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돌아온 영문과 (92 이경랑) (2009.02.27)
- 작성일
- 2023.03.06
- 작성자
- 영문과수업관리조교
- 게시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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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영문과
92 이경랑
먼저 영문과의 60주년을 기념하며, 간략하게나마 저의 소감을 기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쓰려고 영문과를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강산도 변한다는 10년도 더 이전의 세월이 어제처럼 생생히 밀려와 감개가 무량합니다.
1992년 3월 열아홉 어린 제 인생의 목표였던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져 버렸지만, 그 힘든 고교시절을 버티게 했던 어린 제 인생의 목표는,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은 “대학”보다는 “영문과”에 들어오는 게 더 큰 목표였지 싶습니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그 이름이 주는 세련되고 지적이며 아름다운 이미지… 열아홉 제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 들어왔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느꼈던 그 무기력함과 문화충격은 상당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가 아닌, 그저 대학생이 되는 것 자체가 목표였던 저로서는, 그 목표를 이룬 후의 목표 상실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저와는 다른 영문과 신입생들에게서 받은 커다란 문화충격으로 인해 처음 몇 달은 방황을 했었습니다. 고3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했던 저와는 달리 어느새 여대생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동기들을 보며 느꼈던 충격은, 2003년 미국으로 유학을 나와서 느꼈던 문화충격보다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도 모르게 연세인, 영문인이 되어갔습니다. 저와는 그렇게도 달라보였던 동기들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더라도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동질감으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선배님들과 후배님들도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유대감을 느낍니다. 평생을 같이할 소중한 친구도 만나게 해 주었으니 고맙기까지 합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저도 모르게 영문과의 가족이 되었던 거지요.
지금은 없어진 종합관 뒤 잔디밭에서 영어 연극을 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군요. 영어 연극을 한다고 중얼중얼 영어를 외우고 다니던 모습을 타과 학생들이 보고는 영문과 학생 모두 다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다고 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외웠던 대사 몇 개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답니다. 그리고 토요일 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답을 써 내려가도 모자랐던 영어학개론 시험, 가방에 넣기 애매해서 예쁜 집을 만들어 들고 다녔던 영문학개관과 미문학개관 책들, “대”영문과를 강조하시던 교수님 등 영문인임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신 여러 교수님들, 신입생 환영회 때 들었던 영어로 개사한 소양강 처녀… 우리 과 학생 이외에 누가 이런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전공의 특성상 졸업 즈음에는 솔직히 영문과에 들어 온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재다능의 또 다른 말이 “특별한 재주 없음”이라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영문과 졸업생만의 특별히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에 우왕좌왕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저만의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졸업생들은 제 갈 길 잘 찾아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영문과를 졸업한 후에야 제 인생의 진정한 목표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나 친딸처럼 대해주신 지도교수님을 뵈면서 그 존경하는 마음이 교수님처럼 강단에 서고 싶다는 소망으로 변한 것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먼 길을 돌고 돌아 근 7년의 세월이 흐른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2003년, 남들은 유학 갔다 돌아오는 나이에 유학을 나와 맘으로도 몸으로도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절 지켜 주는 건, 연세대 영문과에 먹칠하기 싫은 오기가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우리 영문과 졸업생들과 함께 재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영문인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영문과가 생긴 지 6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초창기는 잘 모르겠지만, 일 년에 적어도 100명 이상은 입학을 했으니 우리 영문인이 6,000명은 족히 되었다는 말이 되네요. 이 회고사를 통해 전국, 전 세계의 우리 영문과 가족들을 일부라도 만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600년이 되어도 6,000년이 되어도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 가족이었음을 축하할 수 있는, 발전하는 영문과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끝으로 그동안 우리 영문인들의 영광된 졸업이 있기까지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주신 교수님들의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이만 회고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