모, 그리고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 영문과 학생들의 그 동안 닦은 기량을 보여주고 즐기는 자리였고 학우간, 선후배간 학창시절의 정열을 한껏 쏟았던 정겨운 자리였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공연을 나열식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제7회: 1971년 4월 21일, 경영관 강당. 2학년: Jean Giraudoux의 The Apollo of Bellac (연출: 전문희; 출연: 이희원, 박희풍, 장태신). 3학년: Alice  Gerstenberg의 The Pot Boiler (연출: 최명규; 기획: 전용호; 출연: 전용호, 박세언, 이원기, 이미숙, 이혜련(채희옥). 4학년: Shakespeare의 The Merchant of Venice 4막 1장 (연출: 박규순; 출연: 오현세, 박규순, 조연제, 최규순). 수상: 4학년.

제8회: 1972년 4월 23, 종합관 소극장. 2학년: Booth Tarkington의 The Trysting Place (연출: 전용준; 기획: 강대석; 출연: 이홍표, 김동진, 유인순, 정해복, 전용준). 3학년: Serafin & Joaquin Alvarez Quntero의 A Sunny Morning (연출: 이혜경; 출연: 박희풍, 김혜옥, 윤형희). 4학년: Shakespeare의 Othello Act V. 수상: 3학년. 

제9회: 1973년 4월 24일, 종합관 소극장. 2학년: Lawrence Langner의 Another Way Out. 3학년: Friz O. Karinthy의 Refund. 4학년: Shakespeare의 The Merchant of Venice 중 한 막 (연출: 김혜옥 ; 출연: 스산나, 박세진, 이동근, 함동호, 강무현, 이활용, 김호상). 수상: 3학년.

제10회: 1974년 4월 23일, 종합관 소극장. 2학년: Thornton Wilder의 The Happy Journey (연출: 강석원; 기획: 이광우; 출연: 황기학, 양영순, 구안숙, 이성현, 진상준, 신삼현). 3학년: Stanley Houghton의 The Dear Departed (연출: 박배영). 4학년: Shakespeare의 A Midsummer Night's Dream 중 한 막 (연출: 전용준; 출연: 강대석, 김민성, 정해복). 수상: 3학년.       

제11회: 1975년 6월 7일, 종합관 소극장. 2학년: The Boor (연출: 문제성; 출연: 임승정, 박영표). 3학년: Serafin & Joaquin Alvarez Quntero의 A Sunny Morning (연출: 전일규; 기획: 진상준; 출연: 윤상균, 김옥희, 안상철). 4학년: Shakespeare의 Twelfth Night 중 한 막 (연출: 이혜정; 기획: 이상국; 출연: 강희자, 윤수영, 변형완, 최종철, 박재원, 김정배, 이성구, 이상국. 수상: 4학년.

제12회: 1976년 5월 1일, 경영대학원 강당. 2학년: Thornton Wilder의 The Happy Journey (연출: 한상인; 출연: 윤석두, 임혜옥, 주희수, 김현주, 정경숙, 어영석). 3학년: Joel Ensana의 Please, No Flowers (기획: 황관영; 출연: 권선주, 임정경, 윤형숙, 김은경, 최승철, 허재령). 4학년: Shakespeare의 The Merchant of Venice 중 한 막 (연출: 윤상균; 스태프: 구안숙, 장태신, 이석홍, 김향순, 진상준; 출연: 박재훈, 민병희, 손문기, 전일규, 이광우, 강석원, 황기학, 권남숙). 수상: 3학년.

이로써 Drama Festival로서의 영어연극은 발전적인 종결을 맺게 되었다. 다만 아직은 대외적인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 것이 한계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3. 전학년 합작의 전막공연


1977년은 학년별 대항 형식을 마감하고 전 학년이 함께 하나의 작품을 전막으로 공연하기 시작한 분수령이 된 해이다. 학년별 경연은 모든 영문과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각 학년이 적은 수로 하나의 작품을 택했기 때문에 단막극 위주여서 무게 있는 작품에 이르지 못하는 단점도 있었다. ‘전학년 한 작품 공연’이라는 새로운 의도는 ‘대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을 향한 제일보였다고 할 수 있다.

1977년 6월 7일에 제13회 공연이 있었다. Thornton Wilder의 Our Town을 토목 공학과 4학년 허철호 동문의 연출과 황관영 기획, 그리고 소병덕, 봉원일, 윤석두 등을 스태프로 하고, 최홍관, 장은숙, 어영석, 유명화, 권영건, 문건영, 이동진, 김영림, 박혜정, 김미양, 박전홍, 고봉선, 한광섭, 황관영, 오진숙, 소병덕, 이승희, 노병인, 송은경, 정 현, 방미원, 김상열 등이 대강당에서 출연하였다.

재14회 행사로는 1978년 9월 22∼23일 양일간 무악극장에서 Lillian Hellman의 The Little Foxes가 공연되었다. 연출은 김대수와 Christopher Chung이 맡았고, 기획은 이안득이었으며, 출연진은 오세원, 송은경, 변창립, 임순희, 노종국, 위인선, 이정우, 이현옥, 강용순, 이정훈 등이었다. 그리고 스태프로는 김명복, 윤석두, 정호영, 조진호, 이경원, 권영린, 윤진일, 김은주, 여은주, 이예성, 배순애, 박명희, 하미나, 박영서, 박주현, 고춘배, 박기웅, 박동업, 이성겸, 김형근, 김대식, 이수록 등이었다. 여러 사람이 합동하여 이루어낸 힘든 작품이었다. 

1978년까지의 공연이 외국 희곡 일변도였다면, 79년도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무악극장에서 공연된 Whai, Whai, Long Long Time Ago는 과감한 시도의 결과였다.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를 조오곤의 영어번역으로 공연한 것이다. 우리나라 평안도 전설을 소재로 하여 하늘의 뜻과 인간의 뜻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 부활, 승천 등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공연하는 작품이 갖는 것과 유사한 여러 문제들, 즉 구어체 내지 한국적 색채를 살리는 언어 등의 문제를 내보이긴 했으나, 이러한 ‘번역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도였다. 한국적 색채를 살리기 위해 탈춤 연구반에서 탈춤을 배워 등장인물들이 모두 탈을 쓰고 공연했다는 점, 국악반의 도움을 얻어 음향효과를 국악기의 생음악으로 사용했다는 점, 이런 것은 매우 훌륭한 면모로 평가될 만하다. 이 공연의 연출은 김현숙이 맡았고, 출연진은 최종걸, 여은주, 태재완, 서진희, 김선숙, 강경숙, 노혜란, 김영호, 이성겸 등이었다. 그리고 스태프로는 김명복, 전희구, 이정우, 현정주, 이태성, 조현경, 윤진일, 김진영, 고춘배, 박주현, 이충노, 박동업, 윤민우, 강용순, 김은주, 변창립, 조진호, 하미나, 김승경, 오연주 등이었다.

1980년 11월 27∼29일 3일간 무악극장에서 제16회 행사로 공연된 Icarus는 희랍신화에 소재를 두었다는 면에서 다른 색채를 띤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인간은 거대한 신의 힘 앞에 무력한 존재이지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꿈과 의지를 버릴 수 없다는 내용을 다룬 작품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코러스 부분들을 흰 가운과 흰 탈로 연출한 것은 좋은 시도였다. 신화를 현대극으로 옮기는 데 무리가 있어 관중들에게 전달상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배우는 학생으로서 참신한 주제를 성실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연출은 전희구, 출연진은 정상환, 김용만, 박신영, 김수경, 송영경, 심봉섭, 유제명, 구제순, 최혜경, 조응래, 박상기, 차혜숙, 이영미, 권영석 등이었다. 그리고 스태프로는 진영종, 한상인, 김대식, 박동업, 성원근, 현정주, 김은주, 이정우, 최종걸, 원영호, 고춘배, 고창석, 변창립, 박주현, 하미나, 박명희, 조현경, 박경애(이대 무용과) 등이 있었다.        

1981년 9월 3∼4일 양일간 무악극장에서 있었던 제17회 공연은 영문과 영어연극이 시도한 첫 번째의 Shakespeare 전막공연이었고, 그것도 가히 수준급 공연이었으며, 연세대 영문과 영어연극이 또 한 번 전기를 맞고 있음을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위한 체력단련으로 출연자들이 모두 발레를 배우는 식의 체계적인 연기 수업 등 진지하고 ‘전문적’인 준비가 돋보였다. 전희구 유철환 연출로, 김용태, 한혜숙, 이성열, 박재경, 김성철, 고재남, 신현미, 이선의, 김성희, 최건영, 이정혜 등이 출연하였으며, 김준환, 정상환, 구제순, 박동업, 박완신, 안승호, 라진권, 지인영, 김숙겸, 김혜란, 민선영, 허정희, 김수경, 양혜경(세종대 무용과) 등이 스태프로 참여하였다.

1982년에는 Christopher Marlowe의 Doctor Faustus가 우리말 연극과 영어연극을 통틀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1982년 9월 2∼4일까지 3일간 무악극장에서 김성철 연출로, 강혜원 김상경, 나선인, 남기헌, 서경훈, 양연순, 엄지혜, 우유선, 유영주, 윤정호, 이신영, 이희숙, 이민우, 이영이, 최웅기, 원광희, 장승미, 정형란, 최문규, 홍혜경, 황미선, 이선의 등이 출연했고, 스태프로는 손지태, 김용태, 한혜숙, 신현미, 박재경, 이정혜, 우성희, 박도주, 염일엽, 송영욱, 민선영, 우희구, 이성열, 나기란, 정선혜, 노미옥(세종대 무용과), 이석재, 고순영, 김미경, 최종민, 박종곤, 유성은, 박용호, 안승호, 이기형, 심재랑, 김지현, 노재경, 고재남 등이 참여했다. 1983년 한국 셰익스피어학회 주최로 열린 Shakespeare Festival에서 발췌 공연하여 각 대학의 영문과 교수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을 만큼 훌륭한 공연이었다. 이것이 제18회 영어연극 공연이었다.

제19회 공연은 1983년 9월 8일부터 10까지 3일간 무악극장에서 있었다. 공연하기 어렵기로 알려진 Macbeth가 연세대 영문과 학생들의 힘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윤정호 연출로 강현주 권석장, 김미자, 김상경, 나선인, 박영은, 박용호, 박종구, 반재신, 봉준수, 신수호, 이도순, 이민우, 이병식, 우미성, 윤지영, 장예진, 장승미, 조성관, 조재영, 최영미, 최종민, 최희정, 허산주 등이 출연하였고, 남기헌, 원광희, 심재랑, 이석구, 이희숙, 고순영, 홍혜경, 김성은, 황미선, 최융기, 유성은, 박혜란, 우유선, 김성철, 유영주, 노재경, 김계숙, 이영선, 윤미영, 고형창, 서승성, 강원혜, 고기정, 홍희령, 이영미, 이영숙, 신현미, 서홍원, 이희숙 등이 스태프로 참여하였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내내 쉼 없는 연습을 한 것은, 그들이 공연하려는 것이 성공하기 힘들기로 정편 난 Macbeth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도전해보고 싶은’ 성취욕이 있었던 것이다.

1984년, 또 하나의 셰익스피어 전막극이 무악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나선인 동문 연출로 공연된 The Taming of the Shrew에 출연한 학생은 이민우, 김민수, 서현주, 이수정, 강금희, 장세진, 김정환, 박서영, 박은미, 박영은, 권석장, 김경선, 성윤미, 장예진, 채택근, 김영미, 장혜경, 서지원, 안영준, 전창주, 박은미, 최지희, 김덕준, 이호정, 우미성, 김우석, 최희정, 권영찬, 임선영 등이었으며, 스태프로는 서승성, 노재경, 장승미, 서홍원, 허산주, 전주현(세종대 무용과), 우유선, 남윤희, 박종영, 이영미, 홍혜경, 심재랑, 반재신, 김정민, 우희구, 고형창, 유영두, 최영미, 윤희영, 신수호, 강선진, 강현주, 서영숙, 윤지영, 최종민, 김미자, 황미선, 이선희, 김상경, 신영동, 한규조, 봉준수, 고순영, 박희준 등이 함께하였다. 이것이 제20회 공연이었다. 

1985년 제21회 공연은 Thornton Wilder의 The Skin of Our Teeth였다. 역시 무악극장에서 있었던 것으로 연출은 안영준, 배우로는 고광수, 김경숙, 김미영, 김민수, 이미영, 임지숙, 전창주, 조나현, 채택근, 권기주, 김애경, 김정아, 배기형, 손정미, 이정희, 이호윤, 전용선, 정유경, 한지희 등이 출연하였고 스탭으로는 박영은, 박서영, 권석장, 남윤희, 김선영, 박은미, 성윤미, 심미현, 이수정, 한미선, 한규조, 권영찬, 김영미, 김우석, 김정환, 김주연, 박은미, 서지원, 임선영, 장세진, 반정원, 이윤주, 정지인 등이 있었다. 이 공연은 한 사람의 주인공보다도 여러 출연자들의 앙상블이 주를 이루는 작품을 선정해 모든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작품이었다.

1986년 9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22회 정기공연이 무악극장에서 있었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Romeo and Juliet.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는 들지 못하는 그의 초기 작품이지만 작가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이자 세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에게 가장 어필하여 공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출은 전창주, 조연출은 김정환, 김민수가 맡았고 기획은 장세진, 총무는 김영미, 스탭으로는 이미영, 서지원, 권기주, 고광수, 권영찬, 반정원, 박일형, 정승민, 김경선, 이정희, 유승은, 김금주, 김경숙, 홍성훈, 이윤주, 이선희, 김정아, 이성민, 박정영, 조나현, 이미경, 이석재, 김우석, 한규조, 이민우 등이 있었다. 배우로는 김태은, 채택근, 이승범, 이선경, 고정아, 고원권, 오명신, 전용선, 이화정, 임유경, 이지은, 고상숙, 이정필, 정유경, 김현주, 정수미, 장용설, 이호윤, 길영례, 이원화 등이 출연하였다.

제23회 정기공연은 1987년 9월 1일부터 3일까지 셰익스피어의 A Midsummer Night’s Dream이 이호윤 동문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의 극대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축제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해서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에 의해 여러 차례 공연작으로 선정되었던 작품이다. 젊은 연인들은 퍼크의 실수로 사랑의 짝이 바뀌는 혼란을 겪고 요정의 여왕인 타이타니아는 당나귀로 바뀐 바텀과 사랑에 빠지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랑의 가변성과 삶의 무상함을 요정과 인간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진 환상적인 분위기로 재현하고 있다. 59학번부터 83학번에 이르는 유난히 많은 동문들이 후원을 아끼지않았던 공연이기도 했다. 기획은 이승범, 총무 권기주, 분장에 김태은, 이원화, 박정영,장유진, 의상에 강정숙, 이선경, 이지현, 김미정, 김현주, 조명에 이정만, 반정원, 주영일, 딕션에 정수미, 소도구에 장용설, 홍보에 박일형, 김지영, 배기형, 음향에 오명신, 양보인, 섭외에 김애경과 김덕준, 무대장치에 전창주, 김상경, 권석장 등이 참여하였고 세종대 전주현 씨가 안무를 도와주었다. 배우로는 성필상, 이지은, 전용선, 조수정, 남권우, 남종익, 정승민, 홍원기, 김훈배, 이수진, 표은영, 신진숙, 유승은, 김주연, 김길현, 임유경 등이 출연했다.

1988년은 올림픽 등 국제행사에 많은 재학생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등 바쁜 한해를 보냈기 때문인지 정기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 24회 정기공연은 한 해를 건너뛰어 1989년 9월 7일 셰익스피어의 Twelfth Night으로 막이 올랐다. 남권우가 연출을 맡았으며, 기획에 김길현, 총무에 김지영, 배우로 남종익, 박선영, 신혜정, 이진숙, 이동원, 전창수, 홍지선, 김성완, 김지영, 성시남, 이희경, 임명재, 태미경 등이 출연했고 스탭으로는 김훈배, 김은주, 박은경, 소묘정, 송효원, 이신애, 이은숙, 이재복, 유현미, 정소영, 한정민, 김영지, 모윤신, 양정원, 유정현, 이정필 동문이 딕션에 김진명, 사진에 전창주 등이 참여하였다.

아쉽게도 전학년이 한 해에 한 작품을 올리는 정기공연은 제24회 1989년 공연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막을 내리기 이전, 1983년부터 영어연극은 새로운 실마리를 찾으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 영어연극 성숙기


방금 언급한 ‘새로운 실마리’의 하나는 1983년 4월 23일 한국 셰익스피어학회 주최로 열린 Shakespeare Festival에서 Christopher Marlowe의 Doctor Faustus를 발췌 공연한 일이다. 김성철 연출로, 강혜원 김상경, 나선인, 남기헌, 서경훈, 양연순, 엄지혜, 우유선, 유영주, 윤정호, 이신영, 이희숙, 이민우, 이영이, 최웅기, 원광희, 장승미, 정형란, 최문규, 홍혜경, 황미선, 이선의 등이 출연하여 각 대학의 영문과 교수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런 전국규모의 연극 행사는 각 대학의 영문과를 무형적으로 선양시키는 참으로 값진 일이었다. 

이듬해인 1984년 5월 연세대 영문과 연극팀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개최된 전국 대학생 영어연극 경연대회에 Macbeth로 참여했다. 이성일 교수의 지도아래 윤정호 연출, 강현주, 권석장, 봉준수, 우미성, 윤지영, 조성관, 최종민, 허산주 등이 출연했고, 스태프로는 남기헌, 원광희, 이석구, 최융기, 유성은, 이영선, 고형창, 고기정, 이영숙, 서홍원 등이 참여했다. 전막이 아닌 발췌 공연이었지만 모두가 열연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985년 3월 15∼17일까지 3일간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Hamlet 공연은 연세대 영문과 연극공연의 잠재력을 마음껏 과시한 기념비적인 공연이었다. 이는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공연이자 동시에 연세대 영문과 영어연극 20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부학생들과 합동으로 전막을 공연한 이 행사에서 전희구와 우미성은 각각 연출과 조연출, 정상환은 기획을 맡았고, 서홍원(원3)은 Hamlet, 윤정호(원1)은 Claudius, 허산주(4)는 Gertrude, 봉준수(원1)는 Polonius, 우희구(4)는 Laertes, 이호정(3)은 Ophelia, 최종민(원1)은 Horatio, 이선의(원3)는 Rosencranz, 전창주(2)는 Guildenstern, 남기헌(원1)은 lst Player, 권남현(3)은 2nd Player, 최지희(3)는 3rd Player, 박영은(3)은 Reynaldo로 각각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스태프로는 장예진, 한미선, 라진권, 원영호, 이영선(85 졸), 이영숙(원1), 송윤수, 권영주, 김은영, 이영옥, 오은하, 정현자, 이혜옥, 강금희, 황미선, 장지연, 홍자경, 조성관, 한규조, 박종영, 유인철(원1) 등이 참여하였다. ‘정식 공연’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1000원의 입장료를 책정했으나 객석은 초만원이었다. 영어공연이라는 언어적인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석에는 영문과 이외의 관객도 매우 많았다. 출연진들의 열연은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진한 감동과 친근감을 안겨주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위의 연극팀 중 일부―우미성(조연출), 서홍원(Hamlet), 이호정(Ophelia), 윤정호(Claudius), 봉준수(Polonius), 최종민(Horatio)―가 전북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셰익스피어학회에 이성일 교수의 지도 아래 참석하여 Hamlet의 주요 장면을 연기했다. 무대장치도 없는 발췌 공연일 뿐이었는데도 셰익스피어학회 회원들과 지방대학교의 학생들로부터 학생극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공연이 끝난 뒤 빈 객석에 남아있던 전북대 영문과의 한 대학원생은 그 동안 영문학 전공에 대해 많이 회의적이었는데 오늘 Hamlet 공연을 보고 영문학 전공을 잘 했다는 생각까지 들고 앞으로 공부에 더 매진해야겠다는 열정이 새롭게 생겼다면서 자신이 가져온 책에 오필리어 이호정과 조연출 우미성의 사인을 받기도 하였다. 리셉션에서도 셰익스피어 학회 회원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참가자들은 멀리까지 내려온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행사였다.

83년도에서 85년도에 이르는 기간은 연세대 영문과의 영어연극이 성숙기를 맞는 기간이었다. 종합 예술로서의 연극이 지니는 무게를 학생들의 힘으로, 그것도 외국어로 극복하는 데에는 많은 난관이 따르기 마련이다. 학생연극일지라도 하나의 무대예술을 실현하는 이상 최선을 다해 최고의 예술성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연세대 영문과 학생들은 연례행사화한 영어연극을 통해 젊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전통을 20여 년 이어왔다. 다른 학교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발군의 축제, 그 풍성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학창 스토리는 그러나 89년 Twelfth Night 공연 이후 맥이 끊기게 되었다. 연세대 영문과 영어연극이 성숙기에 들어서면서 휴면상태에 들어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이로써 그 잠재력을 소진한 것은 물론 아니다. 언젠가 큰 하품과 함께 커다란 기지개를 켜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무대에 다시 서게 되리라 굳게 믿는다.



3장 문학창작

 

영문과 학생들과 동문 및 교수들의 문학창작 활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아마도 1922년 교수와 학생들의 학술연구 내지 문예창작의 발표지로서 창간된 『연희』지로부터 출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영문과 출신’으로 이야기를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 이 당시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만 있었지 영문과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영문과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 시절 연희전문학교에 다녔던 모든 학생들은 거의가 다 문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졸업 후 각자의 취향과 적성과 전공 선택의 필요에 따라 국어국문학으로 나간 사람도 있고, 역사학으로 나간 사람도 있으며, 또 영어영문학으로 나간 사람도 있었다. 가령 이묘묵과 박술음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출신이지만 졸업 이후 그 당시 영문학과의 과목이었던 영어와 영어학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그들을 ‘영문인’(英文人)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며, 윤동주도 연희 문과 출신(41년도)이지만 졸업 이듬해 (일본 릿쿄대학에서) 영문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영문인’이라 부르는 데에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영문인’을 정의하는 것이 무리인 경우도 있겠지만, 영문과가 생긴 1946년 이전의 기간 동안에는 영문인과 비영문인을 구분하여 문학활동을 서술하는 것이 매우 힘들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못하다는 관점에서 서술을 시작한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또 하나 미리 밝혀두는 것은, 졸업 후 문예계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많으나 여기서는 학창시절에 괄목할 만한 문예활동, 예컨대 어떤 선구적 역할이나 공식 수상, 문예지나 신춘문예 당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학창시절의 문예활동에 있어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경우를 기준으로 서술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


1. 1920∼30년대: 여명기의 연전문단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문학창작의 길은 고난의 길이 될 때가 많다. 굴곡된 삶에 위안거리를 제공하고 왜곡된 역사와 문화에 냉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문학의 본령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연희』의 간행에는 정인보 교수의 지도 아래 많은 학생들의 수고가 있었다. 창간호는 정성봉, 2호는 박술음, 3·4호는 염형우, 5호는 김치선, 6호는 김영호, 8호는 유근식 등이 각각 편집을 맡아 문학활동을 주동했다.

박술음이 학생시절에 직접 창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예지 출간 등을 통한 문학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시의 연전문단에 밑거름과 활력소가 되어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졸업 후 그는 문학보다는 영어교육과 교육행정 및 국사(國事)에 더 많이 참여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염형우는 재학 당시 『연희』지 편집뿐 아니라 자신이 여러 편의 시를 쓰고 영시를 번역하는 등 왕성한 문학활동을 하였다. 1925년 연희문과 졸업 2년 후에는 독일의 극작가 하웁트만의 몽환시 「한넬레의 승천」을 영역본으로부터 번역하여 소개함으로써 독일희곡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데에 공헌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연희』지는 8호까지 나오고 그만 중단되었지만 당시의 학생들에게는 작품발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지면이었다. 이묘묵(22졸), 김윤경(22졸)을 비롯하여, 박술음(24졸), 염형우(25졸), 정인승(25졸), 정태진(25졸), 박용철(중퇴), 이은상(중퇴), 유근식(현재의 유진, 32졸), 박영준(34졸) 등은 1930년 전후해서 『연희』지를 통하여 시, 소설 혹은 소품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정인승은 재학 당시에는 시를, 정태진은 평론을 주로 썼지만 졸업 후에는 창작보다는 우리말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으며 조선말 사전을 만드는 일에 큰 공을 세웠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비록 중퇴하였지만 후에 한국 문단에서 크게 활동을 하며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긴 이들이 박용철, 이은상 등이다. 용아(龍兒) 박용철은 재학 당시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서 신극운동에도 가담하였으며 동화극 “해피나라”를 『연희』 제3호에 발표하는 등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해외문학파의 동인으로서 번역시와 번역희곡 등을 통해 번역문학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나서는 주로 시창작에 힘을 기울이다가 1938년 5월 12일 폐결핵으로 34세의 나이에 타계하였으며, 사후 1년 만에 『박용철전집』 전 2권이 간행되었다.

노산 이은상은 1923년에서 이듬해까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적을 두고 문학수업을 했다.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는 시와 시조의 대가이지만, 『연희』를 통한 그의 문학 수업은 오히려 소설에 있었던 듯하다. 재학 중에 시 2편과 소설 2편을 발표하였지만,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하였다.

『연희』지에 실린 작품 중 많은 것들이 습작수준 정도라 할 수 있지만, 수준급의 논문도 다수 발견된다. 3·1운동에 실패한 허탈감과 새로운 식민정책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기에서 받는 압박감에 짓눌린 당시의 문학도들은 허무주의에 가까우면서도 개성적인 자유를 갈망하였다. 그들은 대개 일제하의 정규적인 학교과정에 만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규수업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졸업을 하지 못하고 중퇴한 사람들이 많았던 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

1922년에 창간되었던 『연희』지는 제8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고 1932년에는 그 뒤를 이어 『문우』지가 창간되었다. 당시는 민족주의와 이른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사이의 격한 대립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고, 그런 때문인지 『문우』 창간호에서는 프로문학적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렵의 문학활동에는 박영준, 설정식, 이시우, 임동혁, 김형두, 나선채, 최득원, 박삼경, 양기철, 남석종 등이 참가하였으며, 한국의 사실동화 선구자인 이구조를 비롯하여 승운순, 남응손, 이영철 등은 아동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다. 『문우』에 나타나지 않은 문학도들도 있었으니, 유치환(시), 최인준(소설), 최경종(시), 김상훈(시), 이기열(시), 김유정(소설) 등이 그 예이다.

이 시기에 탄생한 문학동인지로서 1934년에 출간된 『삼사문학(三四文學)』을 언급해 둘 만하다. 『삼사문학』은 원래 무슨 문학적 주의나 주장을 내세운 모임이 아니고 첫 출발부터 잡지 간행을 목표로 삼은 동인지였다. 당시에는 신춘문예나 몇몇 잡지의 현상모집 이외에는 문단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 동인지의 간행은 무명 문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삼사문학』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 동문은 그 이유와 경로는 잘 알 수 없지만 현재 북한에 있다고 한다. 동인 가운데 1960년대까지 문학활동을 계속한 이는 장서언 동문뿐이다. 이양하 교수의 처남이기도 한 시인 장서언은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는데, 졸업 훨씬 이전인 1930년 『동광』에 “이발사의 봄” 등 6편의 감각적인 모더니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었고, 1947년에는 극단 신협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48년부터는 휘문고 영어 교사, 그리고 83년도부터는 홍익공전 교수로 재직했는데, 불행히도 그 이후의 행적 내지 생사여부에 대한 정보가 현재로서는 입수되지 않고 있다.

장서언을 언급하면서 동기동창생이자 역시 시인인 김도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도성 동문은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1940년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47년부터는 중앙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희대학교 영문과 강사로도 출강했으며, 1948년에는 첫 시집 『고란초』를 출간했다. 1949년 미국 유학중 6·25전쟁이 터져 도쿄 주둔 유엔군 사령부 심리작전부에 근무하면서 1952년 두 번째 시집 『갈대』를 출간하기도 했다. 낭만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시풍을 지녔던 김도성 시인은 1956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어떤 문학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아직 입수되지 않은 상태지만, 이 기회를 통해 차후에 알려지기를 기대하면서 여기에 소개해 두는 바이다.

1935년에는 (『연세춘추』의 전신인) 『연전타임즈』가 출간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대학신문 중 효시였다. 『연전타임즈』가 학생들의 문학 활동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사회적 제약에 대한 강한 자주의식을 지향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문학운동에 공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1940년대의 연희문단과 윤동주, 송몽규, 유영, 박승훈, 김수영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이후 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졌고, 신사참배라는 정신적 강압수단을 이용하여 신민화(臣民化)운동을 전개하던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다가 1939년에는 급기야 전면적인 일본어상용까지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나, 윤동주, 김성도, 송몽규 등은 순 한글로 시를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1941년에 『문우』지는 폐간될 수밖에 없었으나, 이들의 시정신이 어두운 시기를 비춰주는 가운데 연희문학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연희전문학교 문우회는 『문우』지 마지막 호를 간행했다. 이후 강제로 해체당한 이 폐간호는 일제하에서도 연희의 문학정신이 시들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게재된 모든 원고가 일본어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도, 야아생, 윤동주, 김삼불, 송몽규 등은 한글 시를 발표하였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후자와 마찬가지로 민족정신을 지키다가 옥사한 순절 시인이다.

1940년대의 학창시절에 문학활동을 한 영문인으로는 유영과 박승훈을 들 수 있다. 유영 동문은 1943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후일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박승훈 동문은 1948년 동 학과를 졸업한 후 건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서 특히 흑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미국문학사를 강의하였다. 두 동문 모두 학생시절부터 신념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한 수업을 거쳤다. 「발, 발, 발」, 「영점하의 개새끼들」, 「서울의 밤」 등, 좀 괴팍스런 소설을 쓰기도 한 박승훈 동문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주 박식한 인물로서 매우 박식한 문화비평적 작가였다.

1945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문학에 뜻을 두었던 학생들은 “새마을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창작수업을 했다. 당시 새마을은 신촌(新村)의 우리말 번역으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고자 하는 문학도들의 의욕을 대변한 것이었다. 특히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연희전문학교의 기독교적 전통은 문학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정신적인 좌표가 될 수 있었다. “새마을 문학연구회”는 가끔 김기림 등을 초청하여 문학에 대한 토론을 하였는데, 그 중반에 들어서면서 1947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박승훈을 주축으로 하는 기독교적 세력과 좌익세력으로 나뉘어 흩어지게 된다. 이들의 작품은 대개 (『연전타임즈』의 후신인) 『연희타임즈』를 통하여 발표되었으니, 이를 통해 학창의 문학활동을 주도했던 사람이 박승훈 동문이다.

40년대의 동문 문학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김수영을 빼놓을 수가 있을까. 시인 김수영은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에 학병을 피하여 만주로 갔다가 해방 후 월남, 1946∼4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며 영문학 공부를 하다가 중퇴하였다. 6·25전쟁 중에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는데 그때 미군 장교의 통역을 했다. 처음에는 영문학 작품 번역에 주력하다가 휴전 후에는 신예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등장했다. 1968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위에 언급한 몇몇 동문의 경우처럼, 김수영이 학창시절 어떤 문학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현재까지는 입수된 정보가 없다. 이 기회를 통해 차후 알려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3. 1950년대의 연희문단과 차범석, 황운헌, 김정숙, 김종희


6·25 전쟁 이후 한 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학생 문학운동은 1953년 6월 15일 『연희춘추』 창간을 전후해서 다시 전개되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수업하던 문학도들이 ‘발표기관’으로서의 『연희춘추』가 생기자 이를 중심으로 차츰 작품 활동을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부산 가교에서 문학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문학도들로는 정창범, 전영경, 석용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연희춘추』의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문학활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당시 영문과 출신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차범석(47입/66졸)과 황운헌(50입/56졸)이었다. 차범석은 최근까지 대한민국예술원 원장의 직책에서 예술진흥에 헌신하였고, 8순의 노령에도 여덟 번째 희곡집 『옥단어』(푸른사상, 2003)를 출간하는 등 창작열이 식지 않다가 2006년 6월 6일 작고하였다. 황운헌 시인은 1973년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 낯선 이역 땅에서 23년간 살면서도 외로워하기보다는 절대순수의 세계를 추구하며,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데에 힘을 쏟으며 굳세게 살다가 2002년 5월 5일에 브라질의 상파울로 자택에서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이 무렵 문학도들의 문학활동은 주로 국문과와 영문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2년 11월 6일에는 국문학회가, 1953년 5월 6일에는 영문학회가 발족되어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문학활동을 재개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최재서 및 오화섭 교수 등의 문학 강연이 자주 개최되어 많은 문학도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1954년에는 소설가 박영준과 시인 박두진이 출강하여 창작활동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의 영문학도 중 하나가 방금 소개한 황운헌이다. 또 한 사람의 동문인 김정숙은 후일 김정원(金貞沅)이라는 필명으로 문단활동을 했다.

부산 임시교사에서 서울의 본교로 환교하게 되자, 부산분교에 재학하던 학생들은 동인회 “석녀”를 만들어 당시의 영문학과 2학년 학생이었던 김활(53입/58졸)을 중심으로 문학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1960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나와서 계명대학교 교수로서 영소설을 가르치다가 1990년대 후반에 작고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으로 문학활동을 한 인물은 육명심, 최상규, 하재익, 김종희 등이다. 당시 영문학과 2학년생이었던 육명심(55입/60졸)은 『연희춘추』 창간 이래 처음 실시한 1956년 3월 신춘문예 현상모집에서 “항아리”라는 작품으로 시부분에서 입선하였는데, 이는 교내 최초의 공개적 현상모집으로 당시 문학도들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육명심 동문은 시 창작과 연희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며 “제17포로수용소”를 비롯해서 4회나 무대에 출연한 일도 있는데, 졸업 후로는 시 창작보다 사진 예술에 더 심취되어 서울 예술대학에서 사진학과 교수로서 30여 년 봉직하다가 1999년에 정년퇴직하였다.

1956년 6월초에는 (“연세문우회”의 모체인) “연희문우회”가 발족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서클로서 박영준, 박두진 등을 초빙하여 매주 금요일 작품발표와 함께 토론회를 가졌으며, 1957년 4월 27일에는 대외적인 작품발표를 위한 첫 번째 문학행사를 명동 음악회관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최상규(53입/57졸)는 당시 영문학과 4학년 학생으로서 1956년 『문학예술』 9월호에 “단면”이라는 단편소설로 소설가 황순원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이는 연희문단의 재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최상규는 이후 공주사범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59년 6월 『연세춘추』 창간 6주년 기념 현상모집에는 당시 영문과 3학년생이던 하재익(57입/62졸)의 “휴가오는 날”, 그리고 같은 영문과 3학년이었던 김종희(57입/61졸)의 “하얀 생명”이 소설부문에서 가작 입선하였다.

이 시기의 문인들은 주로 동인회를 만들어 작품발표를 하거나 등단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또는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를 통해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자작시와 소품 등을 낭송하면서 문학 수업을 쌓았다. 1950년대 후반에는 『연세춘추』 같은 발표지들이 나오면서 문학도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작품을 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경우로서 (고) 차범석, (고) 황운헌, 김정숙, 김종희 같은 동문들은 50년대 연희문단을 이끌어왔을 뿐 아니라 그 후에는 한국문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4. 1960년대의 연세문단과 노순환, 오혜령, 이현화, 최인호, 강은교


1959년 연희문우회가 연세문학회로 개칭된 후 연세대 학생들의 문학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60년 6월 29일에는 연세문학회 주최로 제10회 문학의 밤 행사가 YWCA에서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연세문학회는 『연세문학』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대학의 순수 문예지로는 처음 간행된 것이다.

61년도에 접어들면서는 많은 학생들이 『현대문학』, 『자유문학』 또는 『시조문학』 등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게 된다. 당시 영문과 3학년생이었던 노순환은 “노래하는 마누라”라는 소설로 『자유문학』에 등단하였고 1964년에는 안수길의 추천을 얻어 다시 등단하였다. 그 사이 1962년에는 『현대문학』에서 “변신초”로 제1회 추천을 받으면서 노순환은 연세문학의 새로운 호프로 등장하였다. 1972년 7월 15일자 『연세동문회보』 6면에 보면 노순환은 졸업하자마자 1962년 연세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최석한 동문과 결혼을 하였다 하는데, 그 후 어떠한 창작활동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그간 입수된 정보이다.

노순환의 등장 이후 3년이 지난 1964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오혜령(61입/65졸)의 희곡 “흘러간 목마”가 가작으로 입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는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부문에서도 작품 『성야(聖夜)』로 당선되었다. 오혜령은 1960, 70년대에 희곡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작가로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 ‘평화의 집’을 세워 무의탁노인들과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돌보는 한편 생활 속의 영성을 추구하는 ‘평화여성수련원’을 남편 권오정 목사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1960년 후반기에는 본교의 재학생 혹은 동문들이 각 신춘문예에 많이 당선되어 연세문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영문과 학생으로는 1967년 최인호(2학년)가, 그리고 1968년에는 강은교(4학년)가 각각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였다. 최인호는 입학 후 8년이 지난 1972년에 졸업을 했고, 국문학에 뜻을 두고 있던 강은교는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서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부산 KBS라디오에서 매주 ‘강은교 문화읽기’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60년대의 연세문단을 이야기하면서 이현화 동문을 빼어놓을 수 없다. 그는 1962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1967년에 졸업한 뛰어난 희곡작가이자 연출가로, 오태석과 함께 오늘의 우리나라 연극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이 시기의 제일 마지막에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문단 등단이 졸업 후여서 상대적으로 늦었기 때문이다. 그가 “요한을 찾습니다”라는 희곡으로 중앙일보에 시와 희곡으로 당선한 것은 1970년이었다.

1960년대도 많은 영문학도들이 여러 매체에 시와 수필 또는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으나 졸업하고 나서까지 문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혜령 동문은 수필과 희곡 부문에서, 이현화 동문은 희곡과 연출 부문에서, 최인호 동문은 소설 부문에서, 그리고 강은교 동문은 시 부문에서 각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5. 1970년대의 연세문단과 강경화, 안경원


1970년대 전반기에 졸업한 국문과 및 영문과 동문들은 “성좌”(星座)라는 동인회를 만들었다. 영문과 학생으로는 강경화(69입/73졸)와 안경원(69입/73졸)이 참여했는데, 이 동인회 발의자들은 모두 『현대문학』에 등단했던 사람들이다. 1979년에는 이성겸(78입/84졸)이 “여름의 추억”이라는 시작품으로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경화는 학부 졸업 후 1975년과 1994년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으며, 세종대학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를 거쳐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동덕여자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봉직해오다가 퇴직하고 지금은 창작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세계의 전쟁”이라는 시작품으로 당선된 것은 영문과 학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4년이었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서도 추천이 완료 되었다.

안경원은 학부 졸업 후 1976년과 1996년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각각 받은 후 1961년 강릉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가정 사정으로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연세대 영문과 강사를 오랫동안 해왔다.

강경화와 안경원을 비롯한 연세동문들로 구성된 “성좌” 동인회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동인시집이 『적과 적』이다. 이 시집은 동문들로 구성된 동인회가 낸 첫 동인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6. 1980∼90년대의 연세문단과 성원근, 공지영, 김재용, 김연, 최인자


1980년대부터 연세대 영문과 창작활동의 새로운 기수로 등장한 동문은 성원근(시), 공지영(소설), 김재용(평론), 김연(소설), 최인자(평론) 등이다.

성원근(77입/85졸)은 학부를 졸업하면서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92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획”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은 그가 타계한 지 2년 후인 1996년 2월 1일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창작욕이 한창인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지영(81입/85졸)은 재학시절인 1984년 봄 “겨울편지”라는 시로 제5회 백양문학상을 받았고, 같은 해 가을 “다리아의 초상”이라는 소설로 제6회 백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동트는 새벽”이라는 소설로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등단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김재용(81입/85졸)은 졸업하던 해인 1985년에 “모더니즘의 가능성과 한계 - 김기림에서부터 김수영까지의 거리를 통해서 살핀다”라는 평론으로 『연세춘추』 1천호기념 문화상 평론부분 가작으로 당선되었다. 영문과를 졸업한 후 본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연세대 객원교수를 역임하였고, 1998년부터는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채용되어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으며, 북한문학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연(82입/95졸)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던 여고 2학년 시절 1980년 광주사태를 겪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같은 운동에 대해 회의하는 학생들에게 막걸리 잔을 던질 정도로 격분하곤 하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 대학졸업장을 포기하고 구로공단을 전전하는 ‘공순이’로 만 3년을 지냈다. 동지였던 남편과 결혼한 1988년 이후부터 경험하게 된 삶의 현실은 결국 대학 졸업장을 요구했다. 1992년에 미등록 제적되었던 학교에 복적한 그는 장장 14년 만인 1995년에 2월에 졸업장을 받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장편과 중편을 (때로는 차수옥이나 김수련이란 가명으로) 출간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도 한 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라는 작품으로 제2회 한겨례문학상을 수상했다. 졸업 후에는 취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최인자(85입/89졸)는 학부를 졸업 후 1991년 대학원 영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 후 비교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등단하여 현재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풍부한 문화감각을 지닌 평론가로서 앞으로 문화비평계에서 한 몫을 담당할 인재로 기대된다.


7. 2000년대 연세문단과 이슬, 박찬순


이슬(95입/99졸)은 1997년 당시 3학년생으로서 “역”이라는 제목의 시로 연세문화상인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년(2005년)에는 완전히 변모된 모습으로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기념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는데, 달라진 모습을 반영하듯 이슬이라는 본명 대신 ‘지하’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는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글쓰기 수련을 쌓아가고 있다.

60년대에 입학하여 졸업한 박찬순(65입/69졸)을 ‘2000년대 연세문단’에서 언급하는 것은 ‘시대착오’로 보일 것이다. 사실 ‘연세문단’의 서술에 그를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초두에 언급한 서술 원칙에 벗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것은 올해 즉 2006년의 일로서, 엄격하게 말해 학창시절의 문학활동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박찬순에게 거는 우리의 기대는 이러한 편집상의 체제를 잠시 제쳐두어도 좋을 만한 것이라고 판단되어 여기에 마지막으로 언급해 두고자 한다. “영문과 학생들의 역대 문예활동”이라는 큰 장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특이한 창작활동에 미래지향적 의미를 부여해 보려는 것이다.

박찬순의 그간 활동분야는 외화번역이다. 1968년 문화방송 PD로 입사하여 방송일을 시작한 그는 이내 결혼으로 얻은 연년생 남매의 엄마가 되어 사회와 단절된 채 살던 중 외화번역이라는 일에서 세상과의 회로를 찾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에 걸쳐 1000여 편의 외화를 번역해 낸 꾸준함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60세의 나이로 이룬 신춘문예 당선인 바 (당선작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조선족 옌볜 청년의 좌절을 그린 「가리봉 양꼬치」이다), 그의 꾸준한 창작정신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2000년부터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줄곧 응모했고, 2003년에는 당선 일보 직전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오기로” 계속 소설을 써서 결국 5전 6기 끝에 금년 최고령자로 당선한 것이다. 창작지망생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요, 나이든 지망생에게는 커다란 자극이자 모범이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이후를 향한 더욱 꾸준한 정진을 그에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