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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의 역사49: 사피엔스, 진화적 불일치
작성일
2020.08.18
작성자
시스템생물학과 관리자
게시글 내용

2019-05-10


농경이 시작된 12000년 전 100만 명이던 인구가 산업혁명 초기에는 10억 명, 그리고 1950년에는 25억 명, 2000년에는 60억 명, 2018년에는 76억 명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30세를 넘지 못하던 평균 수명이 이제는 70을 넘었고 80을 자랑하는 나라도 30여 개국에 달합니다. 농경사회 진입 후 1만년 동안 사피엔스는 빠르게 진화하였지만,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와 함께 새로이 나타나는 해로운 유전적 변이들을 미쳐 거르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는 강하게 양성선택된 유전자에 편승하여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 해로운 변이를 어떤 조합으로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건강이 결정된다면, 우리 구성원 중 일부는 아플 수밖에 없으며 아픈 사람이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집단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현대인을 아프게 하는 진화의 덫이 또 있습니다. 소위 ‘진화적 불일치(evolutionary mismatch)’라 하여 지금까지의 적응적인 특성들이 급변한 환경과 그에 따른 새로운 선택압력에서 더 이상 적응적이지 않게 된 것이죠. 그러한 불일치는 산업혁명과 함께 한층 두드러집니다. 채 10세대도 지나지 않은 기간에 세상은 보다 위생적이고 보다 안전하게 변했으며, 풍부한 먹거리와 함께 인류는 과학, 기술, 예술 등의 활동에 투자하고 온갖 편의시설을 즐깁니다. 문화적 선택이 생물학적 자연선택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생리, 인지, 감정,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200년은 달라진 환경에 적합한 유용 변이가 자연선택되어 작동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피엔스는 30만년 동안이나 유전적 변이를 솎아내며 또 주변을 우호적으로 바꿔가며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게임에서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진화적 성공 이면에는 생물학적, 문화적 부적응 때문에 힘들어하는 구성원이 있습니다. 고혈압에 기인한 뇌졸중, 심혈관 질환은 현대인의 사망 원인 중 최상위권을 차지하며, 당뇨병은 사망 원인 중 5〜6위에 올라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은 구석기 수렵채집인이 접하지 못했던 식생활의 변화와 비활동적인 생활패턴 때문입니다. 공중보건과 위생환경 개선에 따라 각종 자가 면역질환도 증가하고 있는데, 이 역시 식생활 변화가 한 몫 합니다. 그리고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은 점점 더 흔한 병이 되어 가고 있는데, 달라진 작업환경과 사회적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으로 보입니다. 모두 진화적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질환입니다.


당뇨와 비만은 마치 유행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사피엔스는 식생이 풍부하지 않을 때 굶주림에서도 견딜 수 있는 대사와 풍족할 때 에너지를 비축해 두는 대사를 진화시켰습니다(절약 유전자형 가설, thrifty genotype hypothesis). 그리고 우리의 입맛은 단맛과 고소한 맛에 길들여져 고칼로리 당분과 지방을 탐합니다. 뇌의 시상하부는 허기 혹은 포만감을 다양한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을 통하여 겹겹이 조절하고 있으며, 덜 먹게 하는 네트워크는 더 먹게 하는 네트워크에 무시되게끔 설계되었습니다. 더욱, 장신경계를 따로 돌림으로써 뇌의 중추신경계에게 식욕 조절을 전담하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까페 글 13: 장, 제2의 뇌). 이러한 장치는 구석기 사피엔스에게 지극히 중요한 적응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뇨와 비만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러한 진화적 불일치는 임신한 엄마와 태아에게도 작동하여 발생학적 불일치를 만들어 냅니다(절약 표현형 가설, thrifty phenotype hypothesis). 이와 관련해서는 카페 글(15〜17: 성인병 태아유래 가설)에서 다루었습니다.


200만 년 전 이렉투스는 ‘오래 달리기’를 최고의 생존전략으로 채택했고, 그에 알맞은 신체 구조와 생리가 진화했습니다(생명의 역사 40: 호모 이렉투스, 오래 달리기). 사람만큼 오랫동안 달릴 수 있는 동물은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적응이 우리의 혈압을 높이는데 일조합니다. 오래 달리기가 선택되는 과정에서 털이 없어지고 땀샘이 생겨 체열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적응은 수분 손실을 유발해 혈액을 끈끈하게 하고 혈압을 낮춥니다. 그렇게 되면 뇌 혈액 공급이 원활치 않아 현기증에 이어 기절하게 됩니다. 땀을 흘리면 염분도 함께 빠지기 때문에 소금을 보충해 주어야 체내 적정 수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짠 음식을 먹고 나면 하루 이틀 정도 체중이 불어나는데, 소금과 균형을 맞추려고 임시로 몸에서 물을 더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금의 나트륨 이온량이 체내 수분량과 혈압을 결정합니다. 우리 조상이 오래 달리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금을 섭취하여 물을 체내에 많이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연선택은 짠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진화는 안전책으로 물과 소금을 체내에 적정치 이상으로 간직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오래 달리기 동안 탈수로 혈압이 떨어져 기절하는 것 보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물과 소금을 여유 있게 간직하는 쪽을 택한 것이죠.


현대인은 구석기인에 비해 소금을 많이 섭취하고 땀으로 덜 배출하기 때문에 고혈압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은 대체로 배고픈 상태에 있다가 큰 동물 사냥에 성공해야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구석기인은 가끔 있는 과식의 기회에 지방을 충분히 섭취하고 오래 간직함으로써 다가올 굶주림에 대비했습니다. 자연선택은 지방 보유 능력이 높은, 즉 음식에서 흡수한 지방을 간에서 말초혈관으로 실어 옮기는 운반체를 많이 만드는 사람을 선호했습니다. 그 운반체는 공모양의 콜레스테롤을 함유한 지질단백질인데, 공 내부에 지방이 많이 실리면 부풀어 올라 매우 밀도가 낮은 상태(VLDL, very low density lipoprotein)로 혈액을 돌아다닙니다. 이 VLDL은 근육과 같은 조직에 지방을 하역하고 저밀도 지질단백질(LDL, low density lipoprotein)로 됩니다. LDL에는 여전히 콜레스테롤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기타 조직과 동맥으로 운반됩니다. 문제는 현대인이 구석기 시대에 사람에 비해 훨씬 많은 지방을 섭취함에도 불구하고, 지방을 저장하려는 진화적 관성이 작동하여 필요한 양 이상의 지질단백질과 콜레스테롤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많아진 LDL이 동맥 안쪽 벽에 축적되면 혈관이 좁아지고 딱지(plaque)가 형성됩니다. 소금 섭취에 의한 고혈압과 상승작용이 일어나 거세진 혈류 흐름이 딱지에 상처를 내고 그 부위에 혈액응고 시스템 모여들어 피떡(혈전)을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동맥은 더 좁아지며, 좁아지다 못해 완전히 막히면 그 너머의 장기손상은 불 보듯 뻔합니다. 심장 부위 혈관이면 심장마비, 뇌혈관이면 뇌졸중인 것이죠.


동맥이 좁아지다 보면 부분적으로 혈류 속도가 빨라져 상대적으로 약한 내벽은 압력으로 뚫릴 수 있습니다. 뇌 속은 이런 파열에 특히 취약합니다. 뇌동맥에서 피가 새면 ‘출혈성 뇌졸중’ 또는 ‘뇌출혈’이 일어난 것으로, 혈전으로 뇌혈관이 막혀 생기는 ‘허혈성 뇌졸중’ 혹은 ‘뇌경색’과 구별됩니다. 뇌 다음으로 혈액이 많이 공급되는 기관인 콩팥의 사구체도 고혈압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기 십상입니다. 사구체는 혈액에 있는 폐기물을 걸러 소변으로 배출하는데, 고혈압으로 손상되면 폐기물이 걸러지지 않게 되겠죠. 콩팥기능 손상 즉, 신부전증의 1/4이 고혈압에 의한 것입니다. 하여간 수렵채집 시절 염분 섭취는 탈수를 방지하기 위한 적응이었지만, 요즘에는 고지방식과 더불어 고혈압을 유발해 탈수증보다 훨씬 많은 사망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정신질환도 진화적 부적응의 결과입니다. 인류학적 증거들은 구석기 시대에 살인으로 인한 사망이 동물의 공격이나 사고로 인한 사망보다 훨씬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텍사스 대학의 진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 박사는 살인 충동은 구석기 시대부터 보존된 진화의 자산이라고 주장합니다. 거의 남성에 의해 저질러졌는데, 살인을 통해 식량과 여성을 차지하여 자손 번식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또 사회적인 위상을 유지하거나 명예를 지키는 수단인 동시에 주도권을 과시함으로써 거두는 2차적 혜택을 누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피엔스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자기 길들이기’ 과정에 들어갔고, 살인을 통하여 포괄적 적합도를 높이기보다는 살해당할 위험을 낮추는 방편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모든 척추동물은 위험에 직면하여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스트레스 반응을 진화시켰습니다(fight-or-flight response). 이 반응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심리상태 중 일부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데, 문제는 물리적인 위험이나 가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위험 혹은 위협에도 반응이 일어나고, 또 지속되어 심신을 약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진화적 불일치에 따른 스트레스 반응의 부작용은 까페 글 (70: 스트레스 호르몬 반응, 진화적 불일치)에서 이미 소개했습니다.


두려움을 피하는 또 다른 방법은 공손하고 순종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학습화된 공포반응의 하나로 모든 포유동물 공통입니다(카페 글 4: 선천적 감정과 학습된 감정). 중증 우울장애 환자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순위 싸움에서 밀려난 동물이 보이는 행동과 유사합니다. 무력감, 절망, 열등감 등은 상위 개체에 대한 공격성을 죽이고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진화적인 적응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심화되는 불평등 구조 그리고 각종 매체로 떠도는 ‘잘난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우울증은 전 세계적으로 3억 5천만 명이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매년 약 80만 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2020년도에는 심혈관 질환에 이어 두 번째가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현대인의 건강과 직결된 면역 방어계의 진화적 불일치는 카페 글(9〜11, 미생물 전성시대)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1994년 랜디 네스(Randy Nesse)와 조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 박사는 그들의 책 ‘우리는 왜 병에 걸리는가(Why We Get Sick)’에서 6가지 진화적 이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i) 우리는 병원균과 공진화적 무기 경쟁 굴레에 있으며, 병원균은 우리보다 빠르게 진화한다. (ii) 자연선택은 빠른 환경 변화에 대처할 만큼 충분히 빠르지 않아 진화적 불일치에 직면한다. (iii) 진화는 생물에게 항상 맞교환을 강요한다(trade-offs). (iv)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며 작동하기보다 현재의 특성에 연연하여 그때 그때 메꾸는 식으로 작동한다. (v) 자연선택은 생존보다는 번식 성공에 치중한다. (자연선택은 나이 70일 때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막지 않고, 나이 16일 때 생존에 연연하지 않고 번식 성공을 위해 모험한다. 노인의 신체적인 쇠퇴나 젊은이의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는 부적응이 아니라 적응적인 것이다.) (vi) 열, 구역질, 걱정, 염려와 같은 방어 반응은 자체로 적응적이지만 우리를 불쾌하게 또 아프게 한다.』 이와 같은 진화적 사고를 접목한 병인론은 산업혁명 시기인 1850년 전염병이 공기 중 나쁜 기운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세균의 전파 때문이라는 ‘병원균 이론(germ theory)’에 버금가는 발상으로,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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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혈압과 관련된 부분은 리 골드만(Lee Goldman)의 저서 ‘진화의 배신 (김희정 옮김)’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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