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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60년"

제목
나 다시 돌아갈래!!! (90 황희창) (2009.02.07)
작성일
2023.03.06
작성자
영문과수업관리조교
게시글 내용


나 다시 돌아갈래!!!


90 황희창




90년 영문과에 입학하고 나서 아마 그 다음해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서라는 가수가 꽤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중 한 노래가 딱 제 노래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어’라는 이별 노래였는데, 노래 중간에 나오는 가사 한 자락 “영문도 모른 채?”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영문도 모른 채 영문과에 입학해, 영문과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영문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떻냐구요? ‘지금도 알 수 없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영화 ‘박하사탕’ 도입부에 설경구가 기찻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하며 절규하듯 외치는데, 제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바로 영문도 몰랐던 그 시절이니 말입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90년 봄. 그해 3월은 참 길었습니다. 3월 한 달이 마치 1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과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한 달만’이라는 단서 조항을 달고 내내 밥을 사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밥은 학회로 신입생들을 ‘모시기’ 위한 당근책이었습니다.


공짜 밥은 맛있었습니다. 아니, 점심 도시락이 아닌, 학생식당에서 선배들이 사주는 800원짜리 점심은 신선했습니다. 조금 더 달라고 하면 인심 좋은 밥 아줌마들은 한 주걱씩 더 퍼줬습니다. 간혹 800원 내고 두 사람이 먹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처음 가던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1교시 수업이었는데, 첫 등교 때부터 신입생티를 푹푹 냈습니다. ‘인 201’ ‘종 306’. 도대체 인은 뭐고, 종은 뭔지? 물어물어 강의실을 찾았습니다. 5분 정도 지각이었습니다. 뒷문을 빠끔 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주위를 여학생들이 포위했습니다. 그 날, 전 그 강의실이 꽃밭인 줄 알았습니다. 솔솔 풍겨오는 여학생들의 화장품 향기에 취해, 1시간 내내 교수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자유구나 싶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은 ‘군대’였습니다. 수업도 맘대로, 또 술을 마셔도, 담배를 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수업 시간 땡땡이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5교시 잠이 물밀듯 쏟아지던 시간, 종합관 뒷편 잔디밭에 누워 봄볕을 즐겼습니다. 전 자유인이었습니다.


‘노래패’라는 노래모임 학회와 ‘역사랑’이라는 역사 공부 학회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동아리에도 기웃거려 봤지만, 같은 과 구성원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더욱 동질감이 느껴졌습니다. 92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노래패’와 ‘역사랑’이 대학생활의 커다란 축을 담당했습니다. 간혹 세미나 끝내고 몰려가던 ‘청실홍실’의 그 떡복국과 계란말이가 사무치게 기억납니다. ‘청실홍실’ 그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주위 친구들이 다 잘나 보였습니다. 영어들은 박사겠다 싶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여야했습니다. The Show Must Go On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금새 뽀록(들통) 났습니다. 전공필수 과목인 Speech 시간.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A부터 Z까지 발음해보는 것이었습니다. F 발음 안 되는 친구들 몇 명 있었습니다. 특히 경상도 지역 동기들이 그랬습니다. 제 발음도 안 좋았습니다. 쇼는 거기서 중단됐습니다.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이 끝나면 당당하게 “숙제가 뭐냐?”고 물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노튼 앤솔로지의 그 허울 좋은 두께마냥, 영문학의 그 속 깊은 맛은 알 수 없었습니다. 노튼 앤솔로지는 베개로 좋았습니다. 자주 베개노릇을 하긴 했지만, 노튼은 영문과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파리대왕』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요? 노튼을 들고 다니는 건, 영문과의 특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고전문학도 버거웠던 저에게 15세기 영어는 ‘쇠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문학소년’ 과와는 거리가 멀었던 저에게 몇 백 년 전 영어는 해석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설사 해석이 됐더라도 감정이입이 안됐습니다. 해석판 없으면 불안에 떨어 ‘국어영문학과’ 다닌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기억력도 쇠퇴돼 고작 기억나는 게 셰익스피어, 워즈워드, 캔터베리 테일즈, 베오울프 등 단편적인 작품 제목, 작가 이름 정도입니다. 그래도 훗날 직장에 들어가서 영문과라고 뻐길 수 있었던 한 가지가 바로 캔터베리테일즈였습니다. 교수님께서 캔터베리 이야기 도입부인 “완 댓 아프릴 위드 이츠 쇼레스 소터∼∼∼” 30줄 정도를 외우라고 한 덕에, 어디 가서 영국식 억양 넣어가며 “완 댓 아프릴∼” 몇 자 섞으면 다른 사람들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 틈에 마지막 추임새를 넣습니다. ‘투∼앙’(이성일 교수님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영·문·과’라는 그 석자는 강박관념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영문과’ 학생들에게 영어를 잘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부응하지 못했던 저는 항상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영어회화학원 가서도 ‘영문과를 영문과라 말하지 못하는’ 비애가 있었고, 또 영어회화학원에 가면 왠지 안 될 것만 같은 비애, 그래서 영어공부는 항상 하되, 실력은 늘지 않는 비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학적인 감수성은 알게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나 봅니다. 92년 군에 입대해서 보초를 설 때면, 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고, 여름, 가을, 겨울이 주는 그 느낌을 마치 워즈워드라도 된 듯 하나라도 더 느껴보려 했습니다. 멋진 풍경을 보면서, 떠오르는 시구는 비록 없었지만, 그 멋진 풍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항상 갖춰져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영문과에 얽힌 추억들은 많습니다. 초등학교 이후, 다시 한 번 이성에 눈을 뜨게 했던 시절이었고, 그리고 잠깐이나마 풋사랑을 해봤고, 두 개 학회를 하면서 지리산 MT를 무려 7번 정도 가본 것 같고, MT가는 길에 나폴레옹 먹고 뻗어서 이후 양주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됐고,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연고제의 추억 등…


촌스러운 머리 모양과 촌스러운 잠바, 촌스러운 뿔테안경을 끼고, 본관 앞 해태상(?) 위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그 시절 저는, 어느 덧 30대 중반을 넘어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 브리치를 한 중년의 남성이 돼버렸습니다. 며칠 전 유난히 흰머리가 빛나던 날, 중앙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중도 앞을 지나다니는 많은 학생들은 16년 전 그 앞을 지나던 제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은 많이 달라보였겠죠.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저는 대학 동기들을 만날 때면 예전 그 강 너머 추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영문과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